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출애굽기(언약적해석)

출애굽기2:1~10,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위기

호리홀리 2015. 4. 13. 11:06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위기

 

 내레이터는 막연하게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막연한 서술에 근거해서, 이 내레이터가 모세의 부모가 될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출 6:14-25나 민 26:59-60 이하는 내레이터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그는 글의 흐름상 이 대목에서 두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 뿐이다.

내레이터는 지금 줌인을 통해 클로즈업(close-up)을 하고 있는 중이다. 1장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비춰주다가 이 두 사람에 이르러서 서서히 그들을 클로즈업해가는 중이다. 이런 대목에서 이제야 겨우 카메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상세한 신상명세가 제공된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는가? 내레이터는 단지 이 두 사람이 레위인이라는 것 정도만 언급함으로써 글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고난 속에서 핀 아이에 대해서 내레이터는 “준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의 어머니인 레위 여자는 그 “준수함으로 보고” 아이를 물에 던지는 대신 가능한 한 데리고 있고 싶었던 듯 하다. “준수함을 보다”라는 원문을 직역하면 “보기에 좋았다”가 된다. 이 문구는 창세기 1 장에 7번 나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창 1:4,10,12,18,21,25,31) (Sarna 1986: 28).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니 만드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 이 아이 역시 “보기에 좋았다”. 앞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번성(출 1:7)이 창조 명령의 성취이며, 바로의 억압정책은 반창조 행위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보기에 좋은” 아이의 탄생은 바로를 저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다. 이 점을 표시하기 위해 출애굽기의 내레이터는 일부러 창조 모티프를 이끌어 온다.
        그러나 이 창조의 회복을 가져 올 아기 영웅은 아직 너무나도 연약하고, 상황은 너무도 암울하다. 영웅은 아직 어머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기 일뿐이다. 1-2장의 모든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고상한 어머니는  “보기에 좋은” 이 아이의 운명을 최대한 연장시키려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의 능력은 어둔 밤의 등불 심지처럼 후딱 타버린다. 아이를 숨기는 어머니의 능력은 삼 개월만에 한계에 부딪힌다.
        어머니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이의 운명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띄워 보내기로 한다. 이 험악한 상황 속에서는 어머니의 품보다도 갈대상자 속이 더 생존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쩌면 이 어머니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는 길이라고 신앙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일부 구약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수 24:14; 겔 20:7-8) (Greenberg: 52). 단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담길 갈대상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역청과 나무 진을 발라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그 속에 넣는다. 이런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마음은 “두다”라는 단어로 표시된다(2:3). 이 단어는 남자아이를 하수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과 대비된다(1:22).
        이 어머니가 만든 갈대상자는 히브리어로는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방주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단어가 오직 이 두 본문에만 나온다는 점은 둘 사이의 연결을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우선 홍수 이야기에 창조 모티프가 가득하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이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창조와 연결시킨다. 바로의 인종말살정책이 반창조적이라면 모세의 탄생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반격이다.
방주는 항해에 필요한 키나 키잡이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방주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갈대 상자와 아이의 운명 역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독자가 그 누이처럼 이 아이의 운명에 대해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아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다른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의 딸이 아이가 있는 바로 그 강가로 목욕하러 온 것이다. 본문의 정밀함과 세밀함은 이 바로의 딸의 “시녀들”과 “몸종”을 구분하는 데 있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양자를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원문은 공주와 친밀도가 덜할 것으로 여겨지는 “시녀들”과 친밀도가 높으리라고 여겨지는 “몸종”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시녀들”은 그냥 “하숫가를 거닐고”, 오직 “몸종”만 바로의 딸을 몸소 시중하기 위해 하수로 들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그 때문에 바로의 딸이 이 “몸종”으로 하여금 아이를 건져올리게 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 점은 아이의 목숨을 위하여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와 관계가 더 깊은 “몸종”과 달리 “시녀들”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두 하수에 던져 죽이라는 바로의 추상 같은 명령을 어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는 순간 바로의 딸은 아이가 히브리 아이임을 한 눈에 알아 본다(2:6). 이와 동시에 아이의 누이가 “히브리 유모”를 데려다 주길 원하느냐고 묻는다. 