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연구

로마서9:14-24 ,제한속죄

호리홀리 2015. 1. 26. 14:53

롬9:14-24

 


 

1. 두 가지 반론과 그에 대한 답변(14~18)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실 작정을 하시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미워하십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사도가 두 진술을 하였기 때문에 14절에서 두 가지 반론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것은 두 가지 방면에 불의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신 것이 하나님 편에서의 불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들은 미워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행사가 온당치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5~18절에서 두 경우를 거론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사도바울은 이 진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방식대로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최종적인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고 의롭기 때문입니다

 


 

② 바울은 사실상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❶ 만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다룬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토록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❷ 어느 누구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❸ 그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❹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❺ 모두가 저주 가운데 있는데 그 가운데서 몇 명을 구출해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불의하다고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며, 또한 모두 다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❶ 하나님은 항상 지혜로우십니다. ❷ 항상 참되십니다. ❸ 항상 거룩하십니다. ❹ 언제나 능력이 충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항상 공의로우십니다. ❺ 하나님께서는 매우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시고 구별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만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따라 자신의 주권적으로 정하신 뜻에 따라 자신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분량대로 그 선하심을 나누어 주실 절대적인 자유권한을 가지고 계시는데, 자신의 지혜로 정한 그 뜻에 따라서 행하시며, 자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정하신 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⑤ 마20:1~15의 포도원 비유는 본문의 완벽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방식(17~18)

 

①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시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② “너를 세웠다”라는 말씀이 원어에서 전달되는 의미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거나 어떤 사건이 무대에 나타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내가 너를 단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고,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너를 세웠고, 네가 있는 그곳에 있게 하였다.”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❶ 출8:15; 4:21에서 나타난 진술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였습니다. ❷ 바울이 확증하고 있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 특별한 시점에 거기 있도록 정하사 그 바로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을 온 세계에 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❸ 창45:7,8; 5:20의 요셉의 고백 참조 ❹ 시105:23; 요12:37~41; 행2:22~23; 4:27~28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❺  고후5:19; 사53:6; 고후5:21와 같이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❻ 그러나 살후2:11~12; 벧전2:8; 유1:4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시거나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심정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❼ 하나님께서는 악을 지으시지도 않고 그 악을 사람의 심령 속에 넣지도 않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❽ 하나님께서는 결코 바로를 불신자로 만들지 않으셨는데, 그가 이미 불신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신앙을 심화시키사,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보여 주시는 위대한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❾ 바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대적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더욱 악하게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케 하심에 있어, 롬 1:24,26,28에서 한 가지 방식을 소개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여러 방식들 중에 하나님께서 제어하시는 작용을 거두는 방식입니다. ❶ 세상이 죄에 빠져 있으나 하나님은 그 죄에 어떤 한계와 제한을 두십니다. ❷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전적인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❸ 하나님께서 그 제어하시는 작용을 철회하시는 순간에 거기에는 강퍅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❹ 햇빛이 비취지 않으면 땅은 굳어지고 얼어붙게 되지만 햇빛이 다시 나올 때 그 얼었던 것이 녹습니다. ❺ 햇빛을 거두면 굳게 되는 일이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마음을 그런 식으로 굳게 하시는 것입니다. ❻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상실한 마음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❼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거두어 버립니다.

 

④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두 번째 방식은 롬7:5,8~10에서 나타납니다. ❶ 한 사람의 죄인에게 율법이 나타납니다. ❷ 율법이 그에게 와서 그 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고 그 죄를 비난합니다. ❸ 그 율법이 그 사람을 격동시키고, 그 사람은 더욱더 큰 죄인이 됩니다. ❹ 죄 짓지 말라고 말하는 율법이 그로 하여금 그 죄를 더욱 더 짓도록 부추깁니다. ❺ 율법이 그의 정욕과 그의 소욕에 불을 붙입니다. ❻ 도덕적인 교육은 오히려 그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보다는 죄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됨으로서 더욱 범죄하게 합니다. ❼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그것이 나쁘다고 말함으로서 그 일을 하도록 충동질하여 그들을 끌어들여 더욱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❽ 사람들이 성과 도덕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사실을 발견하지만, 그런데 나중에 그들은 책들을 읽은 후에 그 전보다 더 악해졌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❾ 그것은 바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악 때문입니다.

