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4)심판과 회복(에스겔서12장~24장)

호리홀리 2015. 3. 25. 12:41

4)심판과 회복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려질 심판(12-15장)-비유로 예언한다

 

  12-15장은 크게 두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이고(12-14장), 둘째는 비유와 표상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써(15장) 이스라엘은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첫 비유이다.

 


 

(1) 포로가 될 것을 나타내는 행위 메시지(12장)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는 이사 가는 것(3-5)과 공포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17-20)이다. 짐을 싸서 배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2). 이미 이사야 6:9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유배라는 것이다.

 

  10절의 왕은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는 밤에 어깨에 짐을 지고 나갈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위해 벽을 뚫지만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붙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실제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치다 체포된다. 그리고 보는 데서 두 아들이 칼에 맞아 죽고 자신은 두 눈을 뽑힌채로 끌려가다가 죽는다. 도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16절에서 희망을 보여 주신다. 그 때 사람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말뚝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잘못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행위 메시지는 황폐한 땅에 남아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거짓 예언자의 종말(13장)

 

  거짓 선지자들이 성의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 않았다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의 파멸된 영적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 진단해 보지도 않고 그들을 바르게 고치거나 인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된 것을 진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거짓된 말로 속이고 헛된 길로 가도록 미혹했으며,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하나님을 떠나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바로 이러한 죄악들을 범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다(5-8).

 


 

(3)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14장)

 

  다른 신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뿐이라는 신앙 고백을 요구하신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하나님 백성의 명단에서 제하신다고 언급한다(8). 거짓 예언자에게도(9-11) 심판하신다. 심판은 양식이 떨어져 굶주림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의인(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할지라도 그 의인만 심판을 면할 것이다.(12-14).

 


 

(4) 쓸모없는 포도나무

 

  15장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글이다. 포도나무의 소명은 열매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없고 오직 땔감으로 아궁이에 들어갈 뿐이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사5:1-7, 렘2:21, 겔17:6, 호10:1, 시80:9-17, 마20:1, 요15장에 나온다.

 

  1-8절은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비유한다.(호10:1) 에스겔은 2-5절에서 그림언어로 6-8절은 그 뜻을 설명한다. 즉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어 아궁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포도나무만 화목으로 쓰시는 것이 아니다 그 땅까지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울 정도로 내려치고 있지만 그 속에서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

 


 

(5) 영원한 언약(16장)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은유적으로 말씀을 선포한다.(사5:1, 렘47:6, 암5:19)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부정한 태생임을 선언한다. 즉 예루살렘이 태어난 곳은 가나안이고 그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 모두 가나안 7족속이며 음란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거룩한 다윗의 도성으로 만드셨다. 예루살렘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윗은 가나안 땅을 200년 동안 차지하지 못한 성을 정복한다.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출생은 우상의 산지인데 화려하게 만들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배지역의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로 모압언약을 강조했다면 에스겔은 사독계열의 제사장으로서 다윗언약을 강조한다. 성경은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부스족에게 속해있던 예루살렘을 택하신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버려진 아기를 양육하셔서 아름다운 왕비로 만드셨다. 존귀한 자가 되어 이방에까지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행음하여(언약파기) 창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루살렘을 택하시고 성전을 세우신 것은 신명기 말씀대로 국가의 중앙 성소로서의 기능이다. 광야에서 성소가 진의 중앙에 자리한 것같이 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산당을 꾸미고 그곳에서 음행한다(16). 더구나 이방 종교를 받아들여 자녀를 재물로 드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분노케 한다.(26) 북쪽의 호세아왕도 앗수르의 침략에 이집트를 의지했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음란이라고 지적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까지 끌어들여 섬겼다. 이 모든 행위는 돈을 받고 음행하는 것보다 그들은 돈을 주고 음행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북쪽의 마지막 왕 호세아왕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리고 시드기야도 마지막까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한다. 언약 백성들을 혼란하게 한 죄다. 이는 죽은 우상이다. 힘이 없는 것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다시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16:60절).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깨닫게 해서 다시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새 하늘과 새 땅)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조건적이 아닌 회개를 전재로 하는 용서와 회복이다.

 


 

(6)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17장)

 

  17장은 독수리와 두 나무 비유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행위를 묘사한다. 유다왕국은 요시야(주전639-609)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비참함을 피하게 해 준 것이다. 이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를 끝으로 망하고 망한다. 이런 배경으로 15절,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유다가 이집트의 왕에게 외교사절단을 보낸 시점에 선포된 예언이다.

