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37장,요셉의 고난

호리홀리 2015. 4. 10. 13:46

  창세기 37장은 요셉의 등장과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며, 38장은 요셉이 무대에서 사라진 후에 유다가 등장하여 젊은 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플롯의 흐름을 보면 37장은,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고 마무리 된다(36절). 이어 39장은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로 시작하고 있다(1절). 여기에서 “요셉, 애굽,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 팔다와 사다”라는 핵심 용어들이 반복되며, 두 기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어 준다. 이리하여 39:1은 37장의 마지막 장면을 ‘플래쉬백’(flashback) 하고 있다. 그렇지만, 39:1에는 새로운 요소가 있다. 즉,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다”(yarad의 호팔과 히필형)가 두 번 반복되고 있으며, 이것은 앞 장에서 요셉의 형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37:25)를 반영해 준다. 이리하여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따라서 37-38 두 장은 가나안에서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있으며, 다양한 측면에서 장차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 주축을 이루게 될 “요셉”(지파)과 “유다”(지파)를 비교하며 대조해 주고 있다.  

        
1.  불화(37:2-11)

        창세기 37장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으며(1절), 야곱이 족장으로 있는 동안 장차 일어날 이야기의 전체적인 서론으로서 주인공 요셉과 주변인물인 그의 형제들이 등장시키고 있다.
        첫 단락을 이루는 서론 부(2-11절)에는 세 가지 짧은 이야기가 반복되며 발전되고 있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두 ‘요셉의 말’(4, 8, 11절)과 ‘형제들의 미움’(4, 8, 11절)이 반복되며,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에 처음 나오는 요셉의 ‘꿈’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발전되며, 형제들의 미움과 분노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또한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형제들의 반응 뿐 아니라, 부모의 반응까지 나오며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모든 요소들을 배태하고 있다 (10-11절). 그렇지만, 세 번째 이야기에서 요셉의 꿈은 형들의 부정적 반응과 아버지의 유보적인 반응은 대조를 이룬다. 이리하여 ‘요셉의 꿈’과 ‘형제들의 미움’은 ‘야곱의 약전’ 속에 나오는 거대 플롯(macroplot)의 바탕화면을 만들어 주고 있다.

        1.1. 고자질꾼 요셉과 야곱의 편애(2-4절)

        요셉을 소개하는 첫 장면은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시작되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일반적으로 번역되고 있다.
        “요셉이 십칠 세에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는 소년으로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2절).  
        여기에서 요셉은 ‘목자’로서 형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모두 동일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셉이 ‘소년’(na‘ar)이라는 말은 그가 형님들을 ‘도우고 있었다’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Fokkelman, ‘a helper’). 즉, 요셉은 가장 어린 아이로서 형들의 보호와 지도 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요셉은 형들과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은 집안 식구로서의 연대성을 이루고 있었는 데,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게 고자질 함으로써 형제간의 우애가 깨어지게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거의 절대적 존재였는데 서열에 있어서 끝에 있는 막내가 형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아버지에게 갖다 바치고 있는 장면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그들의 과실’ (혹은 ‘허물’[표준])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즉, 형들이 실제로 나쁜 짓을 한 것인지, 그들에 대한 평판이 나쁜 것이었는지, 아니면 요셉이 그들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것인지 본문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것은 형들의 심기를 몹시 거슬리게 하였을 것이다. 어쨌던 요셉은 ‘목자’(ro‘eh)인 데, ‘나쁜 말’(ra‘ah)을 아버지에게 전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가 참으로 장차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을는지, 독자에게 궁금증을 갖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으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요셉에게 ‘채색옷’까지 지어 주었다(3절). 형제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만들어준 옷 때문에 요셉을 미워하게 되며, 이 옷이 결국 화근이 되었다.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여기에서 ‘사랑하다’가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이유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랑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야곱이 요셉을 ‘여러 아들 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차원이 있다. 즉, 요셉에 대한 야곱의 전폭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은 요셉이 야곱에 ‘고자질한 형들의 잘못’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마 형들은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채색옷’은 단순한 편애의 상징이라기 보다, 요셉이 부당하게 얻은 ‘진리품’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요셉을 너무 미워하여, 말도 “곱게 하지 않았다”(4절). 이것을 직역하자면, “샬롬이 없었다”가 된다. 즉, 형제들 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가 깨어졌다. 이리하여 목자로서 요셉의 첫 경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자리로 승격되지만, 실제적으로 형제들 사이에는 ‘왕따’가 되어 비극적인 전망을 갖게 되었다.
        
