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5:1-27)
나아만은 ①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며 ②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이며, ③ 이전에 그의 조국 “아람을 구원한 영웅”이며 ④ “큰 용사”이지만 ⑤ “문둥병자”였다(1절). 나아만에 대한 마지막 소개가 치명적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지만 한 가지 풀 수 없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비록 큰 용사이지만, 문둥병자”라는 나아만의 모습은 너무나 역설적이며,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여전히 아람(즉, 시리아) 군대 전체를 지휘하고 있는 총사령관이며 아람의 왕은 그를 가장 신임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나아만을 크게 쓰고 계신다. "주님께서 이전에 그로 하여금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말은 우리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열왕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들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주님은 아람의 정치적인 운명도 주장하시며(왕상 19:15), 이방나라도 이스라엘과 싸워 승리하게 하신다.
나아만이 아무리 “위대한 용사”였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불치병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이전에 아람 군대가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2절). 여기에 이 소녀의 나아만의 대조가 뚜렷이 제시되고 있다.
① 나아만은 “위대한 사람”이지만('ish gadol), 이 아이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na'ara qetanna). ② 나아만은 아람의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왕 앞에” 있지만(1절), 이 아이는 “나아만의 아내 앞에” 있다(2절). 여기에서 “~ 앞에 있다”는 “~를 섬긴다”는 뜻이다.
③ 이 아이는 바로 아람 군대가 습격하여 “포로로 잡아온 어린 여종”이며, 나아만은 바로 그를 잡아온 군인이다. 이 아이는 아람 군대의 장군인 나아만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가 그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3절). 본문에서 나아만은 자신의 병에 대해 어떤 느낌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절망 속에서 체념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에 있는 어린 소녀가 관심을 가지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아만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를 한 명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선지자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지만, 엘리사를 암시하고 있다. 엘리사는 이 멀리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온 어린 아이에게도 “참 선지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 아이는 나아만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는 고칠 수 있다”고 증거한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과 그의 아내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포로 소녀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그 아이는 이방 땅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나그네와 외국인과 종으로 살고 있었다. 고대 아람 나라에서 이 아이 보다 더 비천한 사회적 계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녀의 말 한 마디가, 온 천하를 움직이고 있다. 나아만은 아이의 말을 듣고 치료의 희망을 가지고 즉시 그의 왕에게 나아가 그 말을 전한다. 아람 왕은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이 떠나도록 “허락하며”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 보낸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왕복을 찢으며 분노하고 당황해 하며 전쟁을 준비하려고 한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결국 엘리사 선지자가 등장하게 되며 나아만과 엘리사가 만나게 된다.
나아만은 자신의 치료를 위해 엄청난 치료비와 선물을 준비하였다(5절). 그는 약 700 파운드의 은과 125 파운드의 금을 준비하였으며, 옷도 열 벌을 준비하였다. 그가 마련한 옷은 보통 옷들이 아니었으며 그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가 최고의 옷감을 사용하여 은과 금으로 장식하여 왕들과 귀족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소녀의 말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긴장을 가져 왔다. 아람 왕은 편지를 보낼 때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6절).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받고 읽자마자, 크게 분노하였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그의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문둥병을 고치라고 하는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7절). 이스라엘 왕의 고백은 일면 옳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아람 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그에게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은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 군사적 차원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람 왕이 나아만의 문둥병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트집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그에게 늘 가까이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15절)과 그의 선지자 엘리사를 모르고 있다. 그동안 엘리사는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사역”을 하고 있었는가?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엘리사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귀에는 엘리사에 대한 소문이 들리지 않았다.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도 아는 사실을 궁궐에 사는 왕 만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약하고 무능하다. 그는 겁에 질려 있다.
