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출애굽기(언약적해석)

출애굽기20:5~6,언약적저주와 축복

호리홀리 2015. 4. 9. 14:40


         "가계저주론"의 대부로 여겨지는 이윤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베다니 1999) 그의 아내 주미혜는 <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하라>는 데렉 프린스의 책을 번역하고(베다니 1999), 이 둘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베다니 1997)는 멜릴린 히키를 열심히 인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처럼 "조상"과 "후손" 사이의 연대성이 강한 사회에서 "당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주장은 신선한 복음의 소식처럼 들리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통속적인 신앙을 극복하고 성경적인 신앙을 바로 세우지 않을 때 더 심각한 시련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 유행하는 불건전한 신앙의 유형들에 대해 더욱 깊은 성경적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계 저주론자들은 4가지 중요한 성경적 구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삼사대까지 이르는 조상의 죄(출 20:5)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십계명 중 제 3계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출 20:5). "가계저주론자"의 사도로 여겨지는 이윤호에 따르면 "출애굽기 20:5은 한 가족이 받게될 죄의 결과에 대해 말씀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가족이나 족속의 구성원들에게 즉시로 임하는 처벌에 초점이 맞춰 있다"(1999:50).  
        그렇지만, 출애굽기 20:5의 말씀이 이윤호가 말하는 대로 "가계저주론"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즉시로 임함"을 가르치고 있을까?('즉시로'는 나의 강조임). 이 본문이 "가계저주론"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1)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는 배경 가운데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다(contra 이윤호 89쪽 #1항). 언약적저주이다.
        (2) 따라서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el qanna')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남편으로서 독점적인 법적 권리를 갖고 있으며 주장하실 수 있다(출 34:14; 신 4:24; 5:9; 6:15; 수 24:19; 나 1:2).
        (3) "나를 미워하는 자"(shon'ay, 분사형) 즉 "강력한 적대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사상적으로나 행동으로) 대적하는 자"를 뜻하므로 일반적으로 범죄하는 자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4) "아버지의 죄"('awon 'abot)를 "자식 3-4대까지"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은 저주 공식에 등장하는 "저주를 받으리라"('arur)는 말과는 다를 뿐 아니라, 부모의 죄가 "자동적으로"" 꼭 3-4대까지 흐르리라는 뜻도 아니다.잠시적 표현이다.6절의 "천대까지"는 역시 영원한 축복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5) "죄를 심판하리라"(poqed 'awon)는 말은 하나님의 법적인 징계로서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혹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인의 범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선언했지만, 니느웨가 회개하자 하나님은 심판을 철회하시고, 이것 때문에 요나는 몹시 분노하게 되었다(욘 4:4-11). 또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나봇을 죽인 아합에게 죽음을 선언하였지만,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그의 심판을 연기하신다(왕상  21L27-29).
        (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을 그의 자녀됨에서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십계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육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으신 분이시다. 따라서 만약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기 20:5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이 받은 "저주"를 "조상 탓"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십계명과 같은 중요한 말씀조차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 51:5)
        
        이윤호는 여러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의 삶"을 보고 신앙의 용기와 격려를 받는 히브리서 기자와는 달리(히 11장), 그들의 집에 흐르는 죄와 그 저주를 열심히 추적하며, 성경의 구속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는 노아의 집 안에 흐르는 "술 취함"과 "성적 방종"(창 9:20-22)이 "가나안 족속에게 동성연애"로 흘러 들어갔으며(1999: 49-51), 아브라함의 가계에는 "거짓말"이 유전적인 죄로 흐르고(53-57쪽), 다윗의 집에는 "음란"이 유전적인 죄로 흐른다고 주장하며(58-60쪽), 그 근거로 시편 51:5을 인용한다. 그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 집안에 있는 "근친상간"과 "기생과의 결혼"과 "기혼녀와의 결혼" 등을 열거하며, "따라서 다윗이 밧세바와 성적 범죄 후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한 고백은 어쩌면 자신의 간음죄가 어머니의 실제적인 어떤 성적 범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해석을 하고 있다(60쪽).
        시편 51:5의 말씀은 결코 출생과 잉태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성행위와 연관된 것이 의식적인 불결로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어디에도 성이 죄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잉태하는 성행위는 죄와 무관하다. 오히려 주께서 레아(창 29:31), 라헬(30:22, 23)의 태를 여시고 룻이  잉태하게 하신다(룻 4:13). 잉태의 과정도 주님이 주관하신다(시 139:13; 욥 10:8 이하). 이 본문은 죄의 보편성에 대해 문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을 뿐이다(창 6:5; 8:21 참조; 왕상 8:46; 시130:3; 욥  14:4).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그는 죄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갔고 죄의 영향을 받았고 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3. "저주는 까닭 없이 임하지 않는다"?(잠 26:2)
        
