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 22:1-14,여호와이레

호리홀리 2015. 4. 9. 12:47

모리아 산에서 만난 하나님
창 22:1-14

아브라함은  특별한 시험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과 고통이 무엇이며, 이것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가. 이 시험을 통해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시험은 주님의 시험이며, 그의 아픔과 기쁨은 모두 주님의 것이기도 하다.

1. 시험문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절)

(1)  그의 아들 이삭을 바쳐야 한다.
(2) 모리아 땅 근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한 산에서 바쳐야 한다.
(3) 번제로 바쳐야 한다. 영적인 헌신이 아니라, 몸을 태워 바쳐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창세기 11:30을 보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사라의 불임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 복선을 이룬다. 그의 생애의 가장 깊은 갈등은 후손의 문제였다. 그의 평생 소원이 후손을 갖는 것이었다. 이제 친 아들을 가졌는데 하나님이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유명한 유대인 학자인 움베르트 카수토는 아브라함이 10개의 시험을 받았으며, 첫 시험인  “네 아비집을 떠나라”와 마지막 시험인 “네 아들을 바쳐라”가 수미일치를 이룬다고 보았다. 두 시험에서 “너는 가라”가 반복된다. 첫 시험에서는 “너의 땅을 떠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시험에서는 “그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자신이 살고 있던 땅을 떠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10번째 시험이 첫 시험 보다 훨씬 어렵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던졌던 자조적인 말을 들어보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17) 하나님도 이 시험이 어려운 줄 아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자, 독자, 이삭 이다.” 이삭은 4중적으로 명시된다. 아브라함은 피해갈 길이 없다.

2. 아브라함의  준비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만약 그가 마지막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이다(사 41:8).
1) 아브라함의 결심과 떠남(3절)

그는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간다 (3절).
그는 시험 장소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시험의 모든 도구들을 가지고 간다.
그는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간다.
그는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간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잘 치루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으며, 회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는 나무와 칼과 나귀를 준비한다.

2) 아브라함의 도착(4-5절)

(1)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절).

아브라함은 사흘길을 걸었다. 브엘세바에서 멀리 예루살렘 근처까지 아들 이삭과 함께 왔다. 험한 길이었고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걸어 목적지까지 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흘길’ 일까? 그것은  ‘충분히 생각하라’는 뜻이다. 충동적으로 맹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들을 바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라는 뜻이다. 단번에 바친다면, 이후에 후회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 도 있다.
우리는 사흘 길을 걷고 있는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받은 시험에 대해 충분히,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흘 길이면, 생각도 많이 바뀔 수 있었다. 그는 심사숙고하였다.  ‘단숨’에 풀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심화되었다. 시험의 성격도 분명해졌다.
        이 시험은 여러모로 어려움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1)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된 일다. 물론 이 시점에서  “율법”은 없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요구받은 아브라함이 할 일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성품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신제사를 요구하십니까?”
        (4) 인간의 천륜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2) 홀로서기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절)
        아브라함은 먼저 사환을 떼어 놓는다. 엘리야도 먼 훗날에 자신의 사환을 떼어 놓았다(왕상 19:3). 사환은 이제부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방해가 될 수 있다. 사환은 하나님의 시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홀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 그는  나귀 도 떼어 놓았다. 그는 이삭 대신에  ‘나귀’를 제물로 바칠 대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

3)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화(6-8절)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이삭은 자신이 처한 난해한 상황을 보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하며, 아브라함은 그의 속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의 대화는 아브라함의 생각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1) 상황묘사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6절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의 역할이 구분된다.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지고 가며,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간다.
        그러나 두 사함은 함께 걸어간다 “둘이 함께 가다”가 강력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음으로 잘 길렀다. 이삭도 믿음으로 잘 자랐다.

(2) 이삭의 질문 (7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드디어 침묵이 깨졌다. 그러나 침묵은 이삭이 깬다.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삭도 예리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준비 되었는 데 하나님께 번제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는가?

(3) 아브라함의 대답 (8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갔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의 침묵에 대해 새로운 빛을 준다. 그 동안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침묵에 대해 궁금했었다. 이제 처음으로 말한다. 이 대답을 통해 아브라함의 내면을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된다.

         “내 아들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보시리라’는 동사가 흥미롭다. 이삭은  “어린 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양을 보시고 있다”라고 대답한다(우리 말로는  ‘예비하신다’로 의역된다).
아브라함은 장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이 그 어린 양을 보고 계신다”는 점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  
하나님은 그 동안 보이지 않았고 숨어 계셨지만, 사실은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보고 계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식이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해결될 것을 믿고 있다.

3. 아브라함의 제사준비 (9-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아브라함은 주님이 지시하신 시험 장소에 정확하게 왔다.
        그는 단을 쌓았다.
나무도 벌려 놓았다.
        이삭을 결박하였다에서  “결박하다”는 동사는 제물을 바칠 때 사용된다. 이것은 제사드릴 짐승의 다리를 꼭꼭 묶어 제단 위에 단정하게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삭을 단 나무 위에 놓았다.”  
        이 때 이삭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는 아버지에게 완벽한 순종을 하고 있다. 그는 어떤 저항도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번제할 어린 양으로 바쳐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삭의 순종도 대단하다.

4. 야웨의 개입 (11-12절)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절,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2절의 “하나님을 경외한다와 8절의 “하나님이 보신다가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이 두 단어는 욥기 전체의 구조를 짜준다. 욥기 1:9에서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말씀은 욥기 42:5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와 짝을 이룬다.
        특히 이곳은 모리아 산이다. 모리아도  “본다”는 어근을 갖고 있다. “야웨가 보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후 이곳은 솔로몬의 성전 부지가 된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5. 여호와이레(13-14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절).  

이 후의 이야기는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표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