나아만은 속히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고 싶었겠지만, “의사와의 면담”은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그는 선물을 준비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었으며, 왕들이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계속하여 불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야기된 소식을 들었으며, 나아만을 그의 집으로 부른다. 그는 본 장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지만, 그 동안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엘리사의 냉정한 태도는 이스라엘 왕의 격앙된 분노와 절망적인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엘리사는 아람 왕의 도전을 받아들이며, 나아만을 “나에게로” 보내어 달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누가 참된 권위를 갖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나아만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찾아 왔지만, 엘리사는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도록 하겠다”고 한다(8절). 그는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을 대조하고 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에 참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하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섰다”(9절). 그러나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의 모습은 역설적이다. 그는 여전히 정복자의 모습으로 선지자의 집을 찾아오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부자인지, 강한지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아직도 자존심을 빳빳이 세우고, 그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중심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엘리사는 그의 집 앞에 와 있는 나아만을 거들떠 보지지도 않는다. 그는 그의 제자를 보내어,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 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는 말을 전하게 한다. 나아만에 대한 엘리사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며, 국제 관례에도 벗어나 있으며, 손님을 접대하는 예의도 아니다.
왜 엘리사는 이렇게도 나아만을 푸대접 하는가? 그는 아람의 군대장관을 직접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혹은 미워하고 있는가? 사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을 쳐서 승리를 많이 거둔 아람의 장군이다. 이것은 그의 집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소녀 종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아람은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으로 지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스라엘을 쳐들어 올 것이며 이스라엘을 약화시킬 것이다(왕하 6:24-29; 13:4-7).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아만 같은 장군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나아만과의 만남을 피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이유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야박한 태도에 대하여 분개한다. "나아만이 분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아와서 그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부르고 병든 부분 위에 손으로 안수하여 문둥병을 고쳐주려나 하였다"(11절). 여기에서 나아만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였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엘리사의 성대한 치료 의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영력이 고강한 이스라엘 선지자의 주술적인 치료 의식을 기대하였다. 엘리사가 “거룩한 음성”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아픈 곳을 어루 만질 때 불이 임하여 모든 병마가 타서 재가 되고 새 살이 돋아나는 기대를 하였다. 그는 충분한 돈을 가져왔고, 아람 왕의 편지도 가져 왔다. 어떤 점에서 나아만은 "자판기 은혜"를 기다렸다. 선지자는 나타나 돈을 받고 "그의 손을 아픈 곳에 두고 누르면, 바로 문둥병이 고쳐질 줄" 알았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건 주술에 하나님이 따라올 것을 원한다. 적절한 주술 형식으로 하나님을 강요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주권을 버리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나아만이 그의 고향에서 본 주술사보다 조금 나은 분이 아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을 직접 만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나아만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유형의 선지자가 아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분노하였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한가?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려고 하였다"(12절).
나아만은 요단 강에 일곱번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한번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요단 강물은 시리아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발의 세차고 맹렬하게 흐르는 차가운 물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12절). 시리아의 강들은 헬몬 산에서 녹은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단 강은 일년 내내 미지근하며 무기력하게 흐른다.
바로 이 점을 나아만의 시종들을 파악하였다(13절). 그들은 나아만 집에 있는 어린 소녀가 그 주모에게 말하는 것처럼, 나아만에게 지혜롭게 말한다. 그들의 논리는 선명하였다. “장군님,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일만 해야 합니까? 작은 일을 하면 안 됩니까? 큰 일도 할 수 있으면, 작은 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위대한 일을 꿈꾸고 있었다.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니 말이 되는가?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시시한 요법이 아닌가? 요단 강이 무엇인가? 더 크고 무서운 강이 없는가?” 만약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천 번 몸을 담그라든가" 혹은 "집으로 가서 돈을 두 배로 가져오라"고 말했다면 나아만에게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백일 기도나 사십일 금식 기도를 요구 받았다면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 정도 되어야 그의 자존심이 살았을 것이다. 이런 난제를 푼 후에, 나아만은 자기 친구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자신을 고쳤는지 한평생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랑을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다"(14절). 대부분의 군인들이 단순한 것처럼, 나아만은 그의 종들의 지혜로운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접고, 엘리사가 말한 대로 따라 하였다. 그 결과,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나아만의 실제적인 치료 기사는 너무나 간략해 보인다. 그 동안 수많은 제안과 편지와 대화와 의식들이 있었지만, 이제 한 마디로 끝난다. 네레이터는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핵심단어들이 언어의 유희를 만들고 있다.
