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27장,구속사의 완성

호리홀리 2015. 4. 13. 13:59

이제 장면은 바뀌어서 노인이 된 이삭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1절 상). 육신의 시력은 항상 영적인 시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아브라함의 줄기를 잘 잡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 하게 된다. 그런데 이삭은 그의 ‘맏아들 에서’를 불러서 사냥한 고기를 잡아 자신의 위하여 별미를 만들어 주면, 먹고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삭이 계속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우리는 세 가지 실마리를 보게 된다.
(1) 이삭은 에서를 향해 ‘내 아들’이라고 부른다. 물론 에서는 이삭의 아들이지만, 이 집안처럼 ‘역기능적인 가정’에서는 이것도 ‘편애의 일종’으로 들려진다(Cotter 200). 또한 이삭은 ‘육신적인 사랑’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에서는 그의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27:1). 이삭은 여전히 육신적인 순서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는 장자 우대론, 혹은 선임자 우대론을 신봉한다.
(2) 이삭은 또한 미식가였는 데, 에서가 사냥해온 요리한 고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에서의 고기 맛에 중독되었다. 그는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 죽기 전에 너를 마음껏 축복하리라”고 말한다(27 :4).
나이든 이삭이 이렇게 아들에게서 고기나 얻어먹고 그를 축복하려고 한다. 무슨 아버지 사랑이 이런가? 별미를 대접하는 아들이 더 사랑스러운가? 그는 자신의 기분과 비위를 잘 맞추는 에서가 너무 좋았다. 그는 아들의 겉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는 아들들의 내면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3) 이삭은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위기를 느끼고 빨리 축복을 전수해 주고 싶어하지만, 사실 이삭은 이 사건 이후에 수십 년을 더 살게 된다.
이런 이삭의 노년생활을 보면, 젊은 날, 리브가를 맞이할 때 “광야에서 묵상하던 이삭”의 옛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24:63). 그는 나이는 많아졌지만, 인격은 무르익지 못한 듯 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진다고 우리의 믿음이 자연스럽게 다져지고, 자동적으로 깊어져 가는 것은 아니다. 이삭은 젊은 날에 매우 탄탄한 신앙을 보여주었지만, 완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 앉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3. 리브가와 야곱(6-17절)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전수에 대하여 말할 때, 흥미롭게도 리브가가 엿듣게 된다. 리브가는 지체 없이 ‘그 아들 야곱’을 부른다(6절). 이삭에게는 에서가, 리브가에게는 야곱이 각각 ‘아들’이었다. 리브가는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을 야곱에게 전하며, ‘빨리 염소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말한다(8-9절).
        야곱은 그 자신이 형님 에서와 신체적으로 다른 점을 상기시키며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대답한다(11-12절). 그런데 이것이 정말 야곱이 던져야 할 질문이었을까? 그는 왜 그의 어머니가 제시하는 행동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기만하는 이 사건이 장차 어떤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벌 만을 생각하였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리브가와 야곱은 둘 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 그들의 윤리적, 인격적 성숙도는 매우 낮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고 대답한다(13절). 다시 한번 리브가는 야곱과의 일체성을 천명하며 왜곡된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4.4. 이삭과 야곱(27:18-30)

