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서18:1-20:6,야웨를 찾는 구스와 이집트

호리홀리 2015. 2. 12. 12:56

야웨를 찾는 구스와 이집트 (18:1-20:6)

 

성경의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해당한다. 주전 721년 구스의 사바코(Sabacos)가 북쪽의 상부 이집트를 장악함으로써, 구스는 전 이집트를 관할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이집트의 제25왕조이다. 참고적으로 이집트 제25왕조의 한 구스 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했던 티르하카(주전 699-671년)는 앗시리아의 산헤립과 동시대인이다 (왕하19:8-9; 이사야7:18 참조).

 

이제 야웨께서는 햇볕에 검게 그을려서 반들반들한 피부에 쭉 빠진 키의 구스 사람들에게로 사신을 보내라고 하신다. 비록 각종 곤충이 득실대지만 나일강이 적셔주어 기름진 땅에 사는 이들에게 전할 소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나부끼는 깃발과 나팔 소리'로 상징되는 전쟁에 관한 소식으로서, 천하 만민이 듣고 보게 될 일이다 (이사야18:1-3).

 

야웨께서도 당신의 처소에서 조용히 이 일을 지켜 보신다. 마치 포도를 거둬들이기 전에 그 가지를 다 찍어 들짐승들에게 끼쳐주듯이, 지상의 한 제국이 그 세력과 영화의 절정에 달하기 전에 심판의 칼에 베일 것이다 (이사야18:4-6). 이사야17:12-14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사야는 비유를 통하여 앗시리아의 멸망을 기술하고 있는듯 하다.

 

한 때 천하를 떠들석하게 하고 민족들을 괴롭혔던 대제국의 멸망은 원방의 구스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의 주재이신 야웨 하나님을 찾게 한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야웨의 손길을 보고, 마침내 만군의 하나님 야웨를 찾아 시온산으로 예물을 가져온다 (이사야18:7-8). 빌립의 전도를 받고 세례받은 에티오피아의 내시(사도행전8:26-39)도 그러하거니와, 기독교 초창기에 많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역사적 사실 역시 이사야 18장에 대한 성취로 보여진다. 다음의 노래는 아마도 히스기야 왕 때 지어진 것으로서, 이사야 18장과 비슷한 내용을 표현한다고 하겠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이집트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시편68:29-32).

 

이사야 18장에서는 당시 이집트 땅을 관할하던 구스를 말하고 있고, 19장에서는 이제 이집트로 향한다. 야웨의 심판이 이집트의 우상들과 이집트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다. 이집트 곳곳에 내분이 일어나겠고, 사람들은 마치 정신이 나간 자와 같이 되어 지혜있는 계획도 내지 못하고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들에게나 찾아가서 자기들의 운명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결국 잔인한 왕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사야19:1-4).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과 앗시리아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구스 왕들이 다스리던 제25왕조는 막을 내리고, 마침내 주전 671년 삼틱(Psamtik) 1세로 시작되는 제26왕조가 이집트 땅에서 문을 연다. 이집트 제26왕조의 왕들은 일반적으로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54년 간 통치한 삼틱 1세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들 느고 (주전 617-601년) 역시 대 부역(賦役) 공사로 인하여 악명을 날린 왕이다. 이사야19:1-4의 예언은 아마도 이러한 시대상을 미리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종종 다른 예언들도 마찬가지거니와 이 예언도 다른 시대에 얼마든지 다시 성취될 수 있다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으로 인한 재앙은 자연의 재앙까지도 끌어온다. 이집트의 내부적인 소요는 이집트의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일강 물의 고갈을 가져올 것이다 (이사야19:5-10).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을 '바다'라고 부르기도 하고 '강'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나일강은 전 이집트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원천이었다. 농민에게는 그 범람으로 인하여 비옥한 농토를 마련해주었고, 어부에게는 물고기를, 제조업자들에게는 파피루스와 아마 또는 다른 섬유 재료를,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는 생수를 공급해주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나일강에 임할 재해는 전 이집트에 대한 심각한 심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선지자는 '이집트의 기둥들'이라고 할 수 있는 '파라오의 모사들'을 향한 심판의 화살도 잊지 아니한다 (이사야19:11-15). 야웨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모사들의 지혜를 폐하셨으므로, 그들은, 과거 모세 때 파라오의 모사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집트 전체를 망할 길로 인도한다.