        1.2. 꿈꾸는 소년 요셉과 심화되는 형제들의 미움(5-8절)

        이 단락은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로 수미일치를 이룬다(5, 8절).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된 것’은 요셉이 꾼 꿈 때문이었다. 요셉은 어느 날 꿈을 꾸고 그 꿈이 형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느끼고 그들에게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7절).
        “보십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보십시오, 내 단은 일어서고
        보십시오,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위의 번역을 보면, ‘보십시오’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즉, 요셉은 집요하게 그의 꿈에 대하여 말하며, 형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였다. 형들이 볼 때, 요셉의 꿈은 그의 ‘무의식적 야망’에 대한 반영이었으며, 결국 “왕이 되어, 그들을 다스리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자연적 순서를 거역하는 것으로 화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앞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목자’로서의 직업을 갖고 있었는 데, 요셉의 꿈에서는 모두가 ‘농부’로 나타나는 것이 의외이다. 창세기의 전체적인 맥락을 본다면, 앞으로 ‘양식’과 연관된 일이 벌어지며 형들이 요셉에게 굴복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1.3. 요셉의 두 번째 꿈과 관계의 결렬(9-11절)

        요셉은 또 한번 더 꿈을 꾼다. 두 번째 꿈은 첫 번째 보다 더욱 명료해진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십시오, 내가 또 꿈을 꾼즉 보십시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9절). 여기에서도 요셉은 ‘보십시오’를 두 번이나 외치면서, 형들로 하여금 그의 꿈에 주목하도록 요청한다. 그 형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이 꿈에서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는 새로운 요소이다(9절). 야곱은 이 꿈의 의미를 간파하였으며, 요셉에게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라고 일면 꾸짖지만(10절), 그러나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11절)고 한다. 즉, 야곱은 형식적으로는 요셉을 꾸짖지만, 요셉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갖고 있다. 요셉의 기사에서 꿈을 두 번 꾸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하셨음"을 말해주기 위함이다(41:32참조). 그러나, 형제들에게 극도의 미움을 받고 있는 요셉에게 그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한 긴장감이 있다. 정말 요셉이 ‘온 세계의 통치자’가 되며, ‘형제들은 그에게 굴복할 것인가?’

        2.  세겜과 도단으로 (12-17절)

