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25장,구속사

호리홀리 2015. 4. 13. 13:55

창세기에는 형제들 사이의 갈등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며, 이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어 왔음을 말하고 있다.

 

형제들의 갈등은 인류의 첫 가정을 이루었던 아담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룬 야곱의 집에 이르기까지 끊임 없이 반복되며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셈과 함과 야벳, 아브라함과 롯(삼촌과 조카),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에 깊은 긴장관계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형제 사이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넘어 진정한 화해와 하나님의 구원사적 은총이 이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에서와 야곱 사이에 생기는 갈등 장면을 보면서 늘 야곱의 편을 들면서 야곱의 나쁜 점도 좋은 방향에서 생각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패와 그 실패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곤 하였다.

 

우리는 창세기 25:19-27:41 본문을 보면서, 야곱과 에서 사이의 갈등을 좀 더 세밀히 분석하며, ‘역기능적 가정’이 된 선민의 가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런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 어머니의 복중에서 싸우는 야곱과 에서(25:19-25)

야곱의 탄생 이야기는 그의 족보에 대한 간략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19-20절).


이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의 탄생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로 연결되고 있다. 이제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삭에게로 넘어왔으며,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아마 이삭은 그의 어머니 사라의 사후에(창 23:1-20) 결혼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이제는 그도 가정을 세우고 후손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신임하는 종을 밧단 아람에 보내어 리브가를 데려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창24:1-67).

이제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임종하였고(창25:5-11), 이삭은 가장과 족장으로서 홀로 서게 된다.
그렇지만 이삭은 리브가를 통하여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리브가 역시 그의 시어머니였던 사라처럼 불임이었기 때문이었다(창25:21). 아내의 불임 모티프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평생 기다리며 사라까지 완전한 불임이었지만, 이삭은 약 20년 동안 기도하며 리브가는 한 번의 출산에 두 아들을 낳는다. 이리하여 야곱과 에서의 탄생은 그들의 아버지인 이삭의 기도로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삭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리브가는 잉태하게 된다. 아내의 불임에 대하여 아내를 탓하지 않고, 아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이삭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불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0년을 한결 같이 기도하였다.

1.1. 이삭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21절)

리브가의 불임 때문에 이삭은 아이를 갖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고 리브가는 잉태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에서 족장이나 구원자의 가정에 불임 문제가 생기면, 당사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장차 약속을 이어받거나 나라를 구원할 아들이 탄생하게 된다.

1.2. 리브가의 고통과 기도(22절)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비전형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즉, “그런데 리브가가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께로 나아갔다”(표준, 22절). 족장의 집에 쌍둥이를 배었다는 것도 특이한데 두 아들이 어머니의 ‘태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도 이례적이다. 여기에서 ‘싸우다’(ratsan)는 동사는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 뿐 아니라, ‘때려 부수다’(crush), ‘억압하다’(oppress)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형제의 싸움은 ‘치고, 때리고, 부수고, 누르는’ 싸움이었다. 따라서 리브가는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한다. 원문에서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라고 하지만 이 질문은 리브가의 “절망을 거칠고 살아 있는 언어”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라고 말하는데(시 133:1), 야곱과 에서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격렬하게 싸운다. 20년 동안 기다린 자식인데, 태 속에서부터 싸움을 하니 리브가로서는 기가 막힌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야곱과 에서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싸움과 갈등은 앞으로 수십 년 간 계속될 것이며, 이후 에돔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갈등으로까지 발전될 것이다. 그들의 첫 갈등이 태 안에서 이루어진다.
태중에서 두 아이들이 싸우는 것은 리브가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가서 여호와께 물으리라.”고 결심한다. ‘가서 주님께 묻다.’는 형식은 ‘하나님께 신탁을 구하는 전문 용어’이다(왕상 22:5; 왕하 3:11; 8:8 등). 자식이 없어서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자식들이 싸워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는다.

