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 32:24-32,야곱이 이스라엘로

호리홀리 2015. 4. 9. 12:58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24-32)


야곱은 긴 세월 동안 밧단 아람에서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귀향 길은 가시밭이었다. 그가 모태에서부터 발목을 잡았던 형 에서는 장자권을 사기당하고, 아버지의 축복까지 빼앗긴 과거사에 대하여 수 십 년 동안 가슴에 품어온 원한을 이제 갚기 위하여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그를 치기 위하여  달려오고 있었다(창 32:3-6). 야곱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다음 날 아침에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그 밤을 얍복 강 나루터에서 보내고 있다. 바로 그날 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와 밤새도록 씨름하게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첫 출발을 하게 된다.
(1) 야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2) 야곱이 밤새도록 함께 씨름한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3) 야곱과 씨름한 자는 왜 왔는가? 그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는 왜 야곱과 씨름하기를 원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야곱에게서 무엇을 원하였는가?
(4) 야곱과 씨름한 자는 왜 날이 샐 즈음에 떠나려고 하였는가?
(5) 이 씨름에서 누가 이겼는가? 야곱인가, 야곱의 공격자인가?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말한다. 그는 ‘신적 존재’인 것 같은데, 사람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 환도뼈를 위골시켜야 만 했는가? 그러나 그는 28절에서 야곱에게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한다. 야곱이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장애자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겼다’고 하는가?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6) 이 장은 야곱의 승리로 끝나지만,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즉, 그의 승리는 장애를 포함한 승리이다. 이것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경계인 야곱 (22-23절)

이 본문에서 야곱은 ‘경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먼저 장소에 있어서 경계인이다. 야곱은 지금 얍복 강 나루터에 있다. 나루터는 강을 두고 두 지역이 나누어지는 경계지 이다. 또한 야곱은 이미 약속의 땅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곳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거룩한 땅’이라기 보다, 반쯤 ‘거룩한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거룩성’에 있어서 ‘반쪽’의 경계지에 자리잡고 있다.

야곱은 시간에 있어서도 ‘경계인’으로 나타난다. 그는 ‘밤’에 일어나 가족들을 옮기고 있으며,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고, ‘해가 뜨기 전 여명의 시간까지’ 씨름하고 있다. 즉, 야곱은 시간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는 완전한 밤도(layla, 23), 완전한 낮(shemesh)도 아닌, ‘새벽 미명의 시간’(shachar, 25, 27)에 홀로 고투하고 있다.  

야곱은 또한 생사의 ‘경계지’에 홀로 서 있다. 그는 이미 ‘마하나임’ 땅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32:1-2). 하나님의 군대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형 에서는 400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20년 동안 벼린 복수의 칼을 들고 그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달려오고 있다. 이 때 야곱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7절).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생사의 경계지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2. 야곱의 씨름(24-26절)

이 장에서 야곱 만 ‘경계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경계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야곱과 씨름하는 자는 분명히 ‘어떤 사람’으로 처음 나타났다(24절). 야곱은 밤 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야곱이 함부로 이름을 물을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29절). 이것은 ‘전형적인 장면’(type scene)으로서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음을 말해준다(창18-19; 삿6, 13장). 야곱 역시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30절).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경계적 존재로 비친 신적존재는 왜 왔는가? 그는 밤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고 있다. 모든 씨름은 이기기 위하여 한다.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말한다. 이 장면도 이해하기 참 어렵다. 그는 ‘하나님’인 것 같은데, 사람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켜야 했는가?’  어쨌든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면, 야곱은 더 이상 씨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야곱이 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28절에서 신적 존재는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고 말한다. 야곱이 이겼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렇지만,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 풀기 위하여, 야곱의 ‘사실 상의 패배’(25절)와 ‘승리 선포’(28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26절은 바로 이 막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상태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의 적수를 놓치지 않았다. 야곱은 원래 힘이 센 사람이었다 (창 29:10,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는 이제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죽으라고 매달리고 있다. 야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만약 지금 이 사람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에서에 의해 ‘몰살을 당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 하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12:3-4). 즉, 창세기 기자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호세아는 ‘울며 간구하였다’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의 눈물을 볼 수 없다. 만약 ‘울었다면’, 바로 환도뼈가 위골되고, 천사가 떠나겠다’고 선언한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새 이름(27-29절)