        시간이 흘러 형들은 양들을 치기 위하여 먼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야곱은 목동들인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며,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걱정할 만한 일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그의 아들들은 여러 번 대형 사고를 쳤었다. 족장 야곱은 그가 애지중지하는 요셉에게 “네 형제들이 잘 있는지(샬롬), 양떼들이 잘 있는지(샬롬) 여부를 보고 와서 말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에서 ‘샬롬’이 두 번 강조되고 있다.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는 ‘샬롬’이 없으며, 오히려 ‘적대감’이 깊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야곱은 요셉을 보내었을까? 앞에서 요셉의 형제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가서 고자질하는 역할을 하였다(2절). 야곱은 요셉의 판단과 보고를 과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리하여 요셉은 형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러 간다(14절). 이 당시 야곱은 유다 남부의 ‘헤브론’에 있었으며, 형들은 가나안 중부 산악지역에 있는 세겜으로 갔었다. 그러나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이 때 ‘어떤 사람’이 등장하였다(15절). 그는 방황하고 있는 요셉을 보며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다. “네가 네가 무엇을 찾느냐”(혹은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에 요셉은 “형들을 찾습니다. 우리 형들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있는지, 나에게 일러 주시겠습니까?”(16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요셉은 ‘방황하고 있었으며’(15절), 형들을 ‘찾고 있었다’(16절). 두 개의 분사형 동사를 통하여, 요셉이 형들을 오랜 시간 동안 간절히 찾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셉은 형들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요셉에게 형들이 ‘도단으로 가자’고 서로 말하던 것을 엿들었고, 이것을 요셉에게 전하여 주었다. 만약 요셉이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15절), 형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며’(17절), 형제가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 이런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 단락에서 ‘만나다’와 ‘찾다’가 아이러니를 이루어준다. 달리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형제들 사이의 ‘만남’과 ‘찾음’은 좋은 것을 가져다 주지만, 여기에서는 치명적인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3.속임(18-36절)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가까이 오기 전에, 멀리서 보았다’(18절). 즉, 내레이터는 ‘거리감’을 가지고 이 장면을 처리하고 있다. 그들은 요셉을 보자 말자 옛날의 왜곡된 추억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한다(18절하). 또한 그들은 요셉의 꿈과 그의 운명을 연결시킨다. “그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나 보자.”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 꿈은 신의 계시 수단이었다. 요셉의 꿈에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매우 상징적인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은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형제들은 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장자였던 르우벤은 이들의 살해 계획에 대하여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는 수정제의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멀리에서 가까이 오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드디어 요셉은 도착하였으며, 그들은 요셉이 “도착하자 말자,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고 한다(23-24절).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집에서 가져온 여러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져 공포심에 싸여 울고 있을 때, 그들은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때, 국제무역을 하는 대상들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이야기들은 25절과 28절에 두 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25절).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8절). 이리하여 요셉은 그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이었던 은 이십 세겔에 팔려 간다(함무라비, 116, 214, 252).
        대상들의 움직임을 사이에 두고, 유다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유다는 르우벤의 제안을 제치고, 요셉을 팔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27-28절). 여기에서 ‘듣다’는 ‘동의하였다’는 뜻이다. 앞에서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서 썩게 하자’는 르우벤의 제안을 따랐지만, 유다의 수정 제의안을 받아들이고 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르우벤은 돌아와 ‘구덩이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29절). 여기에서 ‘구덩이’가 반복된다. ‘물이 없는 구덩이’는 원래 ‘죽음’을 상징하며, ‘구덩이에 있어야 할 요셉이 사라진 것’도 그의 ‘죽음’을 상징해 준다. 르우벤의 첫 제안은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그는 일단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놓고, 이후에 구원하고자 하였지만, 유다의 제안에 의하여 뒤집히고 있다. 즉, 르우벤은 형제들 사이에 무능한 자였지만, 유다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리하여 르우벤은 ‘그의 옷을 찢는다’(29절). 즉, 그는 요셉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곡을 하고 있다’. 몇 날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람이 옷을 찢을 것이다. 그는 바로 야곱 자신이었다. 이리하여 르우벤은 아버지의 심정에 가장 가까운 자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요셉과 르우벤과 야곱은 동일한 운명에 놓여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앞에서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 옷을 벗겼다’(23절). 그들은 이제 자신의 죄를 은폐하여야 했다. 그들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의 증표인 ‘채색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보낸다(31-32절). 야곱이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셉의 옷도 찢겨 있었을 것이다.
        이후 형제들의 행동은 신속하고 정확하였다. 그들은 요셉의 옷을 “취하였고, 수염소를 죽였고, 그 피에 옷을 적셨고, 아버지에게 보내었다”(31-32상). 그들은 요셉의 죽음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법적인 확인’을 하도록 요청한다.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알아보소서”(32절). 요셉은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일 뿐이다. 야곱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33절). 야곱이 볼 때,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끔직한 최후를 맞이 하였으며, 시신조차 수습할 길이 없었다. 야곱은 날벼락을 맞았으며,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한다(34-35절).
        이 때 요셉은 17세의 소년이었다(37:1). 즉,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지 17년이 되었다(30:22). 야곱은 요셉이 태어나자 말자, 하란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 라헬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고,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라헬의 목숨’을 바칠 뻔 하였다(31:32). 그 때에 야곱은 ‘알아보시고’(nakar)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개역, ‘발견되다’). 여기에서 ‘인식’의 문제는 야곱의 생애의 초기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의 축복을 빼앗을 때, 그의 아버지 이삭은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nakar) 축복하였더라”고 한다. 즉, 이 모든 사건들은 야곱의 옛 죄와 연관된다. 야곱은 결혼할 때에도 그와 함께 첫날 밤을 보낸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임을 알지 못하였다”(29:25).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인 옛 원죄의 대가가 그에게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애굽으로 간다’(28절). 이리하여, 형제의 허물을 보고하러 갔고(2절), 형제의 안부를 찾아 세겜으로 갔던 요셉(14절)이, 마지막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에 긴 세월 동안 그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41:46에 따르면, 요셉은 30세에 바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첫 풍년 7년이 지난 후에 8-9년째에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곱과 요셉은 서로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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