        소위 "가계저주론자"들은 모든 저주에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세대에 저주가 임했다면 그것은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잠언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리라"는 말씀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어떤 사람의 삶 속에서 저주가 나타날 때는, 거기에는 반드시 죄의 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상동). 그러나 본문을 다시 보면 "까닭 없는 저주"(qillat chinnam)는 "아무에게도 미치지 않는다"(<표준새번역>)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모든 저주에 "까닭이 있다"는 점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저주는 그 어디에도 미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가계저주론자"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성경의 본 뜻을 왜곡한 것이며,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성경 구절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조상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항하여 주님께서는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라고 친히 말씀하셨다(겔 18:3-4).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개인적인 책임을 질 것이다.
        에스겔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 신탁의 말씀은 구약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에스겔이 전해 준 말씀은 십계명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질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해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언약적 저주

        구약 성경의 "언약"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고대 근동아시아의 "국제 조약"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지난 20세기 구약학계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멘덴홀(G. Mendenhall 1955)이 구약의 언약 형식과 힛타이트의 봉신 조약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점을 처음 제시한 후, 성경의 언약과 국제 조약의 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약성경의 언약과 고대 근동아시아의 국제 조약은 (1) 서언, (2) 역사적 서문, (3) 율법, (4)저주와 축복, (5)언약의 비준을 기본 요소로 담고 있다는 점은 이제 너무나 일반화된 상식이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언약의 구조적 관점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저주와 축복"을 본다면, 이것들은 독자적인 주술적 능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속에서 언약을 유지하는 "채찍과 당근"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저주와 축복은 그 자체가 죽음과 생명을 가져오는 힘이 아니라 언약 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지탱해 주는 "행정적인(혹은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들을 이집트의 대왕 바로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시고(출 19:4), 그들을 모든 나라들 중에 "제사장 나라"로, 모든 백성들 중에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출 19:6), 그들과 언약을 맺고자 제안하셨고(출 19:7) 백성들은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고 그 제안을 수락하였으므로(출 19:7),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출 20:1-23:19), 순종에 따르는 축복(23:20-31)과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23:32-33)를 선언하신 후 언약을 완전히 체결하셨다(24:1-11).
        시내산 언약의 기본적인 구조와 요소는 신명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신명기의 구조는 다양하게 분석될 수 있지만 (1)서언(1:1-5), (2)역사적 서문(1:6-4:43), (3)율법 수여와 강론(4-26장), (4)축복과 저주: 상급과 심판(27:1-30:20), (5)언약의 계승과 비준(31-34장)으로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 구조 역시 "축복과 저주"가 언약의 행정적인 장치로 나타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명기의 구조가 언약 안에서 "저주"의 역할을 잘 드러내어 주지만, 우리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깔려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사랑으로 하나님에게 응답해야 함을 신명기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먼저 십계로 주어졌고(신 5:6-21) 언약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을 제시한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압축되고 있다(6:5).
        따라서 구약신학의 맥락에서 본다면, 시내산 언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바탕에 깔린 "은혜 언약"이며,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유지되거나 파기되는 소위 "행위 언약"은 아니었다. 물론 시내산 언약은 조건성이 극대화 된 언약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기초와 궁극적인 완성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다. 이런 점에서 시내산 언약의 조건성은 아브라함 언약 속에 있는 조건성(창 17:9)을 극대화 한 것으로서, 이후 다윗 언약의 조건성(삼하 7:14; 시 89: 30-3333)과 새 언약의 조건성(렘 31: 요 14:15)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통일성을 이루어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내산 언약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을 이루며 그 백성들의 정체성과 목표와 가치와 윤리와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모든 영역을 해석하는 근본이 된다. 이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이 언약의 프리즘을 통하여 그들은 "왕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 그리고 "남편과 아내"로서의 신인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모든 관계는 기본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 이 언약 속에 중심 요소로 등장하는 율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며, 따라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며,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가 된다.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잣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저주는 신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언약은 축복과 저주 보다 상위 개념이며, 후자는 언약의 빛 속에서 늘 이해되어야만 한다. 마치 부모와 자식의 본질적인 관계가 상벌 관계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부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자식이 도리에서 벗어났을 때 부모는 그를 돌이키기 위해 저주처럼 보이는 징계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속에서 "저주"는 파멸과 단절을 스스로 이루어 가는 주술적인 능력이거나 마귀로부터 오는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서 올바른 관계를 복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한다면, 성경의 하나님의 모습과 성경적인 믿음은 본질적으로 왜곡될 것이다.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는 장차 전개될 이스라엘의 역사를 내다보며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저주를 열거하면서도 중요한 점을 놓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라"(신 32:36; <개역>). 하나님은 언제든지 마음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여기에 역사의 희망이 있다. 최근의 여러 번역들은 "하나님의 후회"를 "하나님의 연민"으로 새롭게 제시한다(<표준새번역>, <공동역>, NIV, RSV, NRS 등; 시 135:14를 보라). 

