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9).에스겔서47장/말씀회복운동

호리홀리 2015. 3. 26. 22:21

9).에스겔서47장/말씀회복운동

 

  이제 40장부터 전개된 성전의 측량과 새로운 율법의 지침이 일단락되면서 새로운 내용 곧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축복이 생명수의 환상을 통해 12절까지 제시된다. 물과 기름짐, 축복 등은 구약에 있어서 서로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말인 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 황무하고 죽어있는 땅을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키는 본문(1-12절)의 회화적 묘사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풍성한 축복을 상징한다(시 46:4;65:9;사 33:20). 한편 이 부분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계 22:1)과,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온 우주를 풍성하게 소생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요 10: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셨으며 친히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언급하셨다는 점에서(요 4:10;7:38)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하겠다

 


 

(1). 생명을 주는 강(47:1-12절)

 

. 물이 강으로 됨(47:1-5절)

 

가. 스며 나오는 물(47:1-2절) 

 

  성전 둘러보기를 마친 에스겔은 이제 성전 건물의 문에 이른다. 거기서 동쪽을 향한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다. 원문에 있는 ‘히네’라는 단어는 에스겔의 발견에 극적 효과를 더한다.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을 에스겔의 시선과 일치시킨다. 그 나오는 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장치이다.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성전 안뜰에 있는 제단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제단을 지날 즈음에 제단의 남쪽을 둘러 흐른다(1절).

 

  물은 계속해 동쪽으로 흘러 그 물줄기가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 동쪽 문은 영광이 돌아온 이후 닫혀 있었다(43:1이하; 44:1-2). 이에 성전 안내자는 에스겔을 북쪽 문을 통해 성전 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성전담의 북동쪽 모서리를 돌아 동쪽 문의 바깥에 이르게 한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문을 통과해 스며 나오는 물을 다시 만난다. 1절에 사용된 ‘히네’가 여기에서 다시 사용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에스겔의 시선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스며 나오다’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파카) - ‘쏟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단순하게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솟구쳐 나오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서  1절의 ‘흘러 내리더라’와 비교해볼 때 그 물의 양이 성전 안에서 이미 상당하게 불어나 있음을 암시한다(Delitzsch, Neumann, Gesenius). ;

 


 

나. 넘쳐흐르는 강(47:3-5절)

 

  이제 안내자는 스며 나오는 물이 만드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1,000척씩 즉 약 450m식 거리를 재며 동쪽으로 나아가는 그는 에스겔로 하여금 매번 그물을 건너게 한다. 처음에 발목, 다음에 무릎, 그다음에 허리까지 오는 물이었다(3-4절)

 

  이 단락의 마지막 장면인 5절을 개혁한글에 기초해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가 1,000척을 척량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 왜냐하면 그 물이 깊었다. 헤엄칠 만한 물! 건너지지 못할 강!’

 

  5절에서 물의 변화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관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물을 ‘강’(305 나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졸졸 흘러나온 물이 이제는 ‘강’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강의 깊이에 대해 ‘건너다’라는 동사를 한 번은 능동태(‘내가 건너지 못할 강’)로, 또 한 번은 수동태(‘건너지지 못할 강’)로 사용해 물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강이 된 것이다.

 

  불어난 물의 양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3-4절의 묘사와 더불어 맨 처음 그 물의 근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조금씩 불어나더니, 마침내 큰 강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의 양의 변화는 에스겔이 보게 될 성전 너머 세상의 변화에 대한 환상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47:5절)라는 말씀은 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기적적으로 증가하여 이처럼 한길 이상되는 생수의 강으로 가득하게 된 사실은 여기서의 생수가 구원과 축복의 상징이란 점에서 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②. 강이 가져올 변화(47:6-12절)

 

가. 강가의 많은 나무를 봄(6-7절)

 

  성전 안내자는 물이 강으로 변함에 대해 이미 놀랐을 에스겔에게 목격한 것을 확인한다(‘보았느냐? 인자야’). 아직 놀라기에 이르다. 에스겔에게 보여줄 것이 더 있다. 이편 저편에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히네’(흔히 ‘보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놀람에 동참시킨다.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6절) - 여기서 이 말은 생수의 강의 가장자리 곧 ‘뚝 위로’란 뜻으로서 선지자가 그 물 속에서 세 번째 측량 때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그 물 속에서 네 번째 측량을 목격하고 다시 뚝 위로 올라온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Schroder, Hengstenberg). “나무가 심히 많더라”(47:7) 여기서 ‘많더라’(리브)는 원어상 ‘(양이나 질에 있어서)풍성한’이란 뜻으로 단지 나무의 많음을 말한다기보다는 나무와 함께 그 열매의 풍성함까지도 내포한 말이다(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축복으로서의 비옥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풍성한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8-12절)

 

  두 번째 부분은 그 강물이 가져올 풍성한 생명의  모습들에 대한 인도자의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강물은 요단 계곡을 지칭하는 듯한 ‘아라바’를 내려가 지금의 사해로 생각되는 ‘바다’의 물을 되살릴 것이다(8절).

