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출애굽기(언약적해석)

출애굽기2:23-25,400+40

호리홀리 2015. 4. 13. 11:19

출 1-2장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완전히 숨겨져 있다. 그리고 2:22의 게르솜이란 이름 속에 담긴 한숨 속으로 인간 영웅 모세마저도 꺼져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40년이 그의 한숨처럼 덧없기만 한 것일까? 이 짧은 세 절은 이에 대해 웅변적으로 “아니오!”를 외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사실 하나님은 숨어 있으시되 결코 없으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아왔다. 숨어 있는 중에도 그 분은 적장 필요한 것은 모두 다 하셨다. 그 분은 역사의 경로가 그 분의 의지 밖으로 이탈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다.
        인간 영웅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게르솜이란 아들의 이름처럼 허무한 40년의 세월의 틈으로 진정한 역사의 영웅께서 베일을 벗고 전면에 등장하신다. 모세가 한숨을 쉬는 40년 속에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내레이터는 출애굽기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이 짧은 세 구절의 서두를 “애굽 왕은 죽었고”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삼상 16:1-3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불필요한 죽음을 당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Greenberg: 51). 이 해석이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 4:19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고 하심으로써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인 다음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죽음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작정만 하셨더라면 애굽 왕의 죽음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리란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마 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중요한 것은 옛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 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지만 이미 시대가 바뀌었다. 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는 여명 전의 어둠이 깊은 것과 같은 것이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24-2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을 네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문을 살리기 위해 사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
하나님이 아셨다.

이 네 문장 모두에 “하나님”이란 주어가 꼬박꼬박 명시되어 있다. 통상적인 히브리어 문장 속에서는 이처럼 주어가 동일한 경우 주어는 한 번만 표시한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아셨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에서는 매 동사마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반복한다. 이러한 독특한 표현양식을 통해서 내레이터는 “하나님”이 이제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문장을 살려서 읽으면 “하나님”이 “벌떡” 일어나서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오시는 느낌이 확 살아나지 않는가? 앞으로 한글 성경이 새롭게 번역될 때 이러한 수사법적인 요소에 대한 면밀한 고려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다른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앞의 세 문장에는 다 목적어가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는 목적어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마지막 문장은 타동사에 목적어가 빠져 있기 때문에 완전한 문장이라고 할 수가 없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러한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25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처리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처리하고 있다. 또한 탈굼 옹켈로스는 마지막 문장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더라”고 부연해서 번역하고 있으며, 칠십인경은 동사를 수동태로 처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졌더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표준새번역은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고 의역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파격적인 문장은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이 글을 원문으로 읽는 독자는 목적어 없이 그저 “하나님이 아셨더라”고 되어 있는 문장을 보고 당연히 질문을 던질 것이다. 뭘? 도대체 뭘 아셨다는 말인가?
        이 대목에서 내레이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단 접는다. 3:1은 히브리어 구문론상으로 볼 때 전혀 새로운 단원이 시작하고 있다. 내레이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탁월한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데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멈추어버린다. 마치 “하나님이 뭘 아셨는지는 다음에 알려줄께”하는 식으로. 성경이 여기에서 멈추었으므로 우리도 여기에서 멈추어야겠다.

400년과 40년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여전히 임재하고 계시며, 역사의 방향타를 쥐고 계신다. 이 점은 이스라엘이 기적적인 번성을 이루는 것에서, 산파의 하나님 경외에서, 바로의 딸이 마침 모세가 버려지는 순간에 목욕하러 나온 것에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400년과 40년의 틈은 중요하다. 출 1:1-7은 400년이란 시간의 틈을 한꺼번에 뛰어넘어버린다. 그러나 그 틈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여백 속에서 하나님은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로 성장시키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다. 또한 모세가 미디안에 들어간 이후로 부름받기까지의 40년이란 세월 역시 부질없는 시간의 빈 틈이 아니다. 모세가 게르솜하며 한숨을 쉬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역사의 장 속으로 뛰어드셨다. 인간에게는 절망의 밤이 하나님에게는 신앙의 새벽이었던 것이다. 진실로 시간의 여백은 하나님의 구속사란 거대한 그림의 가장 위대한 부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장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숨겨지심에 안타까와 하는 불신의 목소리나,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불평하는 입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응시하는 믿음의 눈이다. 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출애굽기 1-2장은 구약성경에서도 가장 멋있는 장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소리 없는 활약의 장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은밀하고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열왕기상 17-18장에서 하나님이 가뭄과 불이라는 강력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면 19장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읽는 섬세함으로, 얇은 유리처럼 부서져버릴 것 같은 엘리야의 몸을 소중한 보물처럼 감싸 안으시는 섬세함으로, 미세한 음성으로 다가오는 부드러움으로 역사할 때도 있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산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들의 하나님”이기도 하신 분이신 것이다(왕상 20:23,28).
섬세한 하나님에는 섬세한 신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순간에는 섬세한 살핌과 귀기울임으로 응답할 줄 아는 신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신자가 되는 것이 소중하다.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우리가 외롭다고 한다면,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로 인해 하나님은 더 외로우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헤아리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400,고난의 10배수와 40,고난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