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7.고립된 민족

호리홀리 2015. 3. 17. 13:42

7.고립된 민족

 

 

구약 성경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실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립 내지 격리이다.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그가 태어나 자랐던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고 명하신 일은 달리 보면 아브라함을 그의 혈연 및 지연적 뿌리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새로운 삶의 과정에 들어간다. 그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독특한 삶의 자세 때문에 자칫 희생이 될 뻔했던 위기를 겪은 바 있으며 (창세기 22장),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조처를 기다려야만 했다 (창세기 24장; 25:20). '들에서 배회하는' (창24:65) 이삭의 모습은 그의 고독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야곱의 일생 역시 그의 고립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쌍둥이 형 에서와의 마찰로 사랑하던 부모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야곱, '에서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만 외삼촌 집에 피하여 있으면 곧 사람을 보내어 야곱을 불러 오겠다'(창27:44-45)는 어머니 리브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험한 세월을 객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뿐이던가? 딸 디나의 일로 주변 거민들을 더욱 경계하며 살아야만 했던 일 (창세기 34장), 더 나아가서 야곱은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마저 잃게 되어 그의 슬픔과 고독은 극에 달하게 된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창37:35). 그는 자그마치 20년동안 요셉이 죽었다고 믿으면서 속아살게 된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요셉의 삶 역시 고독의 과정을 보여준다. 열 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 먼 타국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요셉, 애매한 누명으로 인한 수년간의 감옥 생활 등은 그의 고독과 고난을 잘 설명해준다. 요셉은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이집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얻은 다음에야 고의 고독을 어느 정도 삭힐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첫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불렀던 것이다 (창41:51). 하지만 그의 고독은 잠시 잊혀졌을 뿐이지, 영원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죽음에 임박하여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친족들의 다짐을 받은 것이었다 (창50:25).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으로 민족다운 형태를 이룬 것은 그들이 모세의 영도하에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집트에서 약속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길'이라고 불렸던 시나이 반도 북쪽 지중해변의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출13:17-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민족과 접촉하여 충돌(전쟁)하기 전에, 그들을 별도로 고립된 장소에 모아서 특별한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민족의 영웅 모세의 개인적인 생애에 있어서 일정기간 미디안 광야 생활이 필요했던 것처럼 (행7:23, 29-30; 출7:7), 이스라엘 자손 역시 40년의 광야 생활은 그들이 하나의 선민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필연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사람 (신23:4) 발람은 모압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광야에 진을 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러 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입에 주시는 말씀 외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말대로,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고 하였다 (민23:9). 어찌보면 발람의 이 예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한 마디로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준 표현이라고 하겠다.

 

발람이 지적한 바, 이스라엘 민족의 고립성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 곧 유대인의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서도 잘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구 위 어디를 가든지 현지에 사는 족속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겉으로는 어느 사회에든지 잘 적응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도 오르고 웬만한 경제력도 갖추는 것 같지만, 내면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철저히 타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종교 전통과 문화 유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유대인의 특성이라고 하겠다.

 

소수 민족으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 다수 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할 때 간혹 생기는 불행한 일이 바로 미움과 질시와 더 나아가서는 핍박 및 민족의 집단 학살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처럼 이러한 비극을 강도깊게 당한 다른 민족이 없다는 사실은 바로 이웃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영위해나가는 그들의 근성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대인의 고립성은 어느정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어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변 이방 민족의 삶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지켜 행할 율법을 주신다. 하나님은 당시 우상 숭배가 만연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던 세대에 이스라엘 자손을 택하셔서 따로 불러 내시고 그들에게 독특한 율법을 주시어서 주위의 타민족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하신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야웨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는 명령은 비단 광야 생활을 다룬 레위기의 주제일 뿐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심도깊게 흐르는 주요 사상중의 하나이다. 후기 왕국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형식에만 치우친 '거룩함'을 신랄하게 비난하신다. 하루하루의 삶에 아무런 반영없이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종교화된 '거룩함'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거룩함'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외식, 가증'이라는 것이었다.

 

지난 2000년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통하여 주위 민족들에게 색다른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좋건 나쁘건 간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대인은 지상 어느 민족보다 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소유하며, 타민족의 구설수나 미움의 대상으로서 쉽게 오르내림을 보게 된다. 오죽하면 일찍부터 '반유대 감정'이라는 표현이 서구 사회에 퍼졌겠는가.

 

유대인 역사의 독특성은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공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정한 사실임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까지 '열방 중의 하나로 간주되지 아니하고 홀로 처하는' 민족으로 남을 것이다. 유대인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격리시킨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기에 그들의 독특성이나 모남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기분나뿐 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을 열방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시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다시금 그들을 부르시고 모으셔서 그들을 위한 대대적인 구원 작업을 펼침으로써 또 한 번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기에 발람은 고백하기를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하였다 (민23:10).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야웨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