 

  또한 이 강물은 바다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르는 모든 곳과 그 속의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을 살릴 것이다. 물고기도 심히 많아질 것이다. ‘되살아나다’( 라파, 이 동사가 수동형으로 쓰였을 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치료되다’)라는 동사는 8, 9절의 핵심 단어다.6) 이 강물은 치료와 회복을 의미한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물이 되살아나리라( 라파)는 ‘고치다’란 뜻인 바(왕하 2:22), 본 구절은 사해 곧 죽은 물이 성전에서 발원한 생수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9, 10절), 살아있는 물로 고침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상징적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을 옮기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암시한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여기서 ‘강물’( 나할)은 원어상 복수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혹자는 이를 그 강의 지류들이란 뜻으로 해석한다(Kliefoth). 그러나 이는 그 물의 창일함과 강한 흐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Hengstenberg, Delitzsch, Umbreit). 그러한 강의 강력함이 모든 죽음의 세력을 휩쓸어 버리고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다가 강을 흡수하는 현상과는 달리 그 생수의 강은 죽음의 바다(사해)로 들어간 후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변환시킨다.

 

  이 강은 자연 세계를 넘어 사람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엔게디’(‘염소의 샘’)와 ‘에네글라임’(‘두 송아지의 샘’)은 각각 사해의 서편과 동편 해안 지역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주변 지역들도 유익을 누리게 된다. 지중해를 의미하는 ‘큰 바다’처럼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사해에 많아지면 그것들을 잡고자 하는 어부들도 모여들 것이다.

 

  11절은 언뜻 보기에 강물의 능력의 한계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 강물의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더욱 적절하다.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즉 염분이 없어지거나 옅어져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제사와 생활에 소금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11절의 진술은 긍정적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번역보다 ‘소금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라는 번역이 긍정적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해 준다.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의 능력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관심은 6-7절에서 언급된 나무들로 다시 돌아간다. 그 대신에 이번엔 그 나무들과 열매와 잎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곁들이다. 생명을 주고 치유하는 강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그것이 자라게 한 나무의 열매와 잎조차 그런 강물의 능력을 여전히 소유할 것이다. 강물이 대단한 능력은 7, 9, 10절에서 강물이 만들어내는 각종 생명체들이 ‘심히 많다’라고 반복해 묘사된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12절에서 ‘그 물이 성소를 통해 나옴이라’는 진술은 모든 생명들의 변화의 근원이 성소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2). 다시 사람이 살게 될 땅(47:13-48:29)

 


 

①. 전체 땅의 외적 경계(47:13-23)

 

가. 땅 분배에 대한 원칙(47:13-14; 21-23절)

 

   땅의 분배하는 원칙에서 자주 나오는 ‘기업’이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동사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된 땅에서 살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옛 약속을 지키신 결과임을 보여준다. 14절의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라는 옛 약속에 대한 재확인은 이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공평하게 나누어’란 어느 한 편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분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나안 땅 분배에서 보여지듯이

 

단순히 땅 넓이가 동일하게 분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서로가  아무런 불만이 없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47:14) 이는 다음과 같은 삼중적 의미로 고찰해 볼 수 있다. (1) 여자적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고토로 귀환하여 그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되리란 의미, (2) 언약적 해석으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증표로 주신 약속의 땅이란 점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 대한 회복은 곧 그 동안 그들의 죄로 인해 파기되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새롭게 갱신된다는 의미, (3) 종말론적 해석으로 가나안 땅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의미(계 21:1) 등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이상적 시대의 원칙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이다. 22절에서 타국인에 대한 분깃이 부가적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타국인에 대한 기업의 할당은 모세의 율법(레 24:22;민 15:29), 이사야의 교훈(사 56:3-8), 에스겔의 초기 예언(14:7;22:7)과도 일치한다.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여기서 ‘타국인’( 게르)은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일반적인 이방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이방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더욱 분명 해진다.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 이 구절은 앞 주절을 수식한다. 이스라엘 중에서 자손을 낳음으로써 그 땅에 영구히 거주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같이 여기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이방인의 구별을 상쇄시키는 말이다. 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여호와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될 이방인들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구원 사역의 구심점이자 매개가 되는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평등하게 나눠 갖는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다. ‘기업’과 더불어 자주 나오는 단어인 ‘지파’와 그것을 사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표현은 남북 분열 왕국 이전에, 심지어 왕정 이전에 있었던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합의를 가진 것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아가던 타국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할 수 있었다(참고 레 22:18).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리가 있었는데, 곧 땅에 관한 것이다. 타국인들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이 한계는 그들로 하여금 ‘이등 시민’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이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런 보편성 혹은 포괄성이 원칙이 이상적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나. 땅의 사방 경계(15-20절)

 

  땅의 사방 경계의 특징들은 첫째,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땅의 최대 영역 혹은 좀 더 큰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특히 북쪽 경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본문은 ‘역사적 지리’가 아닌 ‘신학적 지리’로써 크기보다 여기에 나타난 경계들이 싸고 있는 곳(당연한 이야기 같지만)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땅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되고 빛바래지 않은 약속의 성취를 누리는 것이다.

 

  둘째, 요단강의 동쪽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겔 47:18절 ‘동쪽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 강이니....’). 역사적으로 요단강의 동쪽 지역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치지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에스겔의 신학적 약속의 땅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참고 수 22장) 혹은 소돔과의 관련(참고 창 13장)을 통해 요단 동편의 부정적 함의를 찾아내는 설명들은 설득력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단 동편은 원래 주어진 약속의 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외되었다는 설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조상들에게 약속한 전체의 맥락과 더 잘 어울린다. 즉 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회복하는 환상은 요단 동편을 포함하는 역사적 회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언약과 연관된 신학적-상징적 회복에 관한 것이다(비교 수 14-21장). 실제로 바빌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파로 유다 지파가 유일했다. 또한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물리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경계들로 이뤄진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살펴볼 동서로 반듯한 경계로 각 지파들에게 땅을 나눠 주는 것도 지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본문들을 신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