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5.요셉의 고백

호리홀리 2015. 3. 17. 13:39

5.요셉의 고백

 

요셉의 운명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운명보다 훨씬 파란만장하였다. 야곱의 운명이 스스로 택한 결과였다면, 요셉의 그것은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요셉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아무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쉬운 고백은 아니었다. 그것은 원망과 깊은 고뇌 그리고 절망을 극복한 승리의 고백이었다.

 

요셉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얼마든지 평안히 가족과 더불어 고향에서 평생을 보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꾼 일련의 꿈과 그에 따른 형들의 시기 때문에 요셉은 기구하게도 원치 아니하였던 방랑의 삶을 시작한다. 그것도 자유인이 아닌 노예의 신분으로서.

 

대략 17세 때 (창37:2) 형들에 의하여 종으로 팔려 이집트에 내려가서 30세 때 (창41:46)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니, 요셉의 종살이와 감옥 살이는 모두 합하여 13년이 되는 셈이다. 그가 감옥에서 보냈던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2년은 감옥 살이를 하였음이 틀림없다 (창41:1). 요셉은 110세에 세상을 떴다. 결국 그는 17세 이후 죽기까지 자기 생애의 대부분인 93년을 객지에서 보낸 것이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메시야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외아들이요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공생애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만 활동하셨다.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고 명하지 않으셨던가?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유대인)을 사랑하셨고, 또한 자기 땅을 떠나 타지로 가야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디아스포라행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본 백성인 유대인을 구하기 앞서 이방의 빛으로서 이방인을 구하며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이 일은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으로서 생긴 결과이다 (롬11:11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자기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신 예수께서 본 백성으로부터는 버림을 당하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도리어 이방의 구세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생애 초기에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부활하신 후 승천을 앞두시고 복음이 온 천하에 퍼질 것을 미리 말씀하신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은 복음 사역 초기에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꺼려하였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의 고넬료 사건을 참조할 것). 당시 경건한 유대인으로서는 이방인과 접촉하는 일에 여러가지 장애 요소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 요인들을 완전히 타개하고 이방으로 향한 첫 사도가 바로 바울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핍박하던 동포 유대인들을 버리고 이방인에게로 전향할 때 (행13:44-48), 그는 이사야 49장 6절의 말씀을 들어 자신의 결단에 대한 근거로 삼았다: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장차 자기 백성 유대인을 돌아오게 하여 구하실 뿐 아니라, 이방의 구세주가 되어서 땅끝까지 구원을 베푸실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에 팔려가 종살이, 옥살이를 하였으나 결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이집트 백성과 주변 각국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기근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나중에는 자기의 부모 형제들도 구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이방도 구하시고 마침내 자기 동족인 유대인도 구하실 것이다. 사49:6의 기록에 의하면 '야웨의 종' 곧 메시야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가 이방의 빛이 되셔서 땅끝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일이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이방인 교회는 우리 이방인의 구원보다 유대인의 구원이 더 힘들다고 쉽게 착각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지난 2000년간 예수께서 우리 이방의 구세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우리 이방인들은 이러한 축복을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이러니로 말미암아 그의 본 백성은 지난 2000년간 그를 버리고 그때문에 결국 메시야가 우리 차지가 된 것이다.

 

이제 '야웨의 종'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돌이키시고 저희를 구원하시고자 할 때, 우리 이방인 신자들이 그 일을 어렵다 하며 불신하거나 또는 시기하여 방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결국 한때 자기를 버렸으나, 이제 비참한 모습으로 자기에게로 찾아올 자기 동족을 구하실 것이다.

 

한편 기근을 못이겨 결국 이집트로 요셉을 찾아온 야곱의 아들들처럼 오늘날의 유대인 역시 언젠가는 한때 자기들이 버리고 팔았던 메시야 예수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그날 그들은 메시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를 경배할 것이요,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그의 용서를 구할 것이다.

 

주전 6-5세기에 활동하였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은 어느 면에서 보면 형제들에 의하여 팔렸던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관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하여 '은 이십개'에 팔렸다 (창37:28). 선지자 스가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야웨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야웨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슥11:12-13). 이 예언은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26:15; 27:3-10).

 

스가랴의 예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아니한다. 그는 메시야께서 자기 형제들(유대인)에 의하여 팔릴 것 뿐만 아니라, 장차 그들이 뉘우치고 돌아와서 그를 위하여 심히 애통할 것도 예언하였다 (슥12:10-14). 이 예언 역시 요셉의 사건과 유사하지 않는가?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 땅에 와서 요셉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대략 일곱 해의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던 해, 즉 요셉이 37세가 되던 해 이후가 될 것이다 (요셉은 30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요셉을 팔아버리고 20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요셉을 대면한 셈이다. 성경은 이 20여년 동안 요셉의 형들중 유다에게 일어난 일을 요셉의 기사 (창세기 37-50장) 사이에 삽입하여 (창세기 38장)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유다는 야곱의 네째 아들이다.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의 소생으로서 '찬송함'이라는 뜻의 유다는 여러모로 다른 형제들과 구별되었다. 형제들이 요셉을 아예 죽여 없애려고 하였으나, 정작 요셉을 죽음에서 구하여 그를 노예로 파는 일로 그치게 한 사람이 바로 유다였다 (창37:26-27). 유다는 요셉을 판 이후에 자기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람 중에 거하며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얻고 아들들을 낳아 결국 우여 곡절을 지나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 형제를 얻는 비극에까지 이르게 된다. 비록 요셉의 일생과는 달리 짧게 기록된 내용이지만,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의 생애 역시 지난 2000년간의 유대인 역사를 암시해주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형제 요셉을 팔아버리고, 아버지 야곱의 처절한 슬픔을 지켜봤던 유다는 자신의 참혹한 죄과에 대하여 어느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였을까? 형제 요셉을 팔아버린 이후로 그의 삶은 창세기 38장에 기록된대로 아내와 자식을 잃고 그리고 본의 아니게 며느리와 동침하게 되는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자기와 형제들이 함께 모의하여 팔아버린 요셉이 고난을 거쳐 이방 이집트의 총리 자리에 올라 영화를 누리는 동안 유다는 온갖 형극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왕 메시야를 저버린 유대인의 삶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결국 비극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집트에 내려가 양식을 구입하는 일에 문제가 발생하자 유다는 강경한 발언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고 (창43:8-10), 그리고 자기의 신분을 감춘 이집트 총리 요셉 앞에서 간곡한 발언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요셉과의 극적인 해후를 이루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창44:18-45:15). 오늘도 어쩌면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 예수께서는 유다와 같이 솔직하게 자기 민족의 비참한 상황을 낱낱이 고백하며 긍휼을 구하는 유대인을 찾고 계실 것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가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5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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