        이제 리브가는 그의 남편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며 야곱으로 하여금 가지고 이삭에게 나아가게 한다. 여기에서 리브가는 두 가지 준비를 더 해주고 있다. (1) 먼저 야곱에게 에서의 좋은 옷을 취하여 야곱에게 입히며(15절), (2) 염소 새끼 가죽으로 야곱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붙여준다(16절). 리브가는 치밀하게 모든 준비를 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형제들 사이에는 옷 만 바꿔 입을 때조차, 얼마나 갈등이 심해지는가?
        야곱은 두렵고 떨림으로 아버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그는 단지 ‘내 아버지여’라는 두 음절로 된 말만 한다(’abi). 그는 그의 목소리가 에서의 것인지, 그 자신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도록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삭의 귀는 눈 보다 훨씬 좋았으며, 곧 바로 ‘내 아들아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에서가 ‘내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에는 훨씬 더 따뜻하고, 정겹고, 우렁차게 불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에게 와락 안길 듯이 뛰어들며 불렀을 것이다.
        야곱은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대답한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야곱이 이렇게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쿠걸(Kugel)은 문장을 끊어서 새롭게 읽는다. 즉, “접니다. 에서는 당신의 장자입니다”(’anoki ‘esaw bekorka).
        이삭은 야곱의 말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하였냐고 묻는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을 팔며,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20절). 이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을 만져보며 확인하고자 한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21절). 그러나 리브가는 이미 이삭이 이와 같은 확인 절차를 할 것으로 예측하였고, 준비해 두었다.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몄다”(16절). 리브가가 야곱을 완전히 업어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삭은 야곱에게 입맞추고 그의 ‘향기’까지 맡는다. 이점에 대해서도 리브가는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는 에서의 옷 가운데 좋은 것을 취하여 야곱에게 입혔고(15절), 아마 이삭이 ‘냄새’에 약한 것을 알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주었을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축복의 서문에서,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말할 때, 이삭은 분명히 ‘에서의 들 판 냄새’를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 냄새에서부터 축복을 시작한다. 그는 들판의 냄새에서 더 넓은 자연과 역사와 구속사로 넘어가고 있다. 이삭의 축복은 다섯 가지로 분석된다.
        
        (1)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2)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3)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4)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5)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첫 번째 축복은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우주적 축복이다. 이 축복은 두 번째 축복의 근원이 된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나온다.
        세 번째 축복은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만민’과 ‘열국’이 야곱을 섬길 것을 말한다. 네 번째 축복은 야곱이 모든 친척들 가운데 주가 될 것을 말하며, 마지막 다섯 번째 축복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 야곱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킨다(12:1-3). 또한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는 축복은 유다 지파에게 장차 왕권이 주어질 것이라는 야곱의 축복을 예시해준다(27:29; 49:8 참조). 따라서 이삭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야곱을 통하여 흐르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4.5. 이삭과 에서 (27:30-41)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30절)는 말씀은 두 형제의 첫 탄생을 상기시켜 준다(Cotter 203). 모태에서는 에서가 먼저 나왔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데서는 야곱이 먼저 나왔다. 우리는 리브가와 야곱이 일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끝내었는지 또한 놀라게 된다. 만약에 야곱이 한 발이라도 늦었다고 한다면, 상황은 험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이삭과 야곱의 만남이 11절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이삭과 에서의 만남도 동일한 길이를 갖고 나타난다.
먼저 에서는 아버지에게 길게 말한다(31절). 그는 아버지에게 자랑할 것도 많았을 것이다. 앞에서 야곱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내 아버지여’라고만 불렀는데, 에서는 “일어나셔서 이 아들이 사냥해다가 만든 요리를 잡수시고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공동역).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충격을 받으며, 아버지는 ‘심히 크게 떨며’, 아들은 ‘방성대곡을 하며’, 둘 다 함께 야곱이 죽일 놈이라고 말한다(35-36절). 에서는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36절).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빌 복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지 않았느냐?”고 애절하게 묻는다(36절). 그러나 이삭은 모든 복을 야곱에게 주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통곡하며, 복을 조금이라도 달라고 절망적으로 간청한다. 이삭은 에서의 간청에 못이겨 에서에게 축복한다. 여기에 세 가지 사항이 제시된다.
        
(1) 첫 번째 축복은 야곱에게 준 축복과 형식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모두 도치된다.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을 주시길 원한다”고 말하였다(27:28). 이제 에서에게는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다”라고 말한다(27:39하).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은 ‘땅의 기름짐’으로부터 시작하며, ‘하늘 이슬’로 나아간다. 이것은 야곱에게 준 축복의 순서인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대칭을 이룬다. 또한 여기에서 주어는 야곱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아니고, ‘너의 주소’가 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가장 큰 대조는 전치사의 용법에 있다. 동일한 히브리어 전치사(min)가 사용되지만, 야곱에게는 ‘~의 일부’(part of)가 되며, 에서에게는 ‘~로부터 멀리’(far away from)이 된다. 축복의 형식은 같은 데, 내용은 정반대가 되며, 에서에게는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이 예언 되고 있다.
(2) 두 번째 예언은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로 제시된다. 이것은 옛적에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마엘에게 준 예언인,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과 매우 유사하다(창16:12). 에서는 이스마엘처럼 칼을 의지하며, 전쟁과 약탈로 인생을 살 것이다.