(1) 먼저 나아만은 “요단 강”(yardan)으로 “내려갔다”(yarad). 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내려 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볼 수 있다. 앞에서 그는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하였다. 이제는 요단 강물 속에 자신을 완전히 잠글 정도로 내려 간다. 성경에서 물은 주로 죽음을 상징해준다(시 69:1-2). 나아만이 요단 강에 들어가는 것은 그의 옛 생명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상징해준다(14절).
(2) 나아만은 “어린 아이(na’ar qaton)가 되었다. 이것은 앞에 있는 "어린 계집아이"(na'ara qetanna)를 상기시켜 준다.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무흠과 순종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제 나아만도 “어린 아이가 되는 변화”를 경험한다. 즉, 그도 작은 소녀의 관점을 가졌다.
(3) 나아만의 살은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었다”(shub).이 후에 그는 엘리사에게 “되돌아” 온다(shub). 성경에서 “돌아오다”는 동사는 항상 영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즉,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주님께로 돌아온다.
(4)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료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왕과 장군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권력과 용기와 재물로서는 그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치료의 참된 길은 믿음에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있다.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치료 받은 나아만이 자신의 병고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레이터는 나아만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1) 나아만의 고백과 감사(15-16절)
나아만의 몸은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이제 그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돌아온다”(15절). 앞에서 소녀는 “내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아만은 소녀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까지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섰었다”(9절). 그러나 엘리사의 말을 듣고 분노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부하들의 말을 듣고 치료를 받은 후, 이제 다시 하나님의 사람 앞에 다시 선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개선장군”처럼 오만하게 서지 않는다. 나아만의 변화된 태도가 몇 가지로 나타난다.
(1) 이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나아만이 모든 종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돌아 와서 그 앞에 서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압니다."고 말한다(15절). 그는 요단 강 안에서 참된 신앙의 체험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며, 중요한 신앙고백을 한다. 그의 고백은 앞에 있는 계집 종의 고백과 이어지며 더 크게 멀리 나아간다. 그는 주님의 주권을 만방에 전한다.
(2) 이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적인 관점에서 엘리사와 깊은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의 세속적인 권위가 엘리사의 영적인 권위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그가 엘리사를 섬기는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3)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이 예물을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15절). 그는 아람에서 많은 예물들을 가져왔다. 그가 받은 치료에 감사하며, 선지자에게 선물을 드리고자 한다. 그러나 누가 믿겠는가? 엘리사는 나아만의 그 많은 선물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는 “나의 섬기는 야웨”라는 고백을 하면서, 맹세하며 거부하고 있다. 엘리사는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기는 종이다. 나아만은 그가 고쳐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고치셨다. 나아만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엡 2:8-9).
2) 나아만의 감사(17-19절)
나아만은 엘리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사를 전하며, 마음 속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1) 이전에 나아만은 요단 강물을 경멸하였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에 있는 흙이라도 집으로 가져가길 원한다.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십시오"(17절).
(2) 그는 앞에서 “이스라엘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다(15절). 이제는 “다른 신에게는 제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17절). 그는 앞으로 오직 주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릴 것이다.
(3) 그러나 아람 왕은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18절). 왜냐하면, “왕이 내 손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의 “손”은 신체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것이다. 나아만은 왕의 “오른 팔”이었다(왕하7:2, 17). 나아만은 참된 신앙을 찾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역할 속에서 종교적인 갈등이 생길 때,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길 미리 구한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며 짤막하게 말한다(19절). 엘리사의 말은 허락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지만, 나아만의 믿음이 진실함을 인정해 준다.
나아만의 치료 이야기가 이제 끝난 줄 알았다. 19절에서 엘리사는 나아만과의 최종적인 인사까지 나누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19절하반절에서,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갔는데…”라는 말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어서 바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등장한다. 왜 게하시가 갑자기 등장하는가? 그는 앞 장 수넴 여인의 이야기에서는 핵심적인 조연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아만 이야기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게하시가 지금 등장한 것은, 그가 그 동안 나아만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다 보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씀을 전한 것도 게하시였을 것 같다. 즉, 게하시는 나아만의 치료 과정을 전부 보았으며, 엘리사가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보았다.