 

  1-2절은 도입부로 17장 전체의 서론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수수께끼(히다)와 비유(마샬)로 말하라 명하신다. 예언의 이중적구조이다. 수수께끼와 비유는 평행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이중적 구조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독수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힘세고 재빠르며 적대적인 정복자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나무의 왕으로 일컫는다.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 교역의 땅(가나안)상인들의 도시에 둔 것은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포로로 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독수리는 그 땅의 씨앗을 가져다가 물 많은 종자의 땅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서 독수리의 보호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아 유다를 다스리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유다의 두 왕은 백향목과 포도나무로 나오는데 이것은 시드기야가 여호야긴에서 스룹바벨로 이어지는 합법적인 왕조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7-10절은 포도나무의 배반과 그 결과가 서술된다. 여기의 다른 독수리는 애굽의 왕을 가리킨다.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는 독수리 아래 머물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했다. 즉 바벨론왕의 영향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독수리를 배반한다. 즉 느브갓네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다. 이것은 당시를 기준으로 100년 전 이사야 때와 같고 따라서 에스겔도  책망한다. 하여 포도나무에 대한 심판은 당연하다.

 

  9-10절의 심판은 이중으로 진행된다. 독수리가 포도나무의 뿌리를 뽑아 마르게 하며 또 동풍이 그 나무를 마르게 한다. 유다의 멸망은 언약파기에 있음을 계속 반복 경고한다.

 

  19-21절에서 바벨론 왕과의 언약파기는 ‘내 언약’ ‘내 맹세’를 깨트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언약이기에 깨트린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파기이며 멸망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7) 실패의 역사와 회복(20장)

 

  15-19장은 비유였으나 20장에서는 실제적사실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패역과 배교로 인한 실패의 역사임을 묘사한다. 그들의 패역은 불순종으로 나타났으며 배교는 우상숭배를 뜻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포로시대와 회복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시며(의인 삼아주심)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지 못하고 징계를 받게 된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패역(마라)을 계속 반복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반역이 고질적이고 지속적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실패는 광야에서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며 포로 징계 후에도 계속된다. 하여 하나님은 장로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37절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징계는 있으나 언약은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 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8) 여호와 칼에 비유된 심판(21장)

 

  예루살렘 심판의 상징, 마광된 칼을 갈고 계시는 하나님: (그칼이 바벨론이였다. 19절 바벨론 왕이 두 길 사이에서 점을 친다. 암몬 랍바와 유다의 예루살렘 길 사이에서=이들의 점은 짐승을 잡아 활에 묻혀 통에 넣고 어디로 갈까 해서 활이 넘어지는 곳으로 간다. 하나님이 현장을 목격하게 한 것을 받아 쓰고 있다.) (21-24)

 


 

(9) 피의 도성 예루살렘(22장)

 

  도성과 그 거민들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규탄하고 있다. 백성들이 부모를 업신여기고, 나그네 고아, 과부를 학대하며, 성물과 안식일을 범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으며, 부모와 동침, 이웃의 아내와 며느리, 딸을 범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피를 흘리며, 고리대금을 받고, 토색하며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지도자들은 약탈하는 이리 같이 권세를 가지고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며, 선지자는 사자가 식물을 움키듯, 허탄한 이상을 보고, 거짓 복술 행하며, 하나님께서 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사람의 영혼을 삼키며, 재물과 보물을 탈취하고, 과부를 많게 만든다. 제사장은 율법을 무시하며, 성물을 더럽히고,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분별하지 않고, 안식일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받으시게 한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데 주민을 이방 사람들 속에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뿌려서, 더러운 것을 소멸시키겠다고 언급 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지도층의 죄악상으로 분노가 치솟아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키겠다고 한다.

 


 

(10)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23장)

 

오홀라(북 이스라엘)는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본 동생 오홀리바(유다)는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다시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11) 씻어도 소용없는 솥 예루살렘(24장)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고한 대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주전588년 1월이다. 에스겔은 이 사건을 끓는 가마로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족속에게 이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신다.(3) 예루살렘을 가마로 비유하고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을 양고기로 비유한다. 침략자들은 양고기를 요리해서 먹을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거기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녹슨 가마가 첨부된다. 녹슨 가마는 녹을 없애지 않은 가마로서 패역한 백성들을 가리킨다. 바벨론 군대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살상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마의 녹을 제거하려 계속 애쓰지만 녹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가마가 깨끗해야 하나님의 진노는 그친다.

 

  예루살렘 멸망을 선언한다. 이제 하나님은 극단의 조치를 행위 메시지로 취하시는데 에스겔의 아내를 죽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 예언은 아침에 선포되고 저녁에 아내가 죽는다. 네 눈의 기쁨인 아내를 빼앗을 것이나 곡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지만 이 일로 인해 슬퍼하지도 못하고 눈물도 흘리지 못한다.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 하나님의 마음의 표징이라고 하신다(24). 백성들은 에스겔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외면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에스겔의 아내는 예루살렘을 비유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애도하지 않는 지금 포로 된 백성들, 그들의 완악함, 하나님은 에스겔의 가정까지 파괴하심으로 선지자를 사용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에스겔의 메시지에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죽음과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를 보고서야 믿을 것이다(27). 이제 에스겔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고통은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