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6장~9장,해결 할 수 없는 모순

호리홀리 2015. 4. 1. 11:52

또 하나의 부조리로,

 

사람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고를 하지만 식욕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가 처세술을 잘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낫지만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6:7-9)

 

지혜가 많은 자가 등용될 기회가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아서 지혜를 사용할 기회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연줄도, 재산도 없어서 가난한 지식인의 설움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어렵고 비정상적인 사회의 부조리를 적발하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

 

나는 헛된 세상살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로운 사람도 젊어서 죽은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사는 사람이 있으니...(7:15)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업신여김과 조롱을 당하고 인간사회에서 뒤지게 되며, 온갖 술수를 부리는 악인은 사회의 유력한 위치에서 오래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는,

 

내가 세상을 살펴보니 빨리 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경주에서 언제나 일등하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해서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생활비를 많이 버는 것이 아니며,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부를 얻는 것이 아니고, 유능하다고 해서 언제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불행한 일을 당할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이 사람도 갑자기 재앙이 밀어 닥치면 거기에 걸리고 만다.

 

나는 지혜의 좋은 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 조그만 성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강력한 왕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때 그 성 안에 가난하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혜로 그 성을 구했으나 그 후에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면 무시를 당하고 그가 하는 말을 인정해 주는 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9:11-16)

 

전도자는 원칙대로 마땅히 있어야 할 순리대로 되지 않는 여러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원칙이 없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깔고 있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기하는 네번째 문제는 우리로 더 심각하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케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또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국 사람에게나 짐승에는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는다. 사람과 동물은 다 같이 호흡하는 동물일 뿐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사람과 짐승은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영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써 다 끝난다면 아무리 그가 멋있게 의미있게 살았다고 해도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9장 4절을 보면 ‘그래도 살아 있는 자가 희망이 있는 것은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자가 아무리 용감하다지만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라리 살아 있는 개가 죽어 있는 사자보다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다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삶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어떤 물질을 주신 것은 어떤 적극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니까 잠시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쉬운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마약을 사용하는 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쾌락주의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셔도 이 땅에는 막 돌아다니니까 그런 것을 잊으려고, 그것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서 쾌락이나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다기 보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을 보내는 철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계성 속에 부닥쳤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런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방식으로 여기서도 결국은 이 문제들이 만약에 풀리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순간마다 즐기면서 사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냉소적 쾌락주의의 결론을 내리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하는 결론은 사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인정을 하더라도 참으로 풀어야할 문제들을 풀지 못했을 때,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다 여기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