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연구

로마서7:16-25 ,내적성화의 3단계

호리홀리 2015. 1. 26. 14:06

롬7:16-25

 


 

7장 16~25절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이원성(16~20)

 

그가 말하는 것은 “나는 율법에 동의하고 율법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며, 그것이 금하는 것을 또한 찬성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를 미워한다. 나는 죄짓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고 왜 죄를 짓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바울이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씀이 그에 대한 답입니다.  첫 번째 나오는 “나”는 전체 인격, 말하고 있는 사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나”는 율법의 영적 성격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그의 한 지체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의 인격을 이중적으로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율법이 이르게 된 “나”와, 율법이 영적임을 알 수 있는 “나”로 나로 분리가 됩니다. 이 이원성은 중생치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그들은 전인격은 양심이 말하는 것을 알고 찬동하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기 양심으로 고통을 받지만, 중생한 사람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 이원성은 영과 육의 분리 하여 죄가 몸에만 속해 있어서 죄를 지어도 육체에만 영향이 있고 영혼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이원론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전 인격으로서의 육신 안에 가지고 있는 두 성향,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으로 나뉘는 이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두 번째 구절을 살펴보면 죄는 우리 속에 거처를 정하고 거주하며 어떤 것입니다.  죄는 처음부터 우리 속에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잉태되었고 불의 속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일부입니다.  죄는 사람의 의지력보다 월등하게 강력합니다.

 

19,20절은 15절을 정확히 반복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의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한 진상이 그러하다. 그것은 내가 내 자신 속에서 발견한 약점이고 내가 알고 있는 무능함이며 나의 쓸모없는 투쟁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죄의 가공할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데 죄가 우리 속에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가 율법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되고 죄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될 때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속사람과 지체들(21~23)

 

18~20절에서 왜 자기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악한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면, 21~23절은 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느냐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사람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두 가지인데, 자신이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행하는 것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그 이중적인 면입니다.  왜 자기가 하지 않아야 할 악한 일을 행하는 가에 대하여 그는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다른 측면을 다루면서 왜 자기가 그렇게도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한 법”이라고 말한 것은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속에 하나의 원리가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은 너무나도 줄기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하나의 명백한 행동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깨달은 바는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예외 없이 악이 나와 함께 있는데, 이것은 법칙이 자연 속에서 역사하는 것처럼 내 속에서도 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마치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오는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는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순간 악이 거기에 있어서 완강히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즐거워하다”는 말씀은 시편 기자의 의중에 있는 것을 마음속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시편 1편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선한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사람”은 마음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며, 이성의 장소이며,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자연인 안에 있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점점 후패하는 겉 사람의 반대로서 성령에 의해서 조명될 수 있는 사람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다른 법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가 하려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리하여 정반대의 일을 하게끔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죄의 법”(23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죄의 법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신령한 율법관을 향하여 싸움을 거는 것이고 율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꺾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체 속에 있는 마음의 법과 싸울 뿐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본성의 악한 원리가 우세하여 악한 생각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런 한도에서 그것은 정복했고 우리는 패배하여 포로가 된 것입니다.

 


 

23절의 첫 번째 부분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 싸움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데, 결과는 자기 자신이 사로잡히고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괴로워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올라가기 보다는 내려가고 승리하기 보다는 더 많은 패배를 당한다고 느끼며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절규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몸”은 “죄의 몸”이며, “속사람”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 바울이 그러한 부분에서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3. 유사한 구절들과의 비교(25)

 

여기서 우리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진술 중 마지막 진술을 대하게 되는데, 본문에 대하여 찰스 핫지는 강하고 갑작스런 감사의 감정으로의 전환이라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하였던 바울은 갑자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온 진술이며 파격적인 문장이지 그가 주장하고 있는 논증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그는 깊은 죄책감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거룩함을 알게 된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정죄 받았다고 느끼며 자기의 약함을 알게 되고 그의 완전한 실패를 의식하게 되지만 그는 더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율법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자기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어 스스로 정죄 받았다고 느끼며 죄책감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었고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율법은 마치 남편이 죽은 여인과 같고,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충만한 너희로부터 자녀를 생산할 것이고, 너희로 잉태케 하여 자기의 생명을 너희 속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이러한 일을 율법 아래서 추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매였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를 나누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잘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축복과 결실케 하는 강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