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 4:8-37,메시아 예표사역2

호리홀리 2015. 4. 13. 12:29

 
        수넴 여인의 사랑과 헌신(8-10절)


        이 이야기는 “여인과 그 아들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앞 이야기의 중심 주제와  일치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사회적 배경은 매우 다르다. 앞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는 귀부인이 등장한다. 앞의 여인은 가난했으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큰 부자였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 뿐 아니라, 부자도 돌보신다.
        이 장의 주인공인 수넴 여인은 "한 귀한 여인"으로 소개된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 보기 힘들며, "한 부유한 여인"(공동, 표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에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위대한 여인"으로 불려지는 여성은 희소하다. 이 여인은 그녀의 사회에서 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여인은 엘리사가 수넴을 통과할 때마다 "엘리사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다"(개역)고 한다. 여기에서 "간권하다"는 "간청하다”는 뜻이지만 직역하자면, "그녀가 이긴 것이다"(chaqaq-bo). 아마 엘리사는 여인의 간곡한 요청을 여러 번 사양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엘리사를 감동시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녀의 손님 대접이 너무나 정성스러웠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고 한다.
        엘리사가 수넴 지역을 좀 더 빈번하게 다니자, 이 여인은 선지자에게 보다 안정된 쉼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자고 말한다. 먼저 그녀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엘리사를 보통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녀는 당대의 영적 지도자로서 엘리사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그녀는 엘리사를 위해 "담 위에 작은 방"을 짓자고 남편에게 제안한다. 그 방은 아주 전망이 좋았다. 그녀는 견고한 담 위에 아담한 방이 만들고, 엘리사를 위해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준비한다." 사치품은 아니었겠지만, 선지자가 생활하기에 충분한 좋은 시설이었다. 이런 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녀의 경건과 헌신과 사랑을 잘 드러내어 준다. 

         엘리사의 보답: 아들의 탄생(12-17절)

        엘리사는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의 봉사를 보면서 어떻게 보답할 수 있는지 묻는다. 엘리사는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분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했다. 그는 게하시를 통해 수넴 여인을 먼저 부르고 말한다.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13절 상). 이 단어는 "떨리다"(charad)라는 어근을 가진다. 여기에서는 "신중하다, 주의하다"는 뜻이다. "많은 수고를 하였다"는 뜻이다(‘You have taken all this toruble for us,’ RSV). 여인은 정성껏, 떨리는 심정으로 선지자를 대접하였다.
        그 당시 엘리사는 선지자로서 어떤 애로 사항도 풀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왕에게도, 국방부 장관에게도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나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고 대답한다(13절 하). 그녀는 선지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내 백성들 중 집"을 가졌다고 대답한다(4:13). 집을 가진 것은 그 당시에도 상당한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뜻해 준다. 그녀는 채무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앞 장의 여인처럼 가난 속에 찌들지 않았고, 종도 가축도 많았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심각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상속권이 남자 계통으로 흘러, 남자 아이가 가족 이름을 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에게 상속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심각하게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이다(창 11:30 참조).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늙었다(왕하 4:14). 따라서 그는 자신의 상속자를 간절히 원했지만 아이를 낳을 능력은 없어 보인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통하여 이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14절), 다시 한번 더 부른다(15절). 15절은 정확하게 12절을 반복한 것이다. 저자는 반복을 통해 적절한 상급을 찾는 데 긴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준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을 것입니다"고 말한다(16절). 그 때 여인은 "아닙니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십시오"라며 대답한다(16절). 이 말은 이후 이야기의 복선이 된다. 그러나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가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다"(17절). 17절은 반복을 통해 엘리사의 말씀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음을 말해준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종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정성을 다하여 엘리사를 보살피기 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기대하지도 않은 큰 상급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도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녀 앞에 사라도 이런 경험을 하였고, 그녀 뒤에는 엘리사벳이 이런 체험을 하였다(창 11:30; 눅 1:7, 36), 하나님은 약속된 아들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의 생애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예수께서도 후에 같은 원리를 말씀하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마 10:40-41). 

         아들의 죽음(18-25상)

        이 이야기에서 세 번째 "하루"가 등장한다(18절; 8, 11절). 이 새로운 하루를 통해 이야기는 전환을 마련한다. 이전에 엘리야를 돌본 이방 과부처럼(왕상 17), 이 여인의 믿음도 표현되고(4:8-17), 시험 받고(4:18-28), 확증 된다(4:29-37). 그녀는 아들을 가지는 기쁨을 가졌으나, 아들이 일사병으로 죽음으로써, 깊은 실망과 혼란에 빠진다.
        약속의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 "내 머리야, 내 머리야"는 아이가 일사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죽음은 심각한 긴장을 가져온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며, 그녀의 헌신에 대한 선지자의 보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선물이 유산된 것 같은 위기에 처했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무릎에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21절). 이런 심각한 위기 상황 앞에서 수넴 여인은 냉정하게 일을 신속하게 처리한다. 17절은 1년의 기간을 다루지만, 21-25절까지는 몇 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먼저 그녀는 아이를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는다"(21절). 마치 죽음을 밀폐시키고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남편에게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라며 부탁한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닌데,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려고 합니까?"(23절)라며 묻는다.
이 때 여인은 "평안입니다"라고 간명하게 대답한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일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남편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넴 여인은 이렇게 어려운 위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아플 때, 아무런 주저 없이 신속하고 확고하게 선지자를 찾으러 간다.  

