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6.시온으로

호리홀리 2015. 3. 17. 13:40

6.시온으로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다. 언어를 통하여 의사 소통을 하고 언어를 통하여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지적 및 정신적 보고를 후대에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말을 입 밖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일찍이 문자 언어의 발명과 또한 오늘날 각종 인쇄술 및 대중 전달 매개체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언어는 거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사는 우리 인간은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에게든 또는 남에게든 많은 약속을 발설한다. 말하는 것이 결코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많은 약속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실천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의하며 때때로 큰 수고가 따르는 것이기에, 쉽게 이행되지 아니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옛날에 야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굳게 약속하시기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약속은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가나안 땅,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도 묘사된 이 땅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은 그 시행 과정에 있어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무능력이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이 약속에 있어서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반역에 의하여 초래된 위기들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던중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경우들을 성경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 두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경우는 출애굽기 32-34장 사이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마침내 모세를 보내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로 끌어내시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지켜 행할 율법을 주신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40일 40야 동안 (출24:18) 율법을 받는 동안 산 아래 진을 치고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아론에게 압력을 가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애굽 땅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숭배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촉발한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깨질 뻔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대노하신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32:9-10).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 야곱과 세우신 언약을 허물어 버리시고 모세와 단독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이 위기는 마치 모세의 간곡한 호소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모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 묘사되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야웨께 구하여 가로되, 야웨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으로 이르기를 야웨가 화를 내려 그 백성으로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웨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2:11-14).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두번째 사건은 민수기 13-14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이 경우 역시 위의 사건과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바란 광야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 정탐군의 보고가 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울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거인들이 산다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이들 회중과 열 두 명 중 열 정탐군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중은 정탐에 참여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과 좌절에 사로잡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그들을 돌로 치려고 든다.

 

이때 야웨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어느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민14:11-12).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이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 위기 역시,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마치 모세의 간곡한 호소와 중재로 그 해결을 보게 되는 인상을 준다.

 

위의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불신과 반역 때문에 폐기될 뻔 했던 위기를 잘 보여준다. 두 위기 공히 모세라고 하는 중재자에 의하여 무마된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묘사된 사람으로서 (민12:3),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나의 온 집에 충성되다"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었다 (민12:7).

 

결과적으로 위의 두 위기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깨지 못하였다. 모세의 간곡한 중재와, 그리고 모세가 호소했던 하나님의 '인자의 광대하심' (민14:19) 때문에 언약이 새롭게 갱신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죄 때문에 취소될 가능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중재자의 간곡한 호소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를 모면하게 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자비 못지 않게 하늘에 높아서, 반역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 40년 생활을 통하여 하나 둘 썩어져 자기들의 출처인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와 그에 잇따른 사건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재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의 약속이 결코 변개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메시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 곧 구원(롬11:26)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곧 오늘날의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메시야의 도래와 메시야 왕국의 건설을 위하여 선정되고 예비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그들 중에 오셨을 때, 일부 유대인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부인함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일부 이방 기독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가 이미 끝났고 교회가 유대인의 임무를 완전히 대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주장 속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은 사실이나, 이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구약 박물관'의 소장품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100% 옳은 것일까?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 운운하며,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를 구속사적 의미에서 아예 무시하는 이들의 주장이 어찌보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던 유대인에 대한 은근한 질투와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일찍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손 뿐 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은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중에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12:2-3).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더 나아가서 그의 자손 유대인을 택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날 불신의 유대인을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은 항상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점을 통하여 굳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뚜렷하게 금긋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선택의 단절 운운하는 것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 구태여 유대인의 존재를 강조해야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유행하는 이러한 그릇된 풍조 때문이다. 과거 이스라엘 자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백성의 불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행하셨던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또한 메시야 예수님을 불신하고 거스리는 이 백성 유대인을 끝내 구원하시고야 말 것이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3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