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6)애굽심판(에스겔서29장~32장)

호리홀리 2015. 3. 25. 12:46

6) 상한 팔과  꺾인 팔(29-32장)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위는 심판의 도구로 세워진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의 최대 강적인 애굽에 임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열방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이시며 열방의 하나님(God of nations))이심이시다. 따라서 애굽도 심판하신다.

 

  에스겔서는 일곱 개의 애굽 언약이 주전 587-571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두로의 함락(주전 571년)과 관련된 제2언약을 제외하고 모든 언약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포위당하고(주전 588년) 함락된(주전 586년 7월) 주전 587년-585년 사이에 예고 되었다. 애굽은 신왕국 시대(주전 1580-708년)이후 기울기 시작한 세팃 왕조(주전 663-525년)의 두 번째 왕 느고(주전 609-594년)가 므깃도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아 왕을 죽이고 잠시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지만, 주전 605년 유프라테스 강가 갈그미스 전쟁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해 애굽으로 후퇴한다(렘 46:2; 대하 35:20) 그 후 느고 왕의 손자 호프라(주전 588-560년)가 잠시 시드기야를 도와 유다에 영향을 미쳤지만(렘 37:5-7), 주전 566년에 그의 후계자 아마시스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애굽은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주변 세력으로 존속하다가 알렉산더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다.

 


 

제1예언(29:1-16)

 

  바로왕이 저주를 받을 것이고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애굽은 지정학적, 신앙적 여러 요소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애굽으로 내려가(창 12:10), 그곳에서 광야 네게브를 거쳐(창 13:1), 가나안 헤브론으로 재 진입했다(창 13:18). 나중에 이스라엘도 족장 아브라함의 길과 유사한 지리적 병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 잠시 번영을 누렸지만 끝내 노예가 되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 그런 여정에서 애굽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명예와 안전에 위협을 받았던 곳이며,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곳으로써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애굽은 죄악 된 곳이고 심판의 대상이며(사 19-20장), 영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비교된다(계 11:8).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눈에 가증한 우상 숭배를 배웠다(20:7).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통한 그들의 신음은 깊은 고통을 대변한다(출3:7; 6:5).

 

  그 반면에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된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기근을 면하고 번식하며 창성해 심히 강대해졌다(출 1:7). 애굽은 나일강의 규칙적인 수량과 안정된 자연 환경으로 인해 먹을 것이 비교적 풍부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과거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출 16:3)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애굽은 한 때 고대 근동의 문명을 지배하던 나라였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번영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대제국이었다. 또한 출애굽 과정을 통해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왕과 애굽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예고 받는다. 애굽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칼로 끊어질 것이고(29:8절), 믹돌에서 수에네까지(29:10절)1) 애굽의 모든 영토가 40년 동안 황폐해지고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9:8-16). 이는 바빌론 제국이 바사에 의해 정복당한 때로 고레스에 의해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약 40여 년의 세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심판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바로의 교만함 때문이다(29:3-5). 바로는 애굽의 번영을 상징하는 나일강을 스스로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29:3, 9)라고 말한다. 그러고 바로는 나일강의 생태계를 지배하는 ‘큰 악어’로 표시된다. 그러나 그는 그 강들 중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애굽 백성들을 반영하는 강의 풍요로운 어류들은 갈고리에 꿰어 마른 땅에 던져져 들짐승과 공중 새들의 식물로 주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나일강의 이점을 의지하며 교만했던 바로와 그 백성들은 그곳에서 추방될 것이다.

 


 

  둘째,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이 기댈 때마다 나일강에 쉽게 부러지는 갈대 지팡이와 같이 이기적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여러번 동맹을 맺었으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애굽에게 배신을 당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시드기야 시대의 유다는 갈대 같은 애굽과의 동맹 때문에 온 백성이 치명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기 위한 약속과 갈대 같은 강대국들과의 동맹이 어떤 심판을 초래하는 지를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제2예언(29:17~21)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을 정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애굽뿐 아니라 두로도 심판하셨다(26:1-28:19). 느부갓네살 왕과 바빌론 군대는 섬이었던 두로를 육지에서 공격하기 위해 13년 동안 제방 공사를 벌이면서 흙과 돌들을 나르느라고 머리털과 어깨가 벗겨지는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대에 부응하는 전리품들을 얻지 못했다(18절).