        5.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저주의 형식

        소위 "가계저주론자"들은 성경의 잡다한 구절에서 "저주 본문들"을 가져와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저주 형식이 나타나고 있는지 보다 엄격하게 찾아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블랭크는 구약 성경에서 (1)단순 저주 공식, (2)복합 저주 공식, (3)자유로운 저주 형식이란 세 가지 유형의 저주 공식을 발견한다(Blank 1950-51). 첫 두 형식은 대부분 세속적인 소원으로 나타나며, 세 번째 것은 저주를 기원하는 기도(imprecatory prayer)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저주 소원 형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1). 단순 저주 공식

        이 공식은 "저주하다"('arar)라는 동사의 칼 수동 분사형('arur)과 이 수동 분사형의 주어로 구성된 명사형 문장(nominal sentence)으로 구성된다. 주어는 "땅"(ha'adama, 창 3:17)과 같은 보통명사, "가나안"(창 9:25)과 같은 고유명사, "뇌물을 받는 자"(loqe'ach shochad, 신 27:25)와 같은 능동분사, "너"(신 28:19)나 "그들"(삼상 26:19)과 같은 대명사, 혹은 "이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신 27:26)와 같이 관계대명사('asher)와 함께 나오는 명사절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런 형식의 문장에는 "조건"이 세 번째 요소로 등장하며 저주의 이유를 제시해 주며, 이 조건은 때로는 명백하거나(삼상 26:19; 창 49:7), 혹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렘 11:3). 

        2. 복합 저주 공식

        이 공식은 "단순 저주 공식"(1번)과 "저주 기원 형식"(3번)을 합친 형식으로 나온다. 복합 저주 공식의 첫 부분을 이루는 "단순 저주 공식"은 위와 동일하며(예, 창 3:14, 17-19; 4:11-12 등),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하는 "저주 기원 형식"은 저주가 "사람에 의해" 선포되는 것과 "하나님에게 아뢰는" 두개의 하위 범주를 가진다. 이 형식에서 우리는 중요한 네 가지 사항을 고찰할 수 있다.  
        (1) 여기에서는 "저주를 받으리라"('arur)는 분사형의 시제(tense)는 "미래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형식에서 주 동사는 미완료나 그와 동등한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로서 창세기 9:25에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arur)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에서 저주의 영향은 미래에 세대에 임하고 있다. 여호수아 6:26,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arur)"에서도 장차 여리고를 재건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에게 임할 가설적인 저주를 한다(왕상 16:34 참조).  
        (2) "저주를 받으리라"('arur)는 분사형의 화법(modal)은 "소원"을 나타내는 "기원형"(optativ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20:14에서,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arur),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al-yehi bauk)에서 "저주를 받았으면"은 "기원형"이며 "선포형"(declarative)이 아니다.
        (3)  "저주를 받으리라"('arur)에서 저주는 수동태(voice)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형식은 항상 "B로 A를 저주하게 하소서"로 나타나지 않고 "A가 저주받게 하소서"로 나타난다. 즉 이것은 저주 소원이지 저주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형식에는 하나님이나 어떤 마귀적인 존재들이 저주의 시행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수동태가 뜻하는 바이다. 비록 모든 수동태에는 "감추어진 수단"(concealed agent)이 내포되어 있지만 "문제시된 행동의 동인자나 동인자들"은 감추어져 있다.
        (4) 복합적 저주 공식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시는 경우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창 3:14-15, 17-19; 4:11=12; 9:7; 신 28:16 이하).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일인칭이나 삼인칭(신 28:16이하)으로 말씀하시며 일련의 동사들로 저주가 선포된다.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말씀으로 저주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창 12:3; 신 30:19; 11:26-29; 말 2:2; 잠 3:33), 인간의 저주와 하나님의 저주 사이에 명백한 구분을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저주의 효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예, 신 30:1; 29:26; 27:14). 그렇지만, 하나님의 저주는 항상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저주를 해결하실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계 22:3 참조).  