1.3. 하나님의 신탁

리브가는 그녀의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여기에 네 가지 사실이 신탁 가운데 예언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1) 리브가가 잉태한 두 아들은 두 민족을 이룰 것이며, 리브가는 두 민족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2) 그러나 두 민족은 함께 살 수 없다. 그들은 ‘나누어질 것’이며 태 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과 롯이 나누어진 것과 같을 것이다(창 13:8-10).  
(3) 두 족속 가운데 한 족속이 다른 족속 보다 더 강할 것이다.
(4) 그런데, 어린 자가 큰 자를 이길 것이다.
위에 제시된 네 가지 예언은 사실은 평행법을 따라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두 가지 예언으로 볼 수 있으며, 두 예언에서 각각 상반절은 축복이며, 하반절은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  
(1)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으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일 것이다.
(2) 한 족속이 저 족속 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첫 예언에서 리브가가 비록 두 민족의 어머니가 되어도, 그들이 서로 분열하고 대립한다면 그것은 어머니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픈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예언은 우리 번역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것은 “큰 자로 말하자면, 어린 자가 섬길 것이다”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이후에 이삭은 계속하여 별로 갈등이 없이 에서를 편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창세기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운명 역전’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적인 번역을 따라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리브가에겐 또 하나의 충격이 주어진다. 형과 동생의 관계가 역전이 되면,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간의 관계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마지막 유산을 정리할 때에도 동생이 장자로서 기업을 두 배로 받게 된다면, 장자는 분명히 분노할 것이다.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이 신탁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으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찾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각자 하나님의 뜻을 자기 편한대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며 가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4. 두 아들의 탄생과 이름짓기(24-25절)  
이제 시간이 되어서 드디어 두 아들이 태어났다. 내레이터는 “보라 그들이 쌍둥이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신탁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두 아들 가운데 에서가 먼저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으며,’ ‘온몸이 털 투성이’였다고 한다. 에서의 모습은 (1) 붉음과 (2) 털이라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이후에 에서가 장차 살 땅인 에돔 즉, ‘붉다’와 연결된다. 에서는 ‘붉은 인간’으로서 ‘붉은 땅’에 살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인 ‘온몸이 털 투성이’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 보다 ‘짐승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는 야성적인 존재이다. 히브리어에서 ‘에서’와 ‘세일’과 ‘털투성이’ (sha’ar)는 모두 발음이 비슷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에서는 장차 제시될 ‘들 사람’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는 장차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상징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야곱은 한 가지 특징 만 갖고 태어난다. 그는 ‘형님의 발꿈치를 잡고 먼저 나오려고’ 한다(26절). 에서는 그의 모습으로 소개되지만, 야곱은 동작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야곱의 두 번째 특징인, ‘털이 없는 매끄러운 모습’은 아직까지 소개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 27장에서 나올 것이다. 이것이 침묵되고 있는 이유는 야곱이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 앞에 가는 자는 누구든지 ‘발목 잡고 넘어뜨리는 자’가 될 것이다. 그는 그 동안 형님 보다 먼저 나오려고 죽으라고 싸웠는데, 늦게 나오게 되자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발목을 잡는다. 이리하여 그의 이름이 ‘야곱’ 즉 ‘발목 잡는 자’가 되었다.
이 후에 내레이터는 야곱과 에서의 태아적 시절의 갈등에서 곧 바로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넘어가며 가며 그 때 가정의 분위기를 그려준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 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7-28절).  

2.  장자권 거래(27-34절)

2.1. 가족 간의 불화(27-28절)

여기에는 야곱과 에서의 두 번째 대조가 제시된다. 에서는 (1) 날쌘 사냥꾼이 되며, (2) 들판에서 사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야곱은 (1) ‘종용한 사람’이 되며, (2) 장막에서 산다. 두 형제는 삶의 공간에 있어서, ‘들’과 ‘장막’으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첫 번째 대조가 되는 ‘날쌘 사냥꾼’과 ‘종용한 사람’의 대조는 뚜렷하지 않다. ‘종용한 사람’(개역)은 우리 말 성서에서 ‘조용한 사람’(개역개정), ‘성격이 차분한 사람’(표준), ‘성질이 차분하여’(공동)로 제시된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온전함, 진실함, 손상되지 않음, 건강함’을 뜻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을 보면, 야곱을 결코 ‘온전하거나 진실되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문맥에서는 ‘목적에 전념하는 자’란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Fokkelman 91).
두 형제의 대조적인 성격은 이삭의 가정에 다양성과 즐거움을 가져오는 대신, 가족 사이의 분란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사랑하다.’란 단어는 참 좋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편애가 되었으며 사랑을 통한 가족 상호간의 친밀성 보다는 오히려 대립과 모순을 가져오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의 파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도 자기 중심적이 되면, 분열과 파괴를 가져오게 된다.

2.2. 장자권을 파는 에서(창 25:29-34).

이제 장면이 바뀌어서,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두 형제가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장자권’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운명을 달리하게 되는지 제시된다. 그 당시에는 장자가 다른 자식들 보다 ‘두 몫’을 취하게 되었다(신 21:15-17). 야곱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법이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지 형님의 장자권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으며, 기회는 너무나 손쉽게 찾아왔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몹시 시장하였다. 그 때 야곱은 ‘붉은 팥죽을 끌이고 있었다.’ 야곱이 끓인 팥죽을 보고, 에서는 간절히 부탁한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30절). 여기에서 ‘나로 먹게 하라’는 ‘나에게 음식을 달라’는 뜻이 아니다. 이 동사는 짐승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장면을 묘사한다. 에서는 배고픈 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고 있다. 그는 ‘후루룩 삼키게 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팥죽’을 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원문에 따르면, ‘그 붉은 것, 그 붉은 것 좀’이라고 말한다. 그는 ‘팥죽’이라고 말할 겨를도 없는 사람처럼, ‘붉은 것, 붉은 것’을 찾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은 그를 ‘에돔’(붉은 것)이로 부른다.
에서가 말하자, 야곱도 말한다. 그는 먼저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고 제안한다. 야곱은 형 에서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그러자 에서는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장자권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며 즉시 팔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야곱은 곧 바로 팔지 않고, 법적인 구속력을 요구한다. 그는 ‘내게 맹세하라’고 말하며,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다”고 한다(33절). 야곱은 ‘에서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도록 하면서까지’ 장자권을 확보하는 데 안간 힘을 쏟는다. 에서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하지 않는 듯, 바로 맹세하며 팔아버린다. 에서 자신은 ‘붉은 자’인 데,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소중한 장자권을 법적으로 매도해 버린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 가정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고, 인물됨이었다. 그는 원시적 인간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신분의 특권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는 영적인 가치관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내레이터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34절)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리하여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가 생득적으로 가진 ‘장자권’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