 

  두로는 그 시대에 국제적 주요 금융국가로써 그를 정복하면 큰 보수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보화의 대부분은 멀리 배로 운송된 상태였다. 여기서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섭리에 따라 수행한 바빌론 왕과 그의 군대에게 애굽의 전리품으로 보상하실 것임을 밝힌다(29:19-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 백성뿐 아니라 바빌론도 그분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나중에 바빌론이 심판을 받을 때 바사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사 45:1-8). 에스겔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 선택은 뿔로 상징된 언약 백성의 힘을 키워 주고 에스겔의 말씀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도구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그 도구들을 사용하고 규제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심판의 궁극적인 기준은 도구(바빌론이나 바사의 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공의와 섭리에 있는 것이다.

 


 

제3예언(30:1-19)

 

  언약 백성(유대인들)을 포함해 애굽과 동맹한 모든 종족들이 심판받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애굽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그 칼에 의해 전멸된다. 나일강을 따라 펼쳐진 옥토를 박탈당할 것이고, 애굽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멤피스의 우상들이 파괴될 것이며, 신으로 여겨졌던 애굽의 왕자들이 끊어질 것이고, 애굽의 요새로 유명한 신과 한때 북쪽 수도였던 바드로스가 함락될 것이며, 애굽의 최대 신들인 태양 신과 고양이의 모습을 한 여신의 신전이 있던 아웬과 비메셋에서 풍요를 누리던 젊은이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권력 구조뿐 아니라 종교 제도까지 모든 것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6:18절은 종말론적 심판을 묘사함으로써2) 그 응징성의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두 번째로는 애굽을 붙들어 주던 모든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본문에는 여섯 그룹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그룹들은 아마 애굽 원정에 용병을 제공했던 동맹국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굽과 함께 느부갓네살 왕의 칼에 엎드려질 것이다. 창세기 10:6 계보에 의하면, 구스와 붓(38:5; 렘 46:9)은 애굽 및 가나안과 함께 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때 애굽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속하기도 했다.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하면, 룻(27:10)과 굽(단 11:43)도 애굽에 용병을 지원했다. “모든 섞인 백성”은 아마 아랍인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출 12:38; 렘 50:37).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이해하기 힘든 그룹은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다’이다. 히브리어 ‘브네에렛츠 하브리트’ ‘언약 땅의 백성들’로써, 이는 애굽에 거주 하던 유대인들보다 애굽 왕과 동맹을 맺은 유대 용병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이 그룹들은 애굽이 강성해지고 교만해지는데 동참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행한 한 개인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모든 자들을 포함한다는 경보를 울리고 있다.

 


 

제4예언(20:20-26)

 

  바로왕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일 것이다. 본문은 애굽 왕의 팔이 칼을 잡지 못할 정도로 점진적으로 꺾이는(21절) 반면에, 바빌론 왕의 팔은 견고하게 되어 칼을 잡고 애굽을 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30:24-25). 바로는 이미 꺾인 팔을 싸매지도, 약을 바르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마 이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바빌론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주전 588년)에서 실패해 타격을 입은 그의 약화된 군사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3) 이런 바로의 파멸은 그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이면서 완전히 와해된다.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은 바로의 호프라 왕의 말년 생활을 잘 반영한다. 호프라 왕(주전 588-560년)은 통치 초기에 유능한 행정력과 군사력으로 구브로와 시돈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리비아를 돕기 위한 원정에서 헬라인들에게 크게 패배함으로써 내란을 겪게 된다.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기 위해 그의 부하 마라시스를 파견하지만, 오히려 애굽 병사들은 아마시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격을 가해 호프라는 부분적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상부 애굽으로 밀려나 나머지 애굽 지역의 통치권을 아마시스에게 빼앗긴다. 이런 중앙 집권력과 군사력의 약화는 호프라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잘 나타낸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이 틈을 타서 마마시스를 대리인으로 삼고 애굽의 전리품을 챙겨 귀국하게 된다. 마침내 애굽은 내분으로 인해 열국 중에 흩어지고 열방 중에 헤쳐졌으며, 바빌론 왕 앞에서 고통 하기를 상한 자가 고통 하듯이 하게 된다. 이는 애굽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던 유다의 기대를 억누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열방이 증언케 한다. 바로의 호프라 왕은 팔레스타인과 리비아 원정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교만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민중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끝내 반란으로 나타난 그들의 목소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아직도 그의 한 팔이 성했을 때 그가 회개했더라면 심판의 진노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의 팔은 점진적으로 꺾이기 시작하고 남은 성한 팔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가 의지하던 전략과 군사력은 지극히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또한 유다는 이미 꺾인 팔을 가진 애굽을 의지하며 바빌론의 점령을 모면하려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제5예언(31:1-18)

