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3:12~22,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호리홀리 2015. 4. 1. 11:41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에 대한 두 가지 형태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한 섭리적 인도와 또 다른 하나는 본인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인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곤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는데 지내고 보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였다고 말입니다. 이 때는 그 사건을 당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무지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으로 섭리적 인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또한 있을 수 밖에 없으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각하는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섭리적 인도만으로는 그 사람 스스로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유아기적 신앙으로 배고프면 울고 불편하면 징징대는 형태가 많은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했느냐고 물으면 사실 오랜 세월 후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다는 결과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앙 형태는 그 어려움에서 대부분 처절한 좌절과 슬픔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있다가 지내고 나서야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발견하곤하는 것입니다.

 

여기 전도자도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어서 나의 한계로 인한 좌절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오히려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과 인간 자체만 놓고 - 하나님 없는 세계관 - 생각하다가 그래서 전도서 2장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거기서 허무감과 좌절감을 발견하고 드디어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던 자리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는 관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연법칙 또는 우리 인생이 처한 모든 한계들은 우리를 좌절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에서 외쳤던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라고 감사, 찬양하는 자리에까지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처음에는 감격이 넘치고 참 좋습니다. 실패했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발견하면서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몇 년 정도 다니고 나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이 사람을 사로잡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나서 한없이 계속 즐거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하게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답게 다스려 나가신다고 했는데 신실하게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팽개치고 예수를 안믿겠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도자 솔로몬이 딱 부딪힌 것입니다. 요전까지는 비신앙인이 고민하는데서 신앙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신앙인으로서 가지는 중요한 고민과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성경이 제시하는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의미있게 다스릴 것이라고 믿지만은 마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는 믿지만은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다’는 것이 없이 그냥 그냥 살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을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아주 잘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의 뜻대로 아름답게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믿는 사람에게 생겨난 새로운 문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로 요약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있는 한계를 두셔서 우리를 다스려 나가신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 뜻은 아름답고 멋있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처해 있는 문제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게 하실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 아름답다손 칩시다. 그것을 우리가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신다 하더라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3장 11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야만이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가만히 살펴보니까 문제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많다는 솔로몬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 스스로는 그 뜻을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없다’는 이야기를 이 전도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아무리 좋은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냥 살아 간다면 단지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삶이 꼭둑각시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드디어 하는 겁니다. 그것이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두번째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 인간 스스로는 내가 처해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한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나님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실텐데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한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하신다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린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꼭둑각시에 불과한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여기 14절에서 제기시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번째는 정말 더 심각한 문제제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12장까지 대부분의 이야기를 세번째 문제로 삼은 걸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다하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도 많고 뒤죽박죽인가 하는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면서 이 땅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악인들이 더 출세를 하고 잘사는 것이 현실로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다스리신다는데 왜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은 바르게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 더 잘되는가 말입니다. 그 부조리한 내용을 이제 하나 하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뽑아서 보면,

 

내가 보면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많이 있다. 법정에도 악이 있고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3:16)

 

재판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것을 판별하는 자립니다. 가장 공의로워야 되고, 가장 공평해야 되고, 가장 의로워야할 자리에 악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악과 부조리가 공의를 행해야 될 곳에 만연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아도 피부로 느끼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