내레이터는 바로의 딸이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인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광경을 보고 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멀리 있던 누이가 어떻게 이 순간 바로의 딸 앞에 와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히브리인인 그녀가 어떻게 시녀들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바로의 딸이 말하고, 바로 이어서 누이가 말한다. 확실한 것은 바로의 딸이 아이의 운명과 관련하여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거나 고민할 틈 자체를 주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바로의 딸이 조금 더 고민해보고 자기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을지 안 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흐름을 볼 때 바로의 딸이 자비로움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아이의 누이가 제시한 “히브리 유모”에 대한 안을 받아들인다. 창 43:32-34를 볼 때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히브리 남자 아이들에 대하여 자기 아버지가 내린 칙령도 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 아기를 애굽인 유모에게 맡기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 많았다. 바로의 딸은 히브리 아이를 히브리 유모에게 맡김으로써 이러한 위험성들을 피해 갔다.
        이러한 그녀의 결정을 통해서 아이의 친모는 아이를 돌려 받았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갈대상자에 고이 넣어 떠나보낸 아이가 품으로 돌아왔다. 이 것은 무척 극적이다.
그러나 아이를 친어머니에게 맡기면서 하는 바로의 딸의 말은 더욱 극적이다. 그녀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서 바로의 악한 책략은 통렬하게 무너진다. 히브리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물에 던져 죽이라고 했던 명령이 오히려 이 히브리 남자 아이가 살아남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바로는 자기 재산으로 그 아이를 키우기까지 한다.
전문용어로 이 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쳐 놓은 올무에 스스로 걸려 드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바로는 자기 가슴에 꽂힐 비수를 스스로 갈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성경에서 극적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예로 꼽는 경우가 하만이다(에 5:9-7:10). 그는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기 위해서 나무 기둥을 세우지만 오히려 자기가 그 나무 기둥에 달리고 말았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점 때문에 에스더서의 정경성은 성경해석사에서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 에스더서는 드러난 왕(아하수에로)과 숨어 있는 왕(하나님) 중 누가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인가 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숨은 왕이 하만의 악한 의도를 깨뜨리기 위해 하셔야 했던 일은 드러난 왕이 하룻밤 잠이 오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하자 역대 일기를 읽는다(6:1). 그 간단한 조치만으로 모든 것은 숨은 왕의 의도대로 흘러 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문에서도 출애굽기 1-2장의 숨은 왕이 드러난 왕 바로의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하신 일은 모세가 버려진 그 시각에 바로의 딸이 나일 강가로 목욕하러 나오게 만든 것 뿐이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는 우연의 일치로 보이는 그 간단한 일을 조율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바로의 책략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만홀히 여길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한 작은 우연이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일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아이가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된 것을 언급한 대목에서 내레이터는 세월을 건너 뛴다. 마침내 아이가 자라서 바로의 딸에게 갔을 때, 바로의 딸은 아이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준다. 내레이터는 모세의 뜻이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고 한다. 해석가들은 이러한 뜻 풀이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Greenberg: 43). 이 이름이 히브리어 동사에서 왔다고 할 경우, 이 단어는 분사 능동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아이는 건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분사수동형이 되어 “마수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해석자들은 모세란 이름이 원래는 “…의 아들”을 의미하는 이집트어에서 왔다고 본다. 실제로 이집트 사람들의 이름은 프타모세(Ptahmose, “프타의 아들”), 투트모시스(Tuthmosis) 등의 이름이 많다. 또한 모세란 이름이 단독적으로 언급된 경우도 있다. 바로의 딸이 히브리어를 알았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느고가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느부갓네살이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시킨 경우(왕하 23:34; 24:17)가 있기 때문에 바로의 딸이 히브리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아이에게 히브리 이름을 지어주지 말란 법은 없다.
만약 모세란 이름이 히브리어가 맞다고 할 경우 바로의 딸이 부지불식간에 수동형을 능동형으로 잘못 씀으로써 모세의 운명을 예견하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현대의 학자들이 선호하는 견해대로 이 이름이 이집트어에서 기원했을 경우 우리는 내레이터가 이집트식 이름을 의도적으로 히브리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바로의 딸이 모세에게 준 애굽식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이 아이의 운명을 예견하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는 통렬한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식의 해석을 따르던 모세란 이름이 구원자로서의 아이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이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