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31장,성화

호리홀리 2015. 4. 14. 12:26


        야곱이 이제 밧단 아람에 더 머물 이유는 없어졌다.

 열 두 자녀 뿐 아니라, 라헬을 통하여 요셉은 낳았고, 이제는 재산도 충분히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라반과의 삶을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어떤  계기가 필요하였다.

그때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의 부를 시기한다는 것을 야곱은 간접적으로 들었으며(1절), 라반의 안색이 돌변하여 ‘전과 같지 않음’을 직접 보았다(2절).
        그 동안 야곱과 라반 사이에는 사흘 길의 거리가 있었는데 (30:36-31:22), 이제는 회복할 수 없는 완전한 거리감을 갖게 되며 완전한 이별로 발전한다. 야곱의 부는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된다 (26:14). 바로 이 때 주님께서는 야곱에게 자기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다(3절). 이 약속은 원래 야곱이 벧엘에서 받은 것이며, 이 말씀은 야곱이 벧엘을 향해 돌아가야 함을 시사해 준다. 

        야곱이 자기 아내에게 말한다(31:4-13)

        야곱은 이제 아내들에게 비로소 말한다. 그 동안 그는 아내들에 대하여 긴 침묵을 일관하였지만, 이제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에서 아내들에게 말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이 시점에서 그는 아내들에게 라반과의 거리감을 극대화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지난 6년간의 세월에 대하여 정리하여 말한다. 여기에 제시된 야곱의 관점(31:7-12)은 바로 앞에 있는 네레이터의 관점(30:36-43)과 상당히 다르다. 여기에서는 야곱 자신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직접적이다.
        (1) 야곱은 아내들에게 먼저 현재의 위태로운 상황에 대하여 말한다(5절). ‘라반의 안색은 이전과 같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5절하). 이리하여 바로 앞의 1, 2절을 되돌아 본다. 야곱은 라반의 안색이 달라진 것에 대하여 자신을 방어한다(6절). 그는 그 동안 라반에 대하여 ‘힘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 (30:26, 29). 그러나 라반은 그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속였다(7절; 29:25). 야곱은 라반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말한다. 라반은 ‘열 번이나 그의 삯을 바꾸었다.’ 앞에서 라반은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고 말했지만(30:14), 그것은 아주 모호한 대답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야곱은 라반이 어떻게 속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8절). 즉, 라반은 야곱이 많이 낳는 양떼를 따라 때로는 ‘점박이’를, 또 때로는 ‘얼룩이’를 자기의 것으로 마음대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반이 어떻게 바꾸든지 간에, 좋은 품종의 새끼도 바뀌었다. 그것은 정확하고도, 완전한 것이었다. 라반에게는 너무나 좌절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짐승들이 어떤 말씀에 무조건적 순종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 점에 대하여 야곱은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고 결론을 내린다(9절).
        (3) 이제 야곱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그는 어떻게 양들이 어떤 새끼를 벨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는가? 그는 꿈을 꾸게 되었으며(10절), 하나님께서 그 꿈의 의미에 대하여 해석을 주셨다(12절). 여기에서는 ‘수 양’만 언급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약대와 나귀는 생략된다(30:43). 그는 일부를 통하여 전체를 말하고 있다. 이후에 우리는 요셉이 꿈꾸는 자임을 듣게 되지만, 야곱 역시 꿈꾸는 자였다.
        (4)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3절). 이 장면은 ‘벧엘 사건’을 다시 되돌아 본다. 여기의 전체적인 배경에도, ‘꿈, 하나님의 사자, 말씀. 임마누엘, 돌아가다, 벧엘’ 등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벧엘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즉, 야곱이나 내레이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 사건을 요약해주시면서, 야곱의 행동과 책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네가 너의 서원을 지키기 원하면, 지금 일어나, 떠나 돌아가라’는 삼중적 명령을 내리신다. 
        

         귀환(31:14-35) 
        

        야곱은 아내들에게 대단히 설득력 있게 말하였다. 먼저 라헬과 레아는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라고 말한다(14절). 이것은 부모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 수사의문이다. 반유목적 사회에서 이것은 심각한 발언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반역과 단절을 선동하는 언어이다(삼하 20:1; 왕상 12:16).
        나아가 라반의 딸들은 라반의 아들들의 말과 매우 유사하나, 방향은 반대쪽으로 말한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1절)라고 말했다. 라반의 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라”(16절)고 대답한다.
        바로 앞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고 말하였으며,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3절)고 말하였다. 이제 라반의 딸들은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대답한다. 즉, 라반은 지속적으로 계약을 어겼지만, 야곱은 지지 않고 이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으로 떠나는 데 가족들이 동의한다. 

