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 49:7,언약적저주에서 축복으로

호리홀리 2015. 4. 9. 12:38

레위와 시므온(창 49:7)

 

 본문을 보면, 믿음의 족장 야곱이 임종 직전에 그의 12아들들을 불러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49:28). 여기에서 ‘각인의 분량대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복을 빌어주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때때로 넘치는 복을 받아 인생을 탕진하는 경우들이 있는 데, ‘알맞게 주었다’는 말씀이 흥미롭다.  잠언의 한 지혜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라고 기도하였다. 복도 벌도 알맞은 것이 좋아 보인다. 인간은 넘치는 복과 벌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
        야곱에게 12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레위와 시므온은 가장 심각한 사고뭉치였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소개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내려온 후, 세겜에 잠깐 살고 있을 때 그의 딸 디나가 동네 구경 갔다가 우연히 그 땅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세겜은 디나에게 첫눈에 반해서 바로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다’(창 32:2)고 한다. 대부분 남자들은 성폭행을 하고 나면 여자를 미워하는데(암논이 다말을 미워한 것 같이) 세겜은 “그 마음이 깊이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말로 위로하고” 또 아버지를 통해 정식으로 결혼을 요청하였다. 나쁜 놈이지만 착한 구석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디나의 오빠 중 시므온과 레위는 크게 분노하여 결혼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고통이 가장 심한 3일째 세겜 성을 습격하여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비롯한 모든 남자를 다 죽였다. 다른 형제들도 성 안에 있는 소, 양, 나귀, 그 모든 재물을 다 빼앗고, 아내들과 자녀들을 사로잡으며, 물건들을 노략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소위 ‘성전’(herem)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동생을 위한 복수가 개인적 보복에 거치지 않고, 집단적 살인 뿐 아니라 강도질까지 하게 되었다. 야곱은 크게 당황하고 두 아들을 꾸짖으며, 급히 세겜 지역을 떠나 도망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야곱이 임종할 때가 되어 자녀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자리에서 자식들의 인생과 인격에 근거하여 축복을 내린다(창49장).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 아들 르우벤에게는 축복을 주지 않았고, 아홉 아들은 축복하였다. 특히 유다에게는 메시야 약속을 주며, 요셉에게는 왕권을 약속한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축복이  아닌  언약적저주를 내린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폭력의) 기계, 즉, (죽이는) 기계이다. 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라. 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라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열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49:5-7)라는 이중적인 저주를 선언한다.
        아버지가 임종의 순간에도 그 두 아들들의 젊은 시절의 분노를 잊지 못하고, 치를 떨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유언을 한다. 그들이 “무슨 모의를 하던지 상관하지 말라”고 한다. 노염과 분기를 가진 사람은 축복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이웃을 음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여기에서 야곱의 예언 중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예언이 이루어질까?  야곱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수백 년 지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 때, 레위와 시므온의 후손들이 과연 흩어지게 될까?
        여호수아 13-21장을 보면, 임종의 순간에 내린 아버지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야곱이 축복한 유다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고 남과 북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또한 그의 예언대로 시므온과 레위는 온 이스라엘에 흩어지게 된다. 야곱의 예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므로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변화가 생긴다. 시므온은 유다 지파 가운데 흩어지지만, 레위는 온 이스라엘에 흩어진다. 시므온은 유다 지파의 더부살이로 독자적인 기업이 없지만, 레위는 자신의 땅과 성을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가진다. 시므온은 역사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레위는 빛을 본다. 시므온도 레위도 흩어지지만, 레위는 흩어지는 것 자체가 축복이 되어 이스라엘 가운데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지니게 된다. 왜 이런 운명의 차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두 조상이 같은 저주를 아버지에게 받았는데, 왜 한 지파는 복을 받은 것 같고, 다른 지파는 저주를 받았을까? 


        출애굽기 32장이 레위와 시므온 지파가 다른 길을 걷게 된 경위를 보여준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때 백성들은 모세가 늦게 내려오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다” 하며 제사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6절). 25절 이후에는 백성이 방자하게 된다. 아마 난잡한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것을 보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선 자는 내게로 나오라”고 말한다. 혹은 “누가 여호와의 편에 섰느냐? 내게로 오라.”   이 순간 레위 자손이 나온다. 모세가 이어서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죽이라” 하자 레위 사람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며 3천명이 죽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였다. 우리 눈에는 레위인의 행동이 잔인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행동이었다. 모든 사람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술 마시고 춤추며 방탕하게 놀고 있을 때 레위인은 이것이 심각하게 잘못된 일 인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섰다.
        레위인들은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하나님 편에 섰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때 온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말하며 그 앞에 경배하였다. 모세를 버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는 순간이었다.
        한 민족이나 가정, 그리고 개인이 어떤 신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선택보다 중요하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들의 신관에 달려있다. 종교는 온갖 다양한 문화가치의 중심을 이룬다. 이 때 레위인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 편에 확실히 섰다. 역사가 우상숭배로 넘어 가려는 순간에 레위인은 주님을 위해 칼을 뽑았다.
        이후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토착종교에 빠져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게 되자, “너희는 오늘날 누구를 섬길 것인지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리라”고 말하였다(수 24:15).
        이후에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냐? 바알이냐?”고 물었다. 이 둘 중에 우리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한국교회는 위기 가운데 있다.  세속화 되고, 물량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빛과 소금을 잃었다. 책임 보다는 축복을 너무 많이 좋아한다.
        온 세상이 금송아지를 신으로 세우고 제물을 드리고, 그 앞에서 춤추고 있을 때 레위인은 하나님 편에 섰다. 인간 관계를 초월해서 그 형제와 친구, 이웃을 죽였다. 오늘날에도 문자 그대로 칼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정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레위인이 하나님 편에 서려는 정신에 있다. 레위인은 이 때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 되었다
        말라기 2:4-6에는 하나님과 레위인이 맺은 언약이 나타난다.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 소개된다. 주님께서는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레위의 길을 따르는 자에게 생명과 평강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후로 레위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고 다닌다. 즉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다.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
        12형제 형제 가운데 레위의 후손들은 인생을 돌이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시므온 지파의 후예들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상에게 주어진 길을 그대로 따라 흘러가고 있다. 우리도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레위는 자신의 분노와 노여움 때문에 아버지의 저주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그 후손이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을 만들어 하나님게 온전한 헌신을 드리고 하나님 편에 확실히 섰다. 이제는 저주가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레위와 언약을 맺었다. 레위의 중보를 받는 자는 생명과 평강을 얻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배운다. 그러나 원래 받았던 저주, 즉 흩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흩어지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온 이스라엘에 흩어져 영적인 지도자로서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나 아담과 그 후손의 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받는다. 십자가에서 헌신을 드리며 하나님 편에 확실히 서셨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며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인류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맺고 생명과 평강을 얻는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스라엘에만 국한 되지 않고 온 인류에게 적용된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 참여하여 레위와 같이 흩어져야 한다. 세상 끝까지 흩어져서 제자를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