야곱의 눈물은 천사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 때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즉, 야곱은 천사와의 씨름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본 것이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깨어졌다. 그는 울며 하나님에게 은총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준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28절). 여기에 역설이 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에게 승복함으로써,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다. 그의 항복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승리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비로소, 야곱에게 ‘변화의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4. 변화된 야곱(33:1-2)

야곱의 변화는 그가 받은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의 어근(shara)은 ‘싸우다’ 혹은 ‘씨름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6) 이렇게 본다면,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가 된다(McKay 1987:4). 그 동안 야곱은 수 많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는 에서와 라반과의 싸움에서 늘 이겼다. 이제는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 (호12:3). 이 ‘씨름하다’는 동사는 얍복 (Jabbok) 강 뿐 아니라 야곱(Jacob)과 매우 유사한 발음을 갖고 있다  이런 언어의 유희는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이 고치신다’(Albright), 혹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Coote) 등으로 번역하지만, ‘다스리다’ (Noth)는 뜻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만약 이 동사를 기원형으로 본다면, ‘하나님이여 다스리십시오’ 혹은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Hamilton).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자’가 된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 야곱은 존재론적으로 여전히 ‘경계인’으로 살아 왔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과 축복을 계승한 자이지만, 그 동안 인격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늘 간교한 자였다. 그는 늘 ‘남의 발목을 잡는 야곱’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이스라엘’로 변화되고 있다.

야곱의 변화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로 고백되고 있다(30절). 이리하여 그는 비로소 ‘선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만 들었지만, 이제 하나님을 보는 신앙의 자리’까지 오른다. 물론 하나님을 ‘보는 대가’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 평생 ‘절뚝거리며’ 살 수 밖에 없었다(31절). 환도뼈—그것은 한 남자로서 생명의 근원이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지만, 육체적으로는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장애자가 되었다. 야곱은 육체적으로 한평생 ‘경계인’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은총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일에 그 정도의 댓가가 없을 수 없다.

야곱의 변화는 단지 영적인 차원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곧 에서와 참된 화해를 하게 된다. 에서와의 화해 장면이 바로 33:1-4절에 나타나고 있다. 32:22-23에서 야곱은 밤 중에 모든 식구들이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였다. 오직 야곱 만 건너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것은 특이한 모습이다. 모든 식구들이 다 죽어도, 자기 만 도망치겠다는 계산인지 모른다. 33:1-2절을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식구들은 그의 애정의 순서에 따라 분산해 놓았다. 에서가 쳐들어오는 맨 앞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두고,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두었다. 그리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었다”고 한다. 앞에 있는 식구들이 공격을 받으면, 뒤에 있는 식구들이 도망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야곱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씨름 이후에, 야곱은 “그들 앞으로 홀로 나아간다”(33:3).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죽어도 그가 먼저 죽으리라고 작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위골된 환도뼈를 붙들고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33:4). 이리하여, 평생 원수지간이 되었던 형제 사이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야곱이 얍복 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습은 이후에 모세에게 다시 재현되고 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본 후 새로운 사명감을 얻고, 미디안에서 얻은 식구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길가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출4:24-26). 그 때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의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고,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때, ‘주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셨다.’ 주님을 가까이 섬기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암3:2). 주님은 그를 가까이 하는 자들이 ‘신앙과 불신앙’, ‘성결과 부정’의 경계지에서 경계인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온전한 성결을 원하신다.

야곱과 모세 이후,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이게 된다. ‘새벽 미명’의 경계시간까지 고투하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를 세 번이나 동일하게 말한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그의 선택에 따라, 자신과 인류의 운명이 바꾸어질 것이다. 그는 야곱 보다 더 격렬하게 씨름하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우리는 어떻게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애씀에 있어서 이것 이상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국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자”가 되셨다(히12:2).9) 우리의 삶에도 이런 전환과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