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3.약속의 땅을 향하여

호리홀리 2015. 3. 17. 13:34

3.약속의 땅을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맨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였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오늘날 유대인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증오하는 아랍인들중 일부의 조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쟁의 위험이 가장 짙다고 하는 중동, 이곳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어 사는 곳이다.

 

아브라함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대략 사천년전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 부근에 위치했던 갈대아 땅 우르라는 커다란 도시에 살고 있었다. 비록 사천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긴 하지만 우르는 오늘날의 도시 못지 않게 번영하였다. 각종 상업 활동도 빈번하였거니와 문화 정치 활동도 활발하였다. 또 도시마다 따르는 도덕적 부패 문제도 심각하였다. 이 도시에 가득하였던 각종 우상 신은 시민의 도덕적 수준을 높혀 주기는 커녕 오히려 죄악의 심층화를 부채질해줄 뿐이었다.

 

청년 아브라함은 일찍부터 야웨 하나님을 섬겼다. 그가 어떤 동기로 야웨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우상 숭배자인 아버지와 (수24:2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늘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 데라는 노년에 결국 아들의 입장을 따라 야웨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것 같다. 데라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떠난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데라는 가나안 땅에는 발을 들여 넣지 못하고 결국 중도에 하란에서 그의 일생을 마치고 만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무런 불평 없이 길을 떠난다. 당시 그의 여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 걷는 것이 아니면 겨우 낙타, 당나귀, 말 따위의 탈 짐승에 의존해야 했던 장거리 여행, 게다가 모든 소유물을 끌고 다녀야 하는 그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기나긴 여정이 도시인으로서의 생활 양식을 버리고 보다 원시적인 유목민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을지라도 그는 한 마디 불만의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야웨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가라고 한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에는 비록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같은 큰 도시는 없었으나, 그런대로 큼직한 성읍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생업은 농업을 주로 하되, 목축업과 약간의 상업 활동이 가미되었다. 우상 숭배 문제는 우르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까? 결코 답하기 쉬운 물음인 것 같지는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그곳서 결코 주인으로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아내의 시신을 묻고자 땅을 사야만 했던 아브라함, 본주민들과의 마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 아브라함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그는 일정한 곳에 집을 짓고 상주한 일도 없었다. 도시 출신인 그에게 천막 생활이란 결코 달콤한 낭만이 될 수도 없었다.

 

야웨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발적으로 그와 맺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코 가나안 땅을 이상향으로 생각해 본일도 없거니와, 이유를 막론하고 그곳으로 이주해 올 생각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가나안 땅은 갈대아 우르의 청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정하셨다. 그가 앞으로 전개하실 중대한 역사의 중심지로 가나안 땅을 내정하신 것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사천년에 걸쳐 이 땅에서 또는 이 땅을 중심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찌 아브라함이 상상이라도 하였으랴마는, 그는 단순히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위대한 역사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대하20:7; 사41:8), 또는 '하나님의 선지자'(창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라는 칭호로 불리기에 적절한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그의 지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수 만리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 내어 머나먼 약속의 땅으로 떠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지정학적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요, 동시에 과거 근동 역사에 있어서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 양대 강대국이 늘 충돌하던 지점이기도 하였다. 기후 및 지형적인 면에서 볼 때, 인위적인 노력으로 나일강 물을 관개하여 농사짓던 평지의 이집트와는 달리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의 복합체로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역이었다. 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그 목줄을 쥐고 있는 땅인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는 자기 백성을 훈련하시고자 일부러 이런 장소를 택하였을 법하다.

 

사천년전 아브라함을 이땅으로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다시 그의 후손을 이곳으로 이끌어 들이고 계시다. 유대인, 곧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듣지 못하였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친히 이 대이동을 주동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지금까지 유효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쯤 유대인의 귀환을 주시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간 일이 우리 인류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사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옛적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일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는 주무대이다. 옛적에 아브라함을 이땅에 불러들여 인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장을 전개하셨던 동일하신 연출자 하나님께서는, 사천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그의 후손을 이땅으로 불러들여 구속사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자 하신다. 지난 2000년간 구속사의 무대는 여러번 자리를 달리하였었다. 그동안 약속의 땅은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후로 중동은 세계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풍부한 석유 자원, 기독교화된 서구에 대한 체면을 유지하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슬렘의 아랍권, 그리고 그 안에 눈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등이 중동의 긴장을 늘 고조시켜 온 것이다.

 

이제 한 가지 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온 세상의 관심이 집중된 이 지역에서 장차 하나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가 하는 물음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브리서 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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