        수넴 여인의 항변(25하-30절)

        그녀는 "드디어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갔다"(25절). 그녀는 약 25 킬로미터의 길을 단숨에 달려간다. 게하시가 먼저 그녀를 영접하며 먼저 와서 엘리사의 문안을 전한다. "당신은  평안하십니까? 남편도 평안합니까? 아이도 평안합니까?”라는 인사를 전하자, 여인은 "모두 평안합니다"라고 침착하게 대답한다. 선지자를 만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 그녀의 남편과 게하시에게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엘리사 앞으로 나아가자 말자, 여인의 모습은 돌변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꼭 껴안았다”(27절). 이것은 평소 수넴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에 엘리사를 만날 때에는 늘 멀리에서 서 있었다(12, 15절).

        12절, “그 여인이 엘리사 앞에 서있었다”
        15절, “그 여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엘리사 선지자에게 뛰어들며, “그 발을 꼭 붙들었다”(chazaq). 그 어느 누구도 그녀는 떼어 놓을 수 없다는 태도로 하나님의 사람을 붙든다. 가까이 있던 게하시는 놀라서, “가까이 와서 그녀를 물리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지만, 주님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구나”라고 말한다.
        수넴 여인의 간청은 너무나 강열하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였습니까? 나를 속이지 마십시오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28절).
그녀는 한 번도 엘리사에게 아들을 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없는 상황은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알려준 것이며, 엘리사가 자청하여 먼저 그녀에게 약속한 것이었다. 그 때에도, 여인은 엘리사에게 “거짓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분명히 말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심리적, 사회적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린다. 그녀는 아이의 생명과 죽음을 엘리사의 발 앞에 문자 그대로 맡긴다. 

        게하시의 실패와 엘리사의 성공(31-35)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는 바로 행동을 취한다. 그는 그의 수석 부목인 게하시에게 긴급한 지시를 한다. “허리를 단단히 묶고, 내 지팡이를 들고 가거라.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인사를 받더라도 그에게 대답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거든 내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 위에 놓아라”(29절). 여기의 어투는 심각하며, 마치 왕의 명을 전하는 것과 같다. 왕의 사자가 왕명을 이루기 위하여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엘리사는 특별히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전해주며, 그것을 소년의 얼굴에 두라고 명한다. 엘리사가 왜 이런 행동을 하게 하였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아마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모세 지팡이로 생각한 듯하다(출 4:2, 4, 14; 민 20:8-11). 선지자의 지팡이는 그의 신분과 직무를 상징한다. 혹은 이 지팡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지팡이를 상징할 수도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의 지팡이가 우리와 함께 한다(시 23:4).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간접적인 지원을 거부한다. “주님의 살아 계심과 선생님의 목숨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30절).        여기에 나타난 수넴 여인의 맹세는 이전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임종 직전에 맹세했던 것과 똑 같은 형식이다(왕하 2:2). 엘리사는 여인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엘리사는 자신의 고집을 이 여인에게서 발견하고 속으로 웃었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게하시가 그들 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었고 듣는 모양도 없었다. 그는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이하면서, ‘아이가 깨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한다(31절). 선지자의 지팡이를 죽은 아이 위에 두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였던 간에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이는 정말 죽어 있었고 깨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게하시의 대리 사역은 실패하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동안 게하시는 엘리사와 매우 가까이에서, 긴밀하게 지내었다. 앞에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대접을 받을 때, 게하시도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13절, ‘우리를 위하여’). 게하시도 여인의 형편에 대해 “아들이 없으며, 남편도 늙었다”는 목회적 상황도 잘 분석해 내었으며 그녀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엘리사를 통하여 문제를 풀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게하시는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였지만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앞 이야기에서는 엘리사 선지자는 현장에 없었지만 역사가 일어났었다(4:1-7). 이번에는 왠 일인가? 우리는 잘 모르지만, 게하시는 뭔가 부족하였든 것 같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엄중하게 일을 집행할 것을 명했는데(29절), 게하시가 신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은 게하시에게 명백한 잘못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하시에게는 뭔가 부족한 것이 늘 따라 다닌다. 수넴 여인도 게하시에게는 아들이 죽은 사건의 전모를 말해주지도 않았다.
엘리사 선지자는 현장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왕하 4:33; 게하시가 앞에 와서 아들을 위하여, 아들을 부둥켜 안고 기도하였을까?).
그 동안 엘리사는 이 아이를 본 적도 없다. 죽어서야 비로소 만났다. 엘리사는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포개어 엎드렸다”(gahar). 엘리사는 아주 어려운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는 온 몸을 구부리며, 아이 위에 “엎드린다.” 이것은 이전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던 동작이었다(왕상 18:42). 최종적으로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에게 한 것처럼(왕상 17:21), 엘리사는 자기 자신을 뻗어 소년에게 모든 부분에서 밀착 시킨다(왕하 4:34-35). 그는 아이의 입에 자신의 입을, 그의 눈에 자신의 눈을,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덮는다. 선지자는 죽음에 있어서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엘리사도 죽은 자와 접촉하며, 레위기의 의식법을 깨뜨리고 있다(민 19:11). 아이는 살이 서서히 따뜻해지며 살아난다. 엘리사의 이 모습은 마치 창세기 2:7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은 것 같은 모습이다. 선지자의 숨결이 죽은 소년의 호홉 속으로 들어가자, 아이가 살아난다. 