 

⑤ 이제 세 번째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서 입니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그 전보다 열매 더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⑥ 네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있는 소욕을 더 격동시키시는데,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 그러했습니다.(창50:20)

 

⑦ 다섯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단을 사용하시기까지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듣게 되는데, 욥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참조 : 고전5:5] ❶ 하나님께서는 때로 당신이 모든 제어하는 수단을 다 거두심으로서 사람을 완강케 하시며, 사단에게 넘겨주시기도 하십니다.(롬9장) ❷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을 완강케 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어 결국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절망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❸ 그런 다음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❹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하셨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말할 준비가 늘 되어 있을 것입니다. ❺ 그 마음을 완강케 하신 것은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토기장이와 진흙(18~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하나님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실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계시며,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때에 언제라도 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위해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습니다.

 

②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대하고 표적적인 권능과 그 주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바로 속에 있는 그 완고함과 저항감과 악을 증가시키신 것입니다.

 

③ 물론 바로는 대단한 독재자였고, 대단한 힘을 보유한 황제였으며, 큰 군사를 가지고 있는 왕으로서 그 당시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정복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④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낮아져 결국 자기 뜻과는 정 반대로 손을 들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가도록 허락해야 할 정도로 낮아진 것입니다.

 

⑤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⑥ 이제 본문의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겠느냐 말하겠느뇨?” 라는 말씀에서 “지음 받은 물건”은 흥미 있는 어휘입니다. ❶ 오늘날 플라스틱이라고 쓰이는 말은 여기서 사용된 원어 “프리스마”에서 나온 말입니다. ❷ “프리스마”라는 말은 “지음을 받은 물건”, “물질로 합성하여 만든 존재”를 말합니다. ❸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❹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손으로 다루시고 만져서 모양 지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바르게 부각시켜 주기 위해서 또 다른 비교 용법을 쓰고 있습니다. ❺ “토기장이와 진흙” 또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의 대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지음을 받은 물건과 지은 자 사이의 대조입니다. ❻ 사도는 바로 이 질문에서 악한 정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❼ 그들의 공평치 못하다는 불평을 기각시키기 위하여 피조물이 되는 사람이 조물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스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⑦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❶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만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❸ 우리 주님은 “천지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❹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바르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의 무모함(19~24)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는 의미는 어떤 것은 요긴하게, 어떤 것은 덜 요긴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창조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천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어휘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하는데, 바울이 “합성된 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창조함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①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어는 창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❶ 창조함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❷ 여기서 우리는 여러 합성적인 물질로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흙 한 덩이입니다. ❸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사람에 대하여 가진 관계는 마치 진흙 한 덩이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가진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❹ 토기장이는 진흙을 창조하지 않았고, 이미 창조된 진흙으로부터 시작합니다.

 

② 이 문제는 본래의 창조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❶ 그것은 원 창조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그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❷ 그것은 “천히 쓸”이라는 말의 정 반대입니다. ❸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전체의 피조물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❹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천한 것을 창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❺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❻ 더구나 태초에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기사입니다. ❽ 진흙 덩이는 “인성”이 아니라 “타락한 인성”입니다. ❾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성입니다.

 

③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어떤 사람은 존귀함에 처하기로, 또 다른 사람은 비천함에 처하기로 결정하셨는지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면, ❶ 그것은 “나는 모른다.”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❷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❸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하등의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❹ 그것은 궁극적인 신비입니다. ❺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 일을 하실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❻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행하실 권한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화를 좌초하는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❼ 왜냐하면 나를 지으신 자와 다투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④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하여 아담 안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❶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담이 행한 일을 우리도 했기 때문입니다. ❷ 우리 스스로도 그 일을 했습니다. ❸ 아담이 우리를 대표로해서 범죄함으로서 우리는 모두 범죄한 것입니다. ❹ 모든 사람들은 일부러 죄를 짓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❺ 우리가 죄를 지으라고 강압하는 이가 없지만 그 죄를 짓고 싶어 합니다. ❻ 우리가 양심을 거스르고 율법을 어기고 나갔습니다. ❼ 그러나 우리의 범죄나, 의도적으로 범죄한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은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의 선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❽ 만일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❾ 그러나 정죄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 책임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⑤ 이 문제는 커다란 신비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의 비밀입니다. ❶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떤 원리에서 하시는지 모릅니다. ❷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다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입니다. ❸ 그들이 둘 다 그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❹ 이 신비로운 일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그 비밀스러운 진리를 거부하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❺ 그러나 구원 받은 자들은 이 교리가 믿어지고, 그것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