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도서(구속사)

전도서2장,바람을 잡으려고

호리홀리 2015. 4. 1. 11:28

지혜를 써서 연구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실제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삶을 경험해 봐서 내 인생의 참 즐거움을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 즉,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2장 1절부터의 내용입니다. 한계에 다다른 이성으로서의 방법은 포기하고 실제 삶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에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가를 모두 시험에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혹시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줄 수 있다면 경험하겠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시도한 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첫번째, 술독에 빠져보는 것입니다. ‘술’은 쾌락의 대명사로 보통 언급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것은 세상적 방탕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거기에 어떤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방탕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만둘 자세로 술독에 빠져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정도 술에 빠지면 머리 속에 지혜가 없어지기 마련인데 3절을 다시보면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이 말은 즉, 이것이 어떤 인생의 의미가 있는가를 마음에 생각하면서 술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지혜는 여전합니다.

 

두번째 방법으로 3절 후반에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리석은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보았다고 합니다.

 

세번째로 남자들이 보통 많이 쓰는 방법이 나옵니다. 4절 ‘나의 사업을 크게 하며...’ 이것을 현대말로 풀어보겠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기업을 하나 세웠는데 삼성그룹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마어마한 기업입니다. 즉, 사업성취를 해서 대궐같은 궁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궁전을 아시죠? 그러고 또 에덴동산 같은 큰 정원도 가꾸고 거기에 온갖 아름다운 나무도 심고 또한 무역을 크게 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팔레스틴 밑에는 이집트가 있고 위쪽으로는 바벨론이 있습니다. 일상 4대문명이라고 하면 어디를 꼽죠? 인도문명, 중국문명, 애굽문명, 그 다음으로는 바벨론문명 이렇게 꼽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인류의 거대한 두 문명권인 애굽과 바벨론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한 것입니다. 중간에서 중계무역도 하고 통행세도 받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강해지면 이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바벨론도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숙명적으로 이리 맞고 저리 맞게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고, 이것을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더 강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모든 권세를 쥐고 부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도 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를 항상 두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유명한 사장들이 가든파티를 할 때 밴드를 부르곤 하지요? 그러나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8절 이후를 봅시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아세요? 굉장히 많습니다. 즉,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있느냐를 찾으려 애썼던 것입니다.

 

자! 솔로몬은 이 정도로 권력도 가지고 모든 것을 성취하고 누리면서 해 볼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어느 정까지냐?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말로 하면 생각나는대로 원없이 하고 싶은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것들은 다 해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로 호강하면 일반 사람들은 생활의 안락함으로 지혜가 없어지게 마련인데 지혜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모두 헛되다는 결론으로 갑니다. 전도자는 왜 이 모든 것을 다 해보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는가? 하는 점입니다.

 

1차적으로는 가만히 살펴보니 이 땅에 살면서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사는 것 같지만 종말을 보니 결국 똑같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즉 허무하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일반으로 똑같이 죽어서 땅에 묻힌다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전도자가 자기 시대에 큰 일을 했더라도, 영원히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해 산다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전도자는 사는 것은 헛될뿐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23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일평생 잠도 안자고 고민하며 지혜를 짜서 나름대로 업적과 기업을 이루어 놓았는데 이것을 지혜자가 물려 받을지 우매자가 물려 받을지도 모르고, 내가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삶에 즐거움을 주는게 무얼까를 생각해 본 것이 24절에서 26절까지에 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쉬면서 인생을 즐기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벌은 만큼 잘 먹고 잘 살기라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조차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것도 하나님이 주셔야하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인생에서 내 손에 있는 것같은 재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내 손에 달려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2장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시험해 보았지만 결국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고 26절 ‘이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하는 것 같다’라고 합니다.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우선 이 땅에서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1차적으로 그것을 찾기 위해 첫번째로 피조계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일정한 법칙과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다음, 지혜, 이성을 수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자 그 다음 실제적으로 생활하고 경험하면서 큰 사업을 성취하고 쾌락을 즐겨 보았으나 그것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고 난 다음에 자기 업적이 기억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이루어 놓은 것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잘먹고 잘살기라도 하자고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 스스로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이 1, 2장까지의 설명입니다.

 

여기까지에서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한계 안에 갖혀 있다는 것을 본 때문입니다. 삶의 적극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잘먹고 잘살자는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자 삶의 허무를 논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