 

이러한 심판들로 인하여 낮아진 이집트는 비로소 유다 땅에 좌정하신 야웨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두려워할 것이다 (이사야19:16-17). "그 날에 이집트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야웨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이사야19:18)는 맛소라 성경의 본문은 논리상 모순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읍이 '장차 망할 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왠지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이를 '의의 성읍'이라 읽고, 다른 많은 역본들에서는 이를 '태양성'으로 읽는다. 아마도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고대 서기관들이 '태양'을 '멸망'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사실 히브리어로 '태양'(ࠑ࠘ࠇ)과 '멸망'(헤레스, ࠑ࠘ࠄ)은 거의 같은 발음이며, 표기에 있어서도 첫 글자만 다를 뿐이다. 이집트에는 과거 '태양성'이라는 뜻의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리는 성읍이 있었다.

 

'유대인의 언어가 말해지고, 유대인의 하나님을 섬기는 다섯 성읍이 이집트 땅에 생길 것'이라는 말씀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제26왕조의 삼틱(Psamtik) 1세는 외국인 용병들을 많이 고용하여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때, 또는 제26왕조의 다른 왕 때에 용병으로 이집트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나일강 안의 한 섬에 위치한, 엘레판틴이라고 불리는 성읍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남긴 기록(파피루스에 적힌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됨)에 의하면, 이들 유대인들은 주전 7세기 후반기 또는 주전 6세기 초에 이곳 엘레판틴에 성전을 세웠던 것 같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 날에 이집트 땅 중앙에는 야웨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야웨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이사야19:19)라는 예언의 말씀을 어느 정도 성취시켰는지도 모른다. 이들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의식하여 성전을 세운 것인지,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채 세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엘레판틴에서의 정착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점차 이집트 곳곳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착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급기야 주전 3세기에는 지중해변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이집트 도시에서 모세의 토라(율법)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대사업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로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도 모두 헬라어로 번역되어 칠십인역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방 세계 가운데의 유대인의 존재와 그들이 이루어낸 칠십인역 성경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을 위하여 준비시켜준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가 특별히 이집트 땅에서 꽃을 피운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에 계속하여 나오는 예언의 말씀은 과거 (또는, 아마도 미래에 다시 있게 될) 이집트의 복음화와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야웨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야웨께 부르짖겠고 야웨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야웨께서 자기를 이집트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이집트인이 야웨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야웨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야웨께서 이집트를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야웨께로 돌아올 것이라. 야웨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이사야19:20-22).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이 둘 외에 당시 천하를 소란케 하던 앗시리아까지 포함하는 세 나라의 유대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유대 관계는 군사 동맹이나 주종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요, 다 함께 '평화의 왕'을 섬기는 진정한 평화와 복스러운 공존의 관계이다: "그 날에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겠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앗시리아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야웨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이집트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이사야19:23-25).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항상 피해만 입어 오던 터였다. 앗시리아에 의존하면 그에게 속국이 되면서 이집트를 원수로 만들게 된다. 반대로 이집트에 원조를 청하면 결국 도움도 받지 못할 뿐더러, 허무하게도 이집트의 패배를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지상의 대제국들이던 이집트도 앗시리아도 쓰라린 심판을 통하여 겸손을 배우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로 돌아오게 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일은 메시야 왕국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그 날에는' (이 표현이 이사야19:16-25 사이에 여섯 번이나 나옴을 주목할 것), 곧 메시야 왕국이 이르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나라가 아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 바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맥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중략]......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2:15-22)

 

먼 미래의 희망찬 얘기를 언급한 후, 이제 이사야는 다시 구스와 이집트의 가까운 장래일로 돌아온다. 먼저 이사야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해에 발생한 한 역사적 사건을 밝힌다: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이사야20:1). 사르곤은 주전 722-705년 사이에 앗시리아를 통치하였다. 주전 723년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직후인 주전 722년에 사르곤은 북 왕국 이스라엘 지파들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다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 사르곤은 계속하여 블레셋 지역으로 진격하여 가사 왕을 사로잡고, 원군으로 나온 이집트의 사바코(Sabacos)를 격퇴시킨다. 그러므로 이사야20:1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은 아마도 사르곤 통치 초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가 받은 말씀은 '앞으로 삼 년이 차면 앗시리아 왕이 이집트와 구스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사야20:2-4). 유다 사람들이 대제국으로 간주하여 은근히 의지하는 이집트가 이처럼 허깨비처럼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유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이사야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