여기에서 게하시는 나아만의 어린 소녀 아이와 대조된다. 나아만의 어린 소녀 종(na’ara)은 그의 주인이 병 낫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주모에게 간절히 말하였지만, 여기에서 엘리사의 사환(na’ar) 게하시는 자신의 주인을 속이려고 한다. ① 원문에서는 둘 다 “아이”로 나타나며, ② 둘 다 “우리 주인”(3절)과 “내 주인”(20절)이라고 부른다. ③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가 나아만 장군에게 치료의 길을 열어주었는 데,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장 가까운 게하시가 선지자의 뜻을 좌절시키고 있다. ④ 나아만은 그의 주인이 “그의 손”을 의지한다고 말했다(18절). 그러나 게하시는 “그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민다(20절).
또한 게하시는 그의 주인인 엘리사와도 크게 대조된다. 앞에서 나아만은 “은, 금, 의복”을 가져왔다고 말했다(5절). 그리고 엘리사는 그 선물을 모두 거부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16절). 이제 게하시는 스스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20절). 그는 엘리사의 맹세 보다 더 강하게 맹세한다. 엘리사는 ‘만약에’라고 말했지만(16절), 게하시는 ‘진실로 만일에’(ki ‘im)라고 말한다. 즉, 게하시는 “나는 꼭 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강열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볼 때, 엘리사는 잘못 생각하였다. 그리고 게하시는 단숨에 달려간다(완료형).
게하시가 달려오자, 나아만은 수레를 멈추고 “별 일이 없느냐?(평안이냐)”고 묻는다(21절). 이것은 앞 장에서 게하시가 수넴 여인의 위기 상황 가운데 수넴 여인에게 던진 질문이었다(4:26). 게하시는 엘리사의 이름으로 말하고, 또한 그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한다(22절). 게하시는 선생도 팔고, 동료도 판다.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은”과 “옷”을 구하였다(22, 23절). 아마 “금”을 구할 만한 배짱은 없었던 것 같다.
나아만은 게하시가 구하는 것을 모두 주며 더 주려고 “강권한다”(23절). 즉 “억지로 넣어준다”. 그는 게하시가 요구한 것 보다 은을 두 배나 더 많이 준다. 나아만은 너무나 너그럽다. 게하시가 받은 선물은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두 사람이 겨우 지고 갈” 정도였다(23절). 게하시는 언덕에 올라간 후에 받아서, 자신의 집에 감추었다(24절).
네레이터는 여기에서 게하시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고, 그의 행동을 단숨에 그려내었다.
이제 게하시는 “엘리사 앞에 선다”(25절). 나아만이 “아람 왕 앞에 서고”(1절), “엘리사 앞에 선 것” 같이, 게하시도 그의 주인 앞에 선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대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엘리사는 그에게 “어디에 갔다 오는가?”라고 묻자,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는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보태어 가고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가 선물을 “취하였음을 알았다”. 어린 소녀는 엘리사가 참 선지자임을 알았는 데, 게하시는 엘리사 가까이 있으면서도 몰랐다. 그는 엘리사가 그의 범죄를 느꼈음을 모르고 있다(26절). 엘리사는 “나아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었다”고 말한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지금은 그런 선물을 받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26절). 지금은 “돈을 받고 호강할 역사적 시점”이 아니다. 지금 아합의 집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으며, 이스라엘은 위기 가운데 있다. 바로 다음 장에서 아람이 쳐들어와, 사마리아까지 에워싼다. 게하시는 물질 대신에 더 깊은 “영감”을 추구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물질주의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은과 옷, 감람원과 포도원, 양과 소, 남종과 여종에게 더 관심이 깊었다.
게하시는 그가 구한 부 대신에, 나아만에게 붙었던 문둥병을 물려 받았다(1, 27절). 하나님께서 게하시를 이렇게 심하게 치신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은혜의 사역을 해지하고 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돈으로 환산하려고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 분이시다. 그의 은혜는 값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처럼 원수에게도 자비로우신 분이시다(마5:43-44; 눅6:27, 35). 1절에서 이미 주님은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주님께서 원수의 나라에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왕하3:27). 그러나 주님은 어린 소녀 한 명을 통하여, 나아만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나아만은 이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는 “오직 주님께만 번제를 드리겠다”고 결심하였다(17절). 그런데 게하시가 모든 판을 다 깨고 있다. 이리하여,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로 넘어가며 두 사람의 운명은 역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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