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5장,새로운 구속사

호리홀리 2015. 4. 16. 11:57

   아담의 후예


  첫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이제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는다." 또한 이 서문은 출생과 작명의 패턴을 따라, 4장 마지막 부분(25-26)과 이어진다.

   첫 부모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5장의 서문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짓고, 아담은 그의 아들 셋의 이름을 짓는다. 나아가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아담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 같이, 아담은 "자기 모양대로 아들을 낳는다." 이리하여 아담은 셋의 아버지이며, 셋은 에노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후의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며(10장), (2) 하나님은 특히 아브라함과 그의 씨의 아버지이다(11장). 또한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시는 주제로 돌아간다(1:28; 5:2).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며 축복하듯이(창 9:26-27; 27:27; 48:15; 49:29), 하나님께서 계속 인류를 돌보시며 아담에게 주신 첫 복을 다음 세대로 넘겨 주신다(1:28; 5:1; 9:1; 12:3; 24:11). 마치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자신의 모든 복을 후손에게 넘겨주신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충만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던 원래의 계획은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씨(3:15), 아브라함의 씨(12:3), "유다 지파의 사자" (49:8-12; 계 5:5-13)를 통해 이어져 간다. 바로 이 기초 위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복 주시고" (엡 1:3), "우리를 그의 양자로 삼으시고" (1:5), 우리로 "기업을 얻게 하시며"(1:11), 우리로 그를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롬 8:15)고 말한다. 



      아담에서 셋을 통해 흐르는 족보는 바로 앞 장에 나타난 가인의 족보와 그 이름에 있어서 유사성이 많다. 즉 (1) 가인(4:17)과 게난(5:12), (2) 이랏(4:18)과 야렛(5:18), (3) 므후야엘(4:18)과 마할랄렐(5:12), (4) 므드사엘(4:18)과 므두셀라(5:21)는 발음이 비슷하다. 또한 가인의 후예에도 에녹(4:17)과 라멕(4:18)이 있듯이 셋의 후예에도 에녹(5:21)과 라멕(5:28)이 있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 이들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다. 



   족보의 수사학적 메시지



   위에 나타나는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일정한 패턴을 따라 체계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틀과 그 변화를 통해 저자는 수사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먼저 저자는 족장들을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소개해 간다.



   (1) A는 X세에 B를 낳았다.

   (2) A는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자녀들을 낳았다.

   (3) A는 X+Y세를 살고 죽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강조를 하고 있다.



   (1) "그가 죽었더라"



   5장에 있는 족보는 11:1-26에 있는 셈의 족보와 형식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5장에서는 각 사람을 소개하고 "그가 죽었더라"는 구를 지루할 정도로 첨가해 간다. 왜 저자는 이 족장들의 죽음을 강조해야 되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3:19).



   (2)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있지 아니하였더라"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에녹에 대한 소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독특한 말씀이 나타난다(24절).

   즉, 저자는 에녹의 예외를 강조하기 위해 각 족장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녹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왜 에녹은 예외였을까? 저자는 반복하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22, 24절)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한다(6:9).

   즉 에녹은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생명을 찾은 자요 아담의 운명을 벗어난 자의 예증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최종적이 아님을 에녹을 통해 저자는 발견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생명나무에로의 길이 열려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길을 찾았다. 저자는 이 주제를 17장에서 다시 다룬다. "내 앞에 행하고 온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리라"(17:1-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생명에로의 길이다.

   모세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생명과 축복, 죽음과 멸망을 너희 앞에 둔다" (신 30:15-16)고 말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법칙 몇 개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내산에서 준 율법과 더 나은 미래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신 30:5-16). 에녹(5:22), 노아(6:9), 아브라함(15:6)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산 자들이다.



   (3)노아



   가인계의 라멕(창 4:23-24)과 달리 셋의 후손 라멕(5:28-31)은 세상에 임하는 저주를 느낀다. 경건한 라멕은 그러나 위로의 때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이 저주로부터 구원을 가져올 것을 바라본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셋 가문의 역사를 도표로 볼 때, 그 절정은 노아에게 있으며 이 이야기는 결국 다음에 나올 홍수 심판을 향해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가인의 족보(4장)와 여기 있는 셋의 족보(5장)는 첫 타락(3장)과 홍수 심판(6:9 이하) 사이에 들어와 "타락과 심판"의 관계를 설정해 줄 뿐 아니라, 이 심판의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5장의 족보는 홍수 이야기를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여졌다. 홍수 이야기는 두개의 족보 사이에 주어지고 있다(5:32; 9:28, 29).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5:29). 8:21을 보면, 노아가 가져오는 위로는 방주 안에서 인류를 보전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홍수 후에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노아는 미래에 인류를 파멸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며 새로운 인류를 이루어 가는 조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