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 14:17-24,만남의 축복

호리홀리 2015. 4. 9. 13:07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만남은 우리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아브라함은 동방의 왕들과 전쟁을 한 후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난다. 그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으며, 가장 길게 묘사되며, 신약성경의 주요 본문에 등장한다(롬4, 갈3, 히11; 약2).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단 세 절에만 나온다. 그리고 나서 약 천년 후에 시편 110:4에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며 한번 더 등장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5-7장에서 그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 한 후에,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고 말한다. 즉,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보다 더 높은 인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멜기세덱은 우리가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노아 홍수 이후의 사람이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 노아의 후손은 셈의 계통을 통하여 아브라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직계 가족들 가운데에도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수24:14-15). 멜기세덱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데, 어떻게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그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사실 멜기세덱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라는 뜻으로서 그의 직분을 말해준다. 그는 또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한다. 즉, 그는 ‘영원한 제사장 왕’이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는 아니다. 그는 분명히 한 명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그 땅에서 의롭고 신실한 사람으로서 참된 종교를 지키는 자였다”(칼빈). 가나안 땅은 이미 부패한 사회가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난잡하고 도착적인 사회였다. 그들의 왕들은 불의한 왕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의의 왕 멜기세덱이 참 하나님을 섬기며 서 있다.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다. 살렘은 ‘평화’를 뜻한다. 그는 ‘전쟁의 왕들’ 사이에 살고 있는 ‘평화의 왕’이었다. 그가 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며, 우리의 모범이 된다.  그 당대의 왕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멜기세덱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언약을 맺으면서도, 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위대하였고, 그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 역시 ‘의와 평화’를 무가치 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앞에 값진 존재이다. 
                멜기세덱은 왕이다. 그가 엘람 왕을 물리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열국의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와서 축복해 준다. 우리 같으면 시샘하였을 수도 있다. 그의 명성이 아브라함 때문에 깎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아브라함의 승리에 대하여 기뻐하며 축복한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20절). 

        아브라함도 이 만남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그는 지금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기습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다. 그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군사들을 모아서 가나안의 여러 땅과 도시들을 차지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멜기세덱 앞에 자랑하지도 않았고, 깔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인정하며,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둘 다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 더욱 위대해진다. 우리도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자라간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외로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말할 수 있다(왕상19:10). 그러나 그들은 남은 자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축복하고 함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들은 높고 위대한 사람들이었지만, 만남을 통하여 가장 높은 하나님을 증거한다. 
        
멜기세덱의 반차

        히브리서 기자는 멜게세덱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그에 대하여 더 배워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고 한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1-12).
        한 장을 더 넘어가면,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6:20).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죄의 대속을 위하여 중보자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고, 누군가 중보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과 화해시켜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성경에서는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고, 먹였다. 제사장으로서 숭고한 제사장적 기도를 드렸고, 살인자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3). 여기에서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실제로 없다는 뜻인가?  여기의 강조점은 ‘족보가 없다’는 점에 있다. 즉, 그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바로 이점에 있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제사장으로서는 족보가 없다. 그는 아론의 후예인 레위 지파가 아니라, 왕통을 이은 유다 지파의 후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멜기세덱과 방불하다. 멜기세덱 역시 부모도, 족보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제사장 가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참된 중보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안정적인 것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도모하여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신다. 우리도 제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중보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살렘이냐 소돔이냐?(14:21-24)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에는 소돔의 왕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며, 소돔의 왕은 베라였다(창14:2). 살렘과 소돔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 그러나 빛과 어둠만큼 서로 다르다. 살렘은 ‘평화’이며, 소돔은 ‘지극히 악하고 부패한 곳’을 상징한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소돔은 죄악세상을 상징한다.
        본문에 보면, 소돔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나아가 “포로로 잡은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21절)고 말하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시험을 받았을 것이다. 단숨에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며, 너그러운 용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당대에는 사람까지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과 가나안 땅의 연합군의 용사들을 돌려준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만약에 이 재물을 취한다면, 그것은 법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소돔 왕이 “내가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에 이런 소문이 퍼져가게 된다면, 그가 증거하는 신앙은 매우 약화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손을 들고 맹세한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부, 명예, 성공 이 세상 어떤 것 보다 중요시하며, 가장 사소한 것조차 취하지 않겠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번에 보면,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으며,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답이 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알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한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그 사람이 되리라”(D.L. Moody).
        아브라함은 소돔 왕을 멀리하면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는 그가 취한 것을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 줄 수 있다는 복을 거절한다.
        앞에서 멜리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아브라함은 그의 용사들과 함께 먹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성만찬이 있음을 안다(요6:50). 떡은 생명의 상징이며,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기쁨의 원천이다.
        아브라함의 비밀 무기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는 굴복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주님은 전쟁의 날에 우리를 떡과 포도주로 채워주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매일 네 시간씩 하나님과 보내는데 어찌 지상의 왕을 두려워 하겠는가?”(존 녹스).
        오늘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그와 함께 전쟁을 한 용사들인, 아넬, 에스골, 마므레를 잘 대우해 주는 장면으로 마치고 있다.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고 말한다(창14:21-24).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싸웠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을 것이다. 그들도 아브라함처럼 포기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의 몫을 보장해 준다. 제자도는 자발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