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제사장과 선지자
제사장은 제도권 안에 있었으므로 왕의 눈치와 백성들의 눈치도 보아야했다.
고로 자연히 타락할 소지가 많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제도권 밖에 있었으므로 보다 자유로웠다.
하여 둘은 견원지간이 될 소지가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원하는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주셨으나 왕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지자제도를 시작하셨다.
제사장의 우두머리인 바스홀은 성전 수호자였다.
이제 개혁은 시작되었고 성전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스홀은 제일 인기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를 받으려고 사람들은 줄을 섰고,
많은 제사장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며,
제사를 회복하고 여러모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바스홀의 설교는 인기절정이었다.
그의 설교 주제는 늘 “샬롬”(8:11)이었다.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걱정하지말라.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평안을 담보로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낙관주의, 번영주의는 위험하다.
예레미야는 참을 수 없었다.
8:10, 평강,평강,뭐가 평강이냐?
그렇다.
선지자는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평강을 얻기위해서는 치열한 영적싸움이 있어야 한다.
고난도 이겨야한다.
뜨거운 회개와 자아성찰도 있어야한다.
그 후에 상급으로 얻는 것이 샬롬이다.
무조건적 평강은 마취제나 말 장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설교하면 아무도 안듣는다.
그러나 바스홀이 설교하면 구름떼 같이 몰려든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장에서 일부러 모여든 사람들을 쫒아 보내셨다.
바스홀에겐 예레미야가 눈에 가시였다.
심판,포로,회개를 외치는 예레미야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급기야 체포한 후 태형을 치고 착고에 채웠다.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로 낙인이 찍혔다.
성공지상주의, 축복지상주의, 샬롬지상주의는 늘 위험하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예레미야가 되어야한다.
아니 예레미야로 살아야한다.
예레미야는 세가지 고난을 받는다.
첫째는 육체적 고난이요
둘째는 영적고난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따진다.
“주께서 나를 권유하셔서“(7) 권유는 꼬셔서이다.
왜 나를 조롱하십니까?
왜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게 하십니까?(8)
그러나 예레미야는 잠시 흔들렸으나 다시 회복된다.
”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나이다.“(9)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난은 비방이다.
거짓비방,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10절의 고소.
적들은 내가 타락하고 유혹에 빠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승리의 이유는 11절이다.
“그러하오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약문구이다.
하여 13절 ,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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