        가나안으로(17-21절)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는 야곱의 여행을 더 큰 문맥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떠남과 돌아옴과 같다. 내레이터는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고 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18절), 야곱의 소유에 대한 합법성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도망’이었다 (21절). 이전에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쳤다’(27:43). 이제 그는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하였다”(21절). 여기에서 내레이터는 야곱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음을 강조한다. 야곱에게는 여러 아내들, 어린아이들, 젖먹이들, 여러 육축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느리고 강을 건너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강을 건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중요한 차원을 담고 있다. 그는 안도의 한 숨을 쉰 것이다.
        그러나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적질한 사건을 언급한다(19절). 그 때에 라반은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다”(19-20절). 즉, 여기에는 라헬의 도적질과 야곱의 도망이 함께 제시되고 있지만, 둘 중 첫 번째 사건은 훨씬 더 위험하고 심각하다. 라반은 야곱이 도주한 것을 알고 추격을 포기할 수 있었지만, 그의 조상 신인 드라빔을 분실한 것은 라반의 추격을 정당화 시킨다.  
        왜 라헬이 이런 일을 하였는가? 학자들은 그 동안 드라빔에 대하여 많은 설명들을 해왔다. (1) 누지(Nuzi)에서 발견된 문서에서는 고대 서북셈족들에게 가족신을 소유한 것은 최고의 유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고대 시리아에 있는 에마르(Emar) 지역에서 발견된 본문에서도 가족신과 소유권 사이에 관계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고향을 떠나는 라헬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2) 고대의 가족 신상은 그것을 소지한 자에게 보호와 축복을 해주는 종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라헬이 이런 신을 의지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3) 드라빔은 최소한 라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가져왔다는 설명도 있지만, 이런 동기까지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많아 보인다. 우리는 현재의 본문 속에서 라헬의 동기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내러티브의 세계를 살펴보면, 라헬이 고향을 떠날 때 자기 아버지의 ‘집안 신’을 도적질하는 것과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날 때 자기 아버지의 축복을 훔치는 것 사이에 유사성과 대조가 있다. 두 경우에 있어서, 동생이 장자에게 속한 것을 훔친다. 야곱이 축복을 훔친 것은 여기에서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신주를 훔치는 형태로 재현된다. 그러나 야곱은 이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음을 저자는 명백히 한다.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몰랐다(31:32). 

        

 

 라반의 추격과 언약체결(31:22-54) 

        
         라반의 추격(22-25절)
        라반은 야곱이 떠난 후 사흘 만에 사실을 알게 되며, 칠일 후에 드디어 따라잡게 되었다. 야곱의 식구들도 사흘 동안 죽으라고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라반이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만나게 될 때, 그는 그의 형제와 더불어 ‘장막을 쳤다’고 한다(25절). 여기에서 ‘장막을 치다’는 ‘진치다’는 뜻으로 공격대형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taqa’ > nita). 이리하여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이 장면은 앞에 나온 리브가의 시집가던 장면과 큰 대조를 이룬다(24장). 그 때에는 라반 집의 모든 사람들이 리브가를 축복하였으며,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아내들은 두려워 떨면서 도망치게 되었고(31절), 게다가 라반의 군대가 강을 건너 외국 땅까지 와서 그들을 공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24절). 옛날 리브가가 떠날 때에 라반은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24:34-49). 그 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라반도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 이 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야곱의 결혼과 떠남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라반이 파기할 수 없으며, 선악간에 말해서 안 된다. 하나님의 이 경고는 앞에서 야곱이 말한 바와 같이,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는 사실로 확증된다. 

