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1장,인생은 과연 헛된 것인가?

호리홀리 2015. 4. 1. 09:45

 

전도서( Ecclesiastes)

 


 


 

  전도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실 허무한 감이 듭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아름답고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데 계속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얼핏보면 성경에 이런 글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제대로 알고 보면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록자는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왕 전도자의 말이니라’라고 해서 솔로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지혜로왔던 인물이라 일컫는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인생은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생은 헛되다’는 결론으로 끝나고 마는가? 1장부터 이런 결론을 복선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결론이 나오는 것은 그냥 내뱉어진 것이 아니라 전도자가 이전에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가 나름대로 잘 추구해서 내린 결론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품었던 의문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해서 자기가 품었던 의문이 무엇인지를 제시합니다. 즉, 쉽게 풀자면 사람이 일평생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에게 남는게 무엇인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 여기에서 ‘해 아래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즉,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풀어가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글입니다. 도대체 성경은 인생의 의미를 뭐라고 가르쳤으며 그 해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 그 과정 속에는 이제까지 세상에서의 모든 종교, 도덕, 철학 등에서 그 나름대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법과 과정들이 몽땅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이와같은 질문을 제기해 놓고 1차적으로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헛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쓰여진 의미는 수증기, 입김이라는 의미입니다. 기껏 인생 60, 70년을 살았더니 남는게 없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솔로몬이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하여 전도자는 지적인 방법과 경험적인 방법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우선 전도자는 첫번째 방법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둘로 나누어 우선 자기 바깥 세계, 우주의 피조계에 대해 살펴보는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에서 땅에 대해서 우선 생각합니다. 5절 ‘해는 떴다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해는 보통 천체를 상징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반복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는 특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이라 하면 보통 신비하고 알 수 없는 특성으로 이해되어집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나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니라’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네번째로 7절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즉 물의 운행에 대해 관찰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자연계, 우주계를 살피고 관찰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관찰합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8절과 같이 만물이 피곤하다는 결론입니다. 이 말은 피곤해서 지친 상태라기 보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뺑뺑도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가만보니 그 나름대로의 법칙과 굴레가 있어서 반복된 질서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없고 법칙과 질서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9절 내용과 같이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전에 있던 것을 생각지 못해서 새로운 것처럼 생각할 따름이지, 근본적으로는 한계와 법칙의 굴레에 갖혀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피조계를 살펴본 결과 여기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번째의 방법으로 이제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즉 인간에 대해서 말입니다. 12절에서 18절까지가 이 내용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과 이 부분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계와 우주계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으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도서도 이와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이 내용이 12, 13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의 인간 즉, 이상적인 인간을 두고 생각합니다.

 

13절에는 ‘궁구하며 살피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여 깊이 있고 넓게 애쓰는 사람을 말하는데 13절 중간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즉,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도대체 이 땅에서 왜 사는가?라는 것을 마땅히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궁구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수단으로 해서 그것을 생각하느냐 입니다. 여기나온 13절에 ‘지혜를 써서...살핀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지혜를 사용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취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지혜, 이성을 가지고 찾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즉,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에서와 같이 지혜를 그 수단으로 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다가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 때와는 달리 이성이 모든 것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이성이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모든 것의 의미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교육만 잘 시키고 이성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리라는 생각이 편만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생각이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고 결국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칸트에 이르러 비로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에 비해 벌써 몇 천년 전에 성경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다 해답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성에 대해, 그것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풀 수 없다고 가장 지혜 많았던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인생의 거대한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고 하면, 최소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미친 짓인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17, 18절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18절에 보면 많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며 마음만 괴롭고 고통만 더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 봅시다. 처음, 문제제기를 한 것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방법으로서 우선 자기 주위의 세계를 살펴보니 거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 방법은 포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가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서 알아보려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찾지 못했더라는 이야기가 1장까지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