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10장~12장,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라

호리홀리 2015. 4. 1. 11:58

이상에서 제기했던 네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이제 전도자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결론인 것입니다. 전도서의 서론이 인생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것인가? 의미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그 결론을 바로 이런 삶이라고 제시하기까지 그 고민의 과정을 우리도 정당하게 추적한 다음에야 솔로몬이 내린 결론을 나의 인생관으로 의미있게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장,하나님의 지혜로 살아라

11장,베풀며,섬기며 살아라
 

 

결론 부분인 12장 13-14절을 보시면,

 

이제 모든 것을 다 들었으니 결론은 이것이다 :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선하건 악하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정당한 삶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정당한 삶이냐? 여기서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명령을 지킬려면 우선 그 명령을 내리는게 있어야 그 명령을 지킬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면서 우리에게 모르게 담아 놓은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의미있게 다스려 놓는 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쳐 주신다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열심히 깨닫고 궁구하고 연구해야 할텐데 그것을 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첫번째 말씀이 뭐냐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공부를 통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을 잘 깨우치는 기회도 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해서도 우리가 쓸데없이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성경을 좀 잘못 배워가지고 이상한 말세론이 자꾸 유행해서 모든 말세론에서 모든 이론이 다 나옵니다. 항상 요한계시록을 강의한다 하면 사람을 공포에다 몰아넣고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면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환난이 일어나도 성도에게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내리면 아무리 환난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털 끝만큼도 까딱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괜히 환난의 정당한 의미를 모른체 공포에 몰아 넣는데 유혹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실 때에 역사가 어떻게 끝나고, 세상이 어떻게 움직여 나갈지 그 큰 흐름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한 것들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본인이 깨닫게 하셨고, 근본적인 역사의 큰 흐름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안배우려는데 있지 하나님께서 안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는 여기서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더라도 인생이 거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이 거꾸로 우리를 질책하는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제대로 배우고, 그 말씀을 배운데서 인생이 올바로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참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자세가 아니냐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가르쳐 주시되 우리는 목석같이 꼭둑각시처럼 있는 것이 아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두번째 제기했던 문제도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계명의 형태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계명’의 형태라는 의미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꼭둑각시처럼 자동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그것이 참으로 옳고 바르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을 할 때 그 계명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찌 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 마음대로 된다면 우리는 로보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실제로 로보트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문제는 그런 다음에야 정당하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듣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결정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자발적인 순종을 내려서 행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로보트처럼 아무런 결정력도, 사고의 과정도 없이 움직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은 꼭둑각시가 아닌 책임있는 존재로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명령에 대해서 ‘너는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고 나중에 충분히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나갈 때 로보트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계명이 참으로 옳음을 알아 감사함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정했다는 말씀을 이해해서 자기는 가만히 로보트처럼 있고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내 의식과 상관이 없이 그냥 죽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우리 머리로 잘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그 인격으로 결정하여 인생을 살게 하시면서도, 그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요, 그의 엄청난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순종해서 가정에서 가장으로 성실히 살았으면 그만큼 그 가정은 편안할 것이고, 10년 동안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몸을 아무렇게나 굴렸으면 그 사람 몸에도, 가정에도 나타는 큰 불안과 어려움 가운데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그 죄 문제에 대해서 그가 용서 받았을지라도, 그가 이제까지 낭비한 모든 것은 회개했다고 해서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용서 받았지만 이때까지 알았던 죄로 인한 여러 결핍이 그 사람의 속에 남아서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작 그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합니다. 바로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되 기계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인격자로 대하시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고귀하게 대하시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우쳐서, 고귀하게 대하실 때 하나님에 대해서도 고귀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그 뜻을 배워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냥 기계적으로 억지로 로보트처럼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그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깨달아서,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꼭둑각시가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옳고 좋아서 정말로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결정한 수준까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참 목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가 많으냐? 이 세상에서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겁니다. 우선 14절 말씀을 보십시요. 이 세상 그 자체만을 볼 때는 불의와 부조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정말 악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의인이 받고, 선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악인이 받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살 때 억울하게 판결받고, 억울하게 살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은 이 세상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내세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들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되 대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것까지도, 그때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씀하시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공포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한 평생의 의미가 단지 이 땅에서의 한 평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끝내고 이어지는 내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가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촛점이 내세로 옮겨가니까 현실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부추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는 상관이 없고 내세로만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사실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내세를 말하는가는 전도서의 처음 문제제기를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보고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심령이 상하고 오히려 허무한 생활로 빠져서, 허무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어서 결국 그 사람의 삶은 쾌락주의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쾌락은 어떤 적극적 의미에서의 쾌락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을 잠시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 밖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한 인간 석학들의 자살행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삶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지 않기에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세가 없이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그 삶이 어찌된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오늘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세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이며, 우리를 그 시민으로 부르시고 있고 그 시민답게 지금 만드시며 완성시키실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 나라와 그 안에서 완성될 삶을 참으로 소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모든 부조리와 부정, 모든 것에 대해서 낙담치 않고 올바른 평가기준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나라와 그 땅에 대한 소망이므로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지 말고, 이 세상에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세상의 종국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즐기면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내세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내세의 소망 속에서, 현재를 참으로 의미있게 만들 수 있다고 전도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그러나 기가막힌 내용입니다. 내세의 삶이 있기에 현재의 삶이 의미있게 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이 땅에서 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출발했다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의 인생관이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을 보는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운 인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출발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내세에 비춰서 현재를 살 때에 현재의 삶에서 불의가 득세하는데 낙담치 않고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살 수 있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 땅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아무도 몰라주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 같고, 바로 살려고 애쓸수록 괴로움만 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은밀 중에 갚으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때에, 현재의 삶을 방탕하거나 좌절, 낙담치 않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그 많은 지혜와 권력과 권세를 맛본 솔로몬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땅에서 참으로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삶 자체에만 눈을 고정시켜서 살펴보면 절대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눈을 들어서 나와 나의 밖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한 내세를 바라보는 삶을 진정으로 소원할 때, 진정 이 땅에서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 결론만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심각한 고민의 과정을 그가 가진 심정으로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결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론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다스리는 뜻과 내세의 삶과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서는 이런 헛된 삶이 신자들의 삶이 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역설적으로 초두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런 식의 사고와 삶은 헛된 것이라고 강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전도서라면 헛된 것이라고 기억하시지 마시고 이 땅에서 가장 의미있게 사는 삶을 소개한 것이며, 내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