       3). 저주 소원 형식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의 저주 보다 더 효력 있게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저주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길 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으로 원수를 저주하도록 구하는 저주형 기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런 저주형 기도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이 형식에는 "저주를 받으리라"('arur)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으며, 대부분 원수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도록 간청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저주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① 하나님을 부르지 않지만, 최소한 하나님께서 저주에 동의해 주시길 바라거나, ②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 간청을 이루어 주시길 구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기도는 시편과 예레미야의 "고백"에 많이 나타난다(렘 11:20; 12:3; 17:18; 18:21-23; 시 69:24-26, 28; 58:7-9 등). 이것이 보다 확장된 형식은 욥이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곳에 나타난다(욥 3:3-10).
        (2) 시편과 예레미야에 나타나는 "저주 소원"은 결코 주술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윤리적이고, 신정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시내산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시인들은 혹독한 저주 소원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적개심과 분노를 해결하였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시길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소위 "저주 시편"에도 주술적인 저주 개념은 나타나지 않으며, 인격적인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6. 창세기에 나타난 저주의 사례들

        창세기에 나타나는 몇몇 저주의 본문들은 여러 "가계저주론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본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새롭게 음미해 보고 그들의 입장을 검토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1).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뱀과 땅이 받은 저주(창 3:14, 17)

        구약 성경에서 "저주받다"가 처음 등장하는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뱀은 동물로서의 뱀과 "유혹자"로서 영적인 실체가 함께 포함된 존재이며, 그가 받은 저주는 "배로 땅을 기어다니는 모습"과 그의 철저한 패배를 상징하는 "흙을 먹는다"는 숙어로 표현된다(시 72:9; 사 65:25).
        이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에게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아담이나 하와가 저주를 받지 않으며 "땅"이 저주를 받는다. 땅이 받은 저주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로서 잘 설명되고 있다. 즉 땅은 이전처럼 그 효력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노동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2). 가나안의 저주(창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에는 "저주를 받으리라"와 "그의 형제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형식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받은 저주는 형제의 종이 되는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마다 "죄는 함이 범했는데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를 받는가?"라고 묻게 된다. 우리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노아의 아들들이 그 후손들의 성격을 구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함으로부터, 구스, 애굽, 붓과 가나안이 태어났다(10:6). 이들 중 가나안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변태적인 성유희를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레 18:3). 즉 아버지의 수치를 생각 없이 드러내는 함의 무분별성은 후대 애굽인과 가나안인의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에 대한 예표가 된다. 따라서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그의 가정에 흐르는 저주가 아니라, 장차 가나안 사람들이 지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언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아브라함과 그를 저주하는 자들(창 12:3)

        미래의 구원사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이 중요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열국에게 복 주시는 기본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abaraka) 너를 저주하는 자(meqallelka)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a'or)"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저주하다"는 동사가 두 개 나타나며, 전자(qalal)는 후자('arar) 보다 그 의미가 약하다. 즉 누구든지 아브라함에 대해 좋지 않은 말만 하여도(qalal),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실"('arar)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저주하리라"('a'or)라는 형식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타나며, 따라서 이 표현은 구속사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할 특수한 위치를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푸대접하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저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창 27:12-13)

        이삭이 그의 장자 에서를 축복하려고 할 때 리브가가 개입하며 야곱에게 축복하도록 하자, 야곱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 하며,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lo' beraka)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alay qelala)"라고 말한다. 이 때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qillateka)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고 대답한다. 여기의 "저주"(qelala)는 강한 저주 공식인 "저주받다"('arur) 보다 훨씬 약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창세기의 저자는 야곱이 꼭 저주를 받아야만 했으며, 그 저주가 리브가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삭을 통하여 야곱에게 전수되어 갔음을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 

        5).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창 49:5-7)

        야곱은 그의 임종 때에 12 아들의 장래에 대해 예언하면서 특히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한다. 여기에 야곱은 그의 두 아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노가 저주를 받으라"('arur 'apam)라고 말한다. 물론 이 저주는 이후에 성취되어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흩어지지만, 레위 지파는 이후에 비느하스를 통해 바알브올 사건 때에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렸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출 32:29; 신 33:8-11). 즉 레위 지파의 흩어짐은 그 지파와 온 이스라엘에 복이 된다. 이것은 한번 선언된 저주조차도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복으로 변할 수 있음을 결정적으로 증거해 준다. 

       
        구약성경에는 수많은 저주들이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저주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언약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있다. 물론 이 저주는 징계가 목적이지만, 그 징계조차도 우리들에게는 벅차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율법을 불순종한 대가로 당해야 하는 저주에서 구속함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신27:26을 인용하면서 "기록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갈 3:10 이하). 이어서 그는 신명기에서 다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저주가 됨으로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이다"(갈 3:13;신 21:23). 즉, 우리의 모든 저주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저주를 벗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