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7).여호와의 임재회복(에스겔서40-46장)

호리홀리 2015. 3. 26. 11:36

7).여호와의 임재회복(40-46장)

 


 

(1). 새로운 성전 회복(40-43장)

 

  유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유다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곧 그 날에”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22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 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 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한다(Hitzig, Rdak). 곧 이 속죄일은 희년에 이루어질 자유와 회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속죄가 행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 구절에 특정하게 제시된 ‘그 날’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날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신다. 여기서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40:2절) 여기서 ‘매우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에스겔은 그곳 높은 산에서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다. 또한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하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성읍 입구에서 환상 중에 에스겔에게 말한 내용도 언약 백성의 회복에 관한 내용이다. ‘인자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모든 것들을 네 눈으로 자세히 주목하고 또 네 귀로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라. 이것이 바로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라’(4절).

 

  4절에는 네 개의 중요한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너는 보라’(레에), ‘너는 들으라’(쉐마), ‘그리고 너는 두라’(붸심), ‘는 말하라’(학게드). 이 단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장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은 죄를 범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을 재확인하며 구원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이스라엘 땅의 지극히 높은 한 산은 언약의 시온산이며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은 예루살렘 성이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회복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 회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 성읍과 새 성전의 환상은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 준다. 또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야 비로소 회복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환상중에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본다.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 막대기로 재어 본 결과, 그 담의 두께와 높이는 척량 막대기 하나 정도(약 3.2m)였다. 또 제단을 지나 문의 입구를 척량하고 문지기들의 방도 재었다. 그리고 성전을 향하는 출입문의 현관도 재었다. 동쪽 문 안쪽에 크기가 같은 작은 방 세 개가 있고 그 방들의 크기도 재었다. 천사는 계속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가서 각각 그 문들과 주변 방들을 척량했다. 남쪽으로 난 문과 북쪽으로 난 문의 크기는 같고 주변의 방이나 창문의 크기도 같다. 이렇게 척량하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성전의 회복이 반드시 이뤄짐을 의미한다. 성전의 회복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그림자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지금 에스겔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성전의 동쪽, 북쪽, 남쪽으로 난 문들을 척량하는 모습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실제로 성전의 회복을 의미한다.  새 성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영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 곧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 제도의 회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에스겔은 40-42장에서 성읍과 성전의 구조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43장부터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탐사를 마친 에스겔은 지금 바깥뜰에 있는데, 곧 동문 쪽으로 간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43:1).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43:2절) 본 구절은 성전의 구조적 측량에 이어 19년 전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그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 (10:18-22;11:22-24)이 그 동문을 통해 다시 완성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5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의 회귀는 모세의 성막 봉헌식(출 40:33, 34)과 솔로몬 성전 봉헌식(왕상 8:11) 당시에도 보여진 바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새롭게 갱신된 교체의 회복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곧 성전 완공의 마지막 단계인 성전 봉헌식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Delitzsch). 에스겔도 성령에 이끌려 안뜰로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 찬 것을 보고(43:5), 거기서 성전과 동문 사이에 있는 제단을 보며(43:13-27)바깥뜰로 나온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43:7)는 말씀은 선재적으로 성취된 에스겔 성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구절이다. ‘내 보좌의 처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핵심이 되는 곳을, ‘내 발을 두는 처소’는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는 곳을,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시는 곳이란 의미를 각각 내포한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내 보좌 의 처소’와 ‘내 발을 두는 처소’(나의 발등 상-시 132:7;사 60:13;66:1)는 모두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다(출 25:22;삼상 4:4;대상 28:2;시 132:7, 8). 여기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영원함( 레올람)의 적용 여부에 따른 것이며 (37:26, 28) 에스겔 성전의 영원성과 완전함을 암시한다. 곧 이전 성전에서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에스겔 성전의 완성 때인 메시야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필요치 않다는 점,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을’,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을 상징한다는 점(사 66:1;마 5:35)에서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므낫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고 우상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문에 우상을 세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8:5). 이런 망령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귀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짐케 하신다. 지금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모든 행위들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케 하신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영원토록 그들이 가운데 거하리라”(9절)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알려 주고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법을 철저히 준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11절). 하나님은 성전에서 행해야 할 일들 즉 제사와 관련된 규정뿐 아니라, 성전의 규모와 모양 그리고 성전 안에 있는 여러 물품들의 규격과 모양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기를 원하신다.

 


 

(2) 새로운 예배 회복(44장)

 

  44:4절에서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혹자는 이를 성벽에 위치한 바깥 북문으로 이해하나(Kliefoth) 43:5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안뜰로 제시된 점과 안 북문이 바깥 북문보다 약 4철이 더 높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선지자가 직접 그 영광의 현현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안쪽 북문임이 분명하다(Delitzsch, Schroder, Hitzig).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을 재삼 언급한 것은 이하 전개될 내용에 비추어 함부로 근접 할 수 없는 새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Delitz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