       

        엘리사와 수넴 여인의 이야기는 앞에 있는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 이야기와 여러모로 대조된다. 사렙다 과부는 이방인이었으며, 수넴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사렙다 과부에게는 엘리야가 스스로 찾아 왔지만, 수넴 여인은 자발적으로 엘리사를 돌본다. 사렙다 과부는 가난했으나, 수넴 여인은 부자였다. 엘리야는 과부 집의 다락방에 기거했으나, 엘리사는 담 위의 전망 좋은 방에서 편안히 쉰다. 사렙다 과부에게는 아들이 이미 있었지만, 수넴 여인에게는 "수태 고지"가 주어진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둘 다 아들을 살리지만, 엘리사는 더욱 친밀하게 아들과 동일시 한다.
        두 여인 사이에 유사성도 있다. 두 여인은 모두 선지자에게 음식과 쉴 곳을 드리며, 선지자와 말을 주고 받으며,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한다. 이리하여 두 여인은 모두 선지자의 도움을 받는다. 두 여인은 모두 아들을 잃고 선지자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죄"를 깨달으나(왕상 17:18), 수넴 여인은 전혀 죄의식이 없다. 오히려 구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고 빼앗는다고 분노한다. 두 여인은 모두 선지자들이 자기 자식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한다. 두 여인은 모두 자식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한다.
        본 장에 있는 수넴 여인은 여러모로 놀랍다. 그녀는 평소 선지자에 대해 적절하게 행동하며(15, 27, 37절), 적절하게 말한다(16절). 그녀는 침묵의 가치도 알고 있다(23, 26절).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을 때 확신에 넘치게 그리고 열렬하게 말한다(28절).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오직 엘리사 선지자 만을 찾으려고 한다. "그녀는 구약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Nelson 173).
        수넴 여인은 아들의 죽음으로 시련을 당하였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믿음과 지극한 사랑에 대한 선지자의 보답이었다. 그녀가 먼저 구한 것도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기만"이며, "선지자의 기만"처럼 보였다(28절). 그러나 이 여인은 절망하지 않았다. 아들을 선지자의 침대에 두고 선지자를 찾아간다. 수십 리를 나귀타고 간다. 게하시가 가는 길을 지체 시키지만 그녀는 엘리사의 발을 붙잡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믿음의 행동이었다. 엘리사는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한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부름 받은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보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한다. 꼭 선지자가 동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스라엘에 이런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하심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을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엡 3:20). 하나님은 우리를 잘못 이끌거나 속이지 않는다(왕하 4:16, 28).
        우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린 엘리사의 사랑과 능력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막 5:35-43),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렸다(눅 7: 11-17). 수넴은 이스르엘 골짜기 끝에 있는 모레의 언덕 남서쪽 비탈에 있다.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인 성이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예수는 그 동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다. 이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였다"(눅 7:16).
        예수께서는 또한 나사로를 살린다. 마리아는 예수에게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집에 빨리 가지 않고 지체한다(요 11:6). 후에 그는 마리아의 집에 도착한 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한다(요 11:25-26). 나사로의 무덤에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요 11:40).
        모든 다른 기적들처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에게 기적을 행한 것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죽음은 궁극적인 절망이다. 부활은 최고의 절망을 가장 급진적으로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없거나 일으키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생명의 선물들(깨끗한 물, 자유, 음식)은 오직 일시적인 것이며 제한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기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활을 어떻게 이루실지 제시한다. 마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과 동일시 되어 그를 살린 것 같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와 동일시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인간성과 죽음의 운명과 일치시키셨다(빌 2:5-11; 히 2:`14-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부활하며,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골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