 

  예표로써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의 멸망은 애굽을 누구와 비교할 것인가?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옛 앗수르 제국이다. 이는 영광스러웠던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이미 파멸된 앗수르 제국이 애굽의 과거와 미래를 비춰 주기 때문이다. 또한 느부갓네살 왕은 앗수르 제국을 진멸시킨 자로서(주전 609년) 20년 후에 애굽마저 정복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 앗수르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았다. 대체로 메마르고 사막화된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은 헤브론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그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한 물로 인해 푸른 숲을 이뤘으며 각종 조류와 동물의 생태계를 이뤘다. 특히 강을 따라 25m나 높이 솟아 있던 백향목들은 레바논의 아름다움과 부를 창출해 주었다.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옛 앗수르 왕이 언급되며 그는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았다. 그런 백향목의 그늘 아래 모든 큰 나라가 거하였고, 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며 그 나무가 크고 아름다우며 가지가 길어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이 못하였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동산’이란 인간적인 위대함이 모두 모인 곳이며 이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람도 앗수르 왕의 권세와 위엄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 왕이 파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교만한 마음이 구름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는 애굽 왕이 교만했던 것과 유사하다. 본문 후반부는 결국 열국의 능한 자와 열국의 강포한 다른 민족으로 묘사된 바빌론에 의해 그 백향목이 찍힐 것을 예고한다. 그러면 생태계의 풍요로움과 그늘 아래 거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며, 앗수르의 팔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음부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들도 유사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앗수르는 영토의 크기와 정치적 세력에서 애굽을 능가했던 대제국이었다. 레바논의 물과 숲과 동물로 상징되던 풍부한 자원과 고대사에서 가장 잔인했던 것으로 알려진 강한 군사력과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이웃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교만과 만연한 악행 그리고 동맹 관계의 상실은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고 말았다. 불행한 점은 이미 역사 속에서 그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한 애굽의 파멸이었다.

 


 

제6예언(32:1-16)

 

  바로에 대한 애가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절). 바로는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젊은 사자와 강을 난폭하게 더럽히는 큰 악어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바로의 종말은 하나님의 징벌로 완전히 끝이 난다. 그렇게 강대했던 애굽의 파멸을 보고 열방은 두려워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왕이라는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애굽 전체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열국 여자들은 애굽과 모든 무리를 위해 애가를 부를 것이다

 


 

제7예언(32:17-32)

 

    본문은 강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곧 파멸할 애굽과 모든 나라들의 무덤 옆에서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은 에스겔의 애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 무덤 깊은 곳에는 생존하던 세상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가 있고, 군사력을 자랑했던 엘람이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며, 메섹과 두발과 모든 무리들이 세상을 두렵게 했던 병기를 가지고 음부에 내려가 자신의 칼을 베개 삼고, 강성했던 에돔과 시돈 사람들도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육당한 자들과 함께 그 구덩이에 내려가 수욕을 당하고 있다.

 


 

  애굽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전개되며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어떻게 이뤄 가시는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도덕성을 배제한 번영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교만은 한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 비참하고 치명적인 파멸을 초래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을 통해 경고와 회개의 기회를 미리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