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2.이스라엘

호리홀리 2015. 3. 17. 13:33

2.이스라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진다. 이스라엘을 무조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 내지는 나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견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그를 믿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치하였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단의 진실과 왜곡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그리고 겸허한 자세로 읽다 보면, 때로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면, 또 신령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로마서 4장에 의하면 모든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라" (롬4:16).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12절)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19절)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인들은 자신을 얼마든지 '신령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예를 들어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이신 야웨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 읽을 때,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문자적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명령이 순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요,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로마서 9-11장을 읽을 경우, 거기 여러번 나오는 '이스라엘'을 '신령한 이스라엘' 곧 교회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독자는 철저히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의 문맥을 통해 볼 때, 그 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문자적인 의미로서만 이해하여야 함이 자명하다. 이처럼 성경에 언급되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신령한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가능한 한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취할 경우에 성경을 오해함이 없을 것이다.

 

교회를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하여 현존하는 이스라엘 국가나 유대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는 정반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항상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 민족에게만 연관시켜 해석하여서도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에게 '거침돌'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은 어떤 점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장애물 내지는 '눈에 가시'가 되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예수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지난 2000년간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몹시 혐오하였다. 이런 비극적 상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죄로 저주를 받고 있다"고 구박받아온 유대인들이 2000년 가까운 유랑 생활 끝에 옛 조상의 땅에 찾아와 다시 나라를 세운 일은 역사의 이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살던 땅에 다시 나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광대한 아랍 국가들 가운데 조그만 점처럼 박혀 있으면서도 거뜬히 그들의 위협과 침략을 막아내고 있다.

 

1948년 결코 신생이라 할 수 없는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 1967년 주변 아랍국들과 벌여 엿새만에 이스라엘의 대승리로 끝난 6일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은 종래 이스라엘의 존재를 잊었던 많은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다시 불러 들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연구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재삼 깨닫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볼 때, 누구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라면, 하나님의 역사의 주된 배경은 바벨론도 이집트도 로마도 아닌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결코 소국도 주변국도 아닌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으로서 늘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이방 세계로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 역사의 중심장을 이스라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서 로마 가톨릭은 로마의 중심성을 강조한다. 베드로, 바울 등의 거물급 사도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로마라는 도시와 연관시켜 로마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경향이다. 더욱이 교황을 머리로 하는 종교적 정부인 바티칸이 로마에 들어섬으로서, 로마의 종교적 지위는 더욱 견고해지게 된 셈이다.

 

개신교도중에는 때때로 자기 나라가 이스라엘의 지위를 전수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제2의 이스라엘' 또는 '영적 이스라엘'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 하다. 지난 100여년간 기독교세가 급성장하여 우리 남한에서만 해도 일천만 기독교인을 확보하였으니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어쩌면 이들의 주장이 결코 그릇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기독교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로마로, 유럽 세계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계속하여 불꽃을 일으키며 번져가지 않았던가. 이러한 복음의 확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바램이기도 하다. 이방 세계에서 복음이 확산되어 갈 것을 가리켜 성경은 '이방인의 때'(눅21:24; 롬11:25) 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용어는 이스라엘 자손 또는 오늘날의 유대인과 상반된 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이방인의 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잠시 소홀히 대접받는 때'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지난 2000년 간 유대인은 가는 곳마다 푸대접과 학대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나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늘 생존권의 위협이 그들 뒤를 따랐었다. 과거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학대와 침입을 받았던 몇몇 소수 민족의 예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진작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그 이름 넉 자만이 낡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은 아직도 역사책 속에서만 아니라, 지상 역사의 현장 안에서도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지난 2000년 간 유대인은 지구 구석 구석을 방랑하며 그들의 흔적을 남기었다. 결코 다른 민족과 쉽게 동화될 수 없는 민족, 수천년 해묵은 전통을 버리지 아니하고 고도로 기계화된 현대까지 그 옛날의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아온 고집 불통 민족, 2000년의 유랑 끝에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다시 기어 들어와 독립 국가를 세운 그 집념. 하나님이 없다면 유대 민족의 역사는 너무나도 우연한 기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이러한 모든 운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이미 명시되어 있는 것이라면 독자는 이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겠는가? 과연 성경 시대 이후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신약 성경중 미완성 교향곡으로 끝난 책이 있다면, 바로 사도행전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당시 이방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까지 확산되는 것을 기록하였다. 사도 행전의 기록이 완성된 이후 이방 세계의 중심은 로마에 멎지 아니하고 산넘고 강건너고, 바다를 지나 이미 여러 차례 그 중심축을 옮겨갔다. 지난 20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쉬지 않고 이방인들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성령의 사역은 비록 사도행전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으나, 인류가 사는 지상 위에 낱낱이 새겨져서 '기록되지 않은 사도행전'을 이루고 있다.

 

지난 2000년 간 유대 민족의 역사는 어찌 보면 '기록되지 않은 구약 성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으로 시작하는 구약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안에는 약속들이 있고, 축복과 저주가 담겨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3:16). 사도 행전에 담긴 사건들은 제각기 하나의 모델이 되어서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 불순종은 역사가 지속되는 한 거듭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사도행전이나 구약 성경을 팔만 대장경과 같은 분량의 방서로 만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미완성 교향곡인 사도행전과 구약 성경 공히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날'(말4:3)에 '이스라엘의 소망'(행28:20)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