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3장1~11,한계(때)를 아는 삶

호리홀리 2015. 4. 1. 11:35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도자는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3장부터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만사에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시작해서 11절까지 계속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생각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해 줍니다.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 이유는 한계 때문이었는데 그 한계가 왜 생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 때문에 좌절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이 11절에 나옵니다. 똑같은 내용을 두고 예전에는 그것을 생각할 때 좌절과 허무로 밖에 갈 수 없었던 것이 관점이 바뀌니까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 것입니다. 전도자의 표현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릴 때 그 뜻과 계획에 따라 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에 맞는 한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계는 나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면 그 한계를 왜 정하셨는가를 알아가면 오히려 허무로 가는게 아니라 그 한계를 통해 내게 가르쳐 주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장 이전까지는 ‘하나님’ 이야기가 한 번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3장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즉, 이전까지 삶의 의미를 생각하되 내가 바라보는 안목을 세상과 자신에게만 두고서 찾으려니까 한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한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사고체계와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내용이 3장의 내용입니다.

 

자기를 좌절케 하였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그 속에서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깨닫고 그래서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는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관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철학입니다. 그것은 반복, 즉 윤회사상이 골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한계에 대해 그 우주질서 자체에서 우연히 생긴게 아니라 그렇게 만드신 분이 있고 그 한계를 만드심으로 온 우주를 다스려 나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삶의 한계 안에서만 보면 숙명론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점성술이고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계관이 취하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라 그 한계를 느끼게 하고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두신 이유를 찾아 나간다는 것,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섭리하셔서 아름답게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세계의 한계 자체만을 볼 때는 분명히 비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무 의미없이 그렇게 만드신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생을 의미있게 하려고 하신다는 의미에서 전도자는 ‘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고백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섭리하시기 때문에 좌절을 느꼈던 한계가 하나님 안에서 의미있게 되는 것이라고 전도자의 결론이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없는 세계관에서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했지만 이제는 그 한계는 마음대로 생긴게 아니라 그것을 정하신 그분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되어서 내린 결론이 3장 14절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본론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봅시다. 처음에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부딪혔던 벽이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문제는 그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인데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 한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 다스리시기 위해 만드신 것이며 아름다운 계획이 있어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자리까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려 나가시되 그 방법으로서 우리 인생에 한계를 두시고 자연에도 법칙과 한계를 두셨으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그대로를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름답게 때를 따라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도자는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생각하다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 가정이나 국가의 문제, 혹은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한계라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참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없이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며 우리의 생각을 바로 잡아 놓으려고 하신다는 것, 자신이 처해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면서 겸손하게 하시며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고백했습니까?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는 지혜가 최고로 많았고 또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 일평생 동안에 사는 동안의 삶의 의미와 목표에 대하여 진지한 답변을 시도하였습니다.  전도서는 우선 헛되다는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하면서 삶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추적합니다.  먼저 이 세상 바깥의 우주를 관찰, 연구해 보았으나 움직이는 세상의 법칙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이것은 새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앞으로 올 세대가 우리 세대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우주와 세상으로부터 이제 인간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의 창조순서를 따르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요. 인간 자신을 살펴보아도 거기에서 엄청난 한계를 느낍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은 생각하는 능력인데 그 능력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역시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서 인생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과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기독교와 전혀 상반되게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형태의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 윤회사상이라고 언급하는데 인생이 부딪히는 여러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노력을 피눈물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음으로 시도했던 전도자의 방법은 삶의 현장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술에 만취해 보기도, 방탕해 보기도, 돈을 원하는 대로 벌어 보기도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모두 다 시도해 봅니다. 그런 시도를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내가 술을 마시고 방탕하면서도 방탕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기서나마 나의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혹시 있지 않을까?라는 입장에서 방탕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고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모든 인생이 부러워할 만한 또한 아직도 많은 인생이 솔로몬이 누렸던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열심히 살아나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솔로몬의 자전적인 고백은 우리에게 큰 경종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헛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세와 부를 가지고 살았다손치더라도 그 인생의 마지막을 보니까 모든이가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뛰어 넘을 수 없는 필연적 한계로 인하여 좌절하다가 그럼에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종국에 가서 그렇게 산 사람이나 그냥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한계에 부딪히니 얼마나 헛된 인생인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이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질수 밖에 없으나 솔로몬은 바로 이런 헛된 삶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제시하는 과정이 전도서 3장 이하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이 문제를 다시 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한계는 우리 인생을 좌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아름다운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조성하신 한계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한계 때문에 허무하고 좌절하고 말았다면 이제는 그 한계 때문에 인생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한계는 의미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면 오히려 인생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는 솔로몬의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종교들과 인간들의 철학들은 그 한계를 넘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단지 현실도피적으로 야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없을 때는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부딪히는 한계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원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믿을 때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하여 감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놓고 신자와 불신자가 정반대의 해석을 내리고 정반대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와 인간 그 자체만 또한 세계와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당연히 좌절,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관 및 세계관에서 드디어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 및 세계관으로 바뀌어지는 분기점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처절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옵니다. 하나님의 크신배려 속의 계획과 그의 간섭을 믿고 인정하면서 그 한계와 좌절을 아픔과 한숨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아나가는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는 세상적인 좌절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이 때에 따라 아름다게 하신다는 그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큰 기쁨과 감사를 발하는 찬송으로 전도서는 2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