                라반은 야곱을 보자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셨으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잔치하며 보낼 수 있었다’는 말은 그의 외식을 드러낼 뿐이다(27절). 그렇지만, 이 표현은 리브가가 시집 가던 날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 라반은 어쨌던 야곱에게 중요한 문제를 따진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26절). ‘칼로 잡은 자 같이’라는 표현은 야곱을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 라반에게로 향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20년 가운데 마지막 6년은 전체적으로 끔직한 생활이었다.
        라반은 자신에게 “야곱을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면서, 야곱의 도주와 연관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29절//24절). 라반은 아주 공정하고, 유화적이면서도 의분을 느끼고 정의로운 사람처럼 말한다. “나는 의롭고, 너를 괴롭힐 힘도 있지만, 너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선악간에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그가 ‘드라빔’을 분실한 시점은 바로 야곱이 도주할 때였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야곱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30절). 라반의 연설에서 야곱의 양과 소떼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즉, 이 문제는 제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야곱의 입장이 옳았다(31:6-13). 

       
        야곱은 먼저 조용하고, 겸손하게 대답한다.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31절).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그의 상황을 라반에게 이해시킨다.
        그러나 드라빔 사건은 심각한 고발이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걸고 무죄를 천명한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32절). 우리는 누가 도둑인지 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32절하).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이리하여 갈등이 높아진다. 라반은 모든 장막을 검사하였고,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으로 들어간다(33절). 그러나 라헬은 이미 준비를 해두었다. 즉,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34절). 라헬은 자신의 생리를 핑계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다. 만약 라헬이 이 때 생리를 하고 있었다면, 라반의 드라빔은 생리대 아래에 깔려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약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가족 신’으로서 드라빔의 체면이 말이 아니며, 신이 부정해진다.
        라반은 철저한 수사를 하였지만, 결국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분노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고발이 근거 없게 되었다. 그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에서 ‘발견하다’(33 상, 34 하, 35 하)가 세 번이나 나타나고 있다. 그 만큼 ‘드라빔을 찾고 감추는’ 문제가 심각하였다.  
        이제 판은 역전되었으며, 야곱은 저자세에서 고지로 넘어간다. 앞에서 라반은 검사로 출발하였는데, 이제 피고가 된다. 이 부분은 수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
        (1) 야곱은 먼저 바로 직전의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그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가택 수색을 당한 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런데 라반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야곱은 ‘나의 것’과 ‘당신의 것’을 대조한다(36-37절). 라반은 앞에서 법적인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야곱도 법적으로 대응한다. 이 부분에서 32절과 37절에 나오는 야곱의 말은 유사하지만, 어조와 내용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32절).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37절). 즉 앞에서는 ‘우리 형제들’이었지만, 뒤에서는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로 분화되고 있다. 왜냐하면, ‘라반이 그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향하여 진치고 공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31:25).
        (2) 수색건에서 힘을 얻은 야곱은 이제 지난 20년 간의 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38-40절에서 야곱이 ‘나’로서 주어로 나타나며, 야곱은 목자로서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보내는 동안, 라반이 요구하는 모든 보상을 다 처리해주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41절). 즉, 야곱의 지난 20년은 불면의 시간이었으며, 매일 도적의 위험 가운데 살았다.  
        또한 라반의 요구도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암양, 암염소, 양떼의 수양, 물린 것, 찢긴 것, 도적 맞은 것”에 대하여 일체의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야곱은 갚아주었지만 한번도 인정을 받은 적이 없다. 야곱은 ‘찢긴 짐승조차 라반에게 가져가지 않았다.’ 그런데 라반은 10번도 더 임금을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라반은 앞에서 달콤한 말을 다 하였지만, 사실은 야곱을 빈털터리로 보내고자 하였다(4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돌보아 주셨다. 즉, 이 싸움은 야곱과 라반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라반의 싸움이었다. 

         야곱과 라반의 언약체결식(31:43-54)

        이제 밧단 아람에서의 야곱 이야기는 야곱과 라반 사이에 언약 체결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삭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헤어진 것처럼(26:28-31), 야곱도 언약을 맺고 라반과 헤어진다. 라반은 야곱의 논증에 놀랐고, 완전히 굴복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알맹이가 전혀 없는 허풍만 늘어놓는다(43절).
        이 후 라반은 야곱에게 언약을 맺자고 제안한다(33절). 그들은 돌을 기둥으로 세워 증인으로 삼는다(44, 45절). 야곱에게는 이것은 벧엘의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들은 돌 무더기를 만든 후, 이름을 짓는다. 이리하여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칭하며,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칭하였다(47절). 또한 야곱은 ‘미스바’라고 이름지었다 (49절).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라반과의 화해로 매듭을 짓는다(53-5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