(3) 세 번째 예언은 “너는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로 시작한다. 결국 리브가가 모태에서 받은 신탁과 이삭의 예언은 일치하게 된다. 에서가 잃은 축복은 되돌릴 수 없고,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은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는 긍정적인 예언을 끝으로 준다. 이것은 마치 긴 터널의 끝에서 빛을 보는 것 같다. 에서는 정신적으로 야곱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을 벗고 나면 자유롭게 살 것이라고 말한다.

        야곱이 에서에게 축복을 가로챈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에서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41절). 성경에서 이렇게 내면적인 독백을 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결국 이삭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된 것 같다. 가족들 사이에 더 이상 사랑과 우정과 가족애와 따뜻한 식사와 여행과 교제가 없다. 이제는 모두 헤어지게 된다. 에서는 그의 특권과 자존심을 앗아간 야곱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삭이 족장으로 사는 동안 그의 행적은 주로 에서와 야곱의 출생과 갈등 이야기로 점철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독자들은 이삭의 무능과 야곱의 사기 행각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덕적 관점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평가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주로 야곱의 관점에서 모든 이야기를 읽고 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 의식이 없이 리브가와 야곱의 편을 들며, 본문 배후에 있는 더 깊은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이 에서를 이기도록 설정되어 있다. 리브가는 해산의 고통 가운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맡은 역할이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 자식인 에서와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어야 하는가? 그들은 믿음과 덕과 가정의 화목함 가운데 이 문제를 풀어야 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가정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삭의 가족들은 모두 살아있는 실제 인물들이다.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고, 판단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현실적인 갈등과 충돌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미리 일러주었지만, 이 뜻을 이루기 위해 각자 자신의 책임과 몫을 다 한다. 그들은 인형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선악을 선택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패하고 있다.
        (3) 부모가 각각 사랑하는 자식이 달랐다(25:28). 그들의 사랑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선함’이 아니라, 서로 편을 가르고, 다른 편에 대하여 무관심 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만드는 악한 힘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가족과 형제 갈등의 근원이 된다.
        (4) 이삭은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에, 두 형제의 관계가 위험한 것을 알았고, 리브가가 받은 신탁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하여, ‘상식’과 ‘자연적인 감정’ 만을 따르고 있다. 그는 에서를 한 번도 냉정하게 평가해 보지 않았으며, 아브라함과 자신의 축복을 맹목적으로 에서에게 모두 넘기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리고 있다.
        (5)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탁을 가장 직접적으로 들은 자이지만, 그 자신이 모든 비극과 슬픔과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된다. 그녀는 남편도 속인다. 큰 아들도 속여서 자기가 사랑하는 둘째 아들에게 모든 특권을 주려고 한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야곱도 자신의 속임수에 동참하게 한다.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고 다짐하며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먼 객지에 보내게 되고 임종 때 보지도 못하게 된다.
        (6) 에서는 가치 판단에 있어서 명백한 오류를 범한다. 그는 장자권을 경시하였다(26:32). 그는 자신 갖고 있는 특별한 지위와 임무를 달콤한 팥죽 한 그릇 정도의 가치 보다 못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나이 40세에 가나안 여인을 둘이나 취한다. 그것이 모자라 후에 이스마엘의 딸을 또 취하게 된다.  
        (7) 야곱 역시 도덕적인 부담을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장자권을 살 때, 형님의 약점을 이용하였다. 그가 잘못된 거래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였다. 우리는 “야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 없다. 야곱은 자기 의지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그의 참 모습인 ‘사기성’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그는 속성상 사기꾼이다. 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그의 아버지 이삭도 그렇게 말한다(27:35). 이 점에 있어서 에서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그는 두번이나 나를 속였습니다”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삭과 에서, 그리고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들은 모든 행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며, 의도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하여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죄를 지었다’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지만, 리브가와 야곱이 사용한 방법은 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악으로 선을 이루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사모하며, 기다리지도 않는다. 리브가는 아이를 낳은 후, 하나님의 신탁을 더 이상 구하지도 않는다.
        야곱과 리브가는 독자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선택을 하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신탁을 거스리며, 자기 본능대로 큰 아들에게 복을 주려고 하였다.
        어머니와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며, 그들의 꾀 대로 하나님의 신탁을 이루려고 한다. 모든 것이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