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36장,환란의 줄

호리홀리 2016. 4. 1. 09:12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  두 가지 중심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나는 33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고난이 닥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총돌되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의 교만을 꺾기 위한 '정화의 수단'이라는 주장이다(1-25). 이 고난관은 33장 보다  '더욱 강하고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N.H.Ridderbos).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이다(26-37:24). 자연의 이치를 천박한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정죄하거나 그 의()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등장을 유도하고 있으며,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38:1)을 미리 은연중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연설과 하나님의 판결을 연결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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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위하여(, 레엘로아흐) - '...을 위하여', '...의 편에서'를의미하는 전치사 '''하나님'(, )이 합쳐진 말이다(KJV, NIV, RSV, NASB;on (in) God's behalf). 70인역(LXX)은 이 부분을 '엔 모이'(, 내게)로 읽어 엘리후의 무모함을 완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 '하나님을 위해 나서겠다'고 하는 대신 '아직도 내(안에) 말이 남아 있다'로 옮겼지만 굳이 이렇게 소극적인 번역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의 명예를 위해 말하겠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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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레메라호크)는 전치사 ''(, to)'' 혹은 ''(, from)가 이중으로 사용되었고, 여기에 '멀다', '멀리 있다'의 뜻을 가진 '라하크'가 결합된 단어이다. 직역하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이다. 이를 단순히 '역사와 자연의 넓은 영역 중에서'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Delitzsch), 엘리후 자신의 연설이 '땅의 끝에서부터'(Dhorme),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Anderson, 138:6;139:2;23:23). 이로써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교훈이 될 만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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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이 구비한 자 - 바로 엘리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밈 데오트''완전한', '순전한'의 뜻인 '테밈''알다', '경험하다'의 뜻인 '야다'에서 파생된 '데아'(, 지식, 견해)의 복수형 '데오트'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지식'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충만한 지식'(full knowledge)을 뜻하며(Hartley), 여기에 '테밈'(이 추가되어 사리를 분별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지고한 지식, 지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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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 개역 성경의 '아무도'는 원문에는 언급이 없는 단어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 문장이 된다. 델리취(Delitzsch)는 의역하여 '그분은 당신의 창조하신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게라도 결코 불의하게 취급하지 아니하신다'고 이해한다. 결국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자신을 멸시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신다고 불평했던(16:9;30:21) 욥의 태도를 넌지시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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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눈을...돌이키지 아니하시고 - '그 눈'에 해당하는 '에나이우', 70인역(LXX)에 의하면 '그의 정의'(his right)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관용어구로 '하나님의 얼굴'과 유사하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공의' 등을 뜻하므로 굳이 본문을 수정하지 않아도 그 뜻이 분명해진다. ,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의인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지키신다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6절과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Delitzsch), 그 내용은 아마도 지혜 문학의 전통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겠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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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설'(, 지킴)'제크'의 복수형으로서 '족쇄', '쇠고랑'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포로나 죄인들을 속박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45:14), 본문에서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으나 다음 구절의 '환난의 줄'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환난의 줄 - 의인의 인생에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상반절의 '쇠사슬'과 함께 이 ''은 의인의 삶을 제한하고 어거(馭車)하는 시험을 가리킨다. 또한 이것들은 그들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의인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도)9,10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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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의인이라 할지라도 부지중에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의인에게 닥친 고난은 단순한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연단과 성숙을 위한 것임을 거듭 밝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엘리후의 사상은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였던 세 친구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보이사(, 야게드) - '말하다', '알리다', '선언하다'를 뜻하는 '나가드'의 파생형이다. 이 어근은 원래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높이 두어 눈에 잘 띄게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의인들의 잘못된 죄악들을 밝혀 보인다는 뜻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보다 '위엄있고 강한 선고'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RSV, declares).

 

 돌아오게 - 이에 해당하는 '슈브''돌이키다', '돌아오다'란 뜻이며,본절에서는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NIV, repent;Hartley)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회개는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단이 된다(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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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섬기면 - ''(, if)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이런 구성은 12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은 모두 앞의 8-10절에서 언급한 주제들과 관련된다.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의 축복에 관한 언급이다.

 

 날을 보내며 - 직역하면 '자신들의 날을 끝내다(마치다)'이다. , 하나님의 경고를 청종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고치면 남은 생애를 형통하게 지내고 마치게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 생애는 매우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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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에 망하며 -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의 불행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칼에'(, 베쉘라흐)''는 어떤 일의 원인이나 이유(cause)를 뜻하는 전치사로 사용되었다(Hartley). 그리고 '쉘라흐''보내다', '던지다'는 뜻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무기'를 뜻한다. 따라서 굳이 칼뿐만 아니라 원래는 던지는 무기를 의미한 듯하다(4:17,23에서는 '병기', '기계'로 번역됨). 혹자는 '쉘라흐''죽음의 강물, 협곡'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Hartley, 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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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11,12절에서 언급한 사상을 다른 표현으로 계속 언급한 것이나 그 순서는 뒤바뀌어 있다. 즉 본절과 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인들의 저주에 관한 언급(12절의 내용)이고, 15절은 11절과 유사한 것으로 순종한자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이다(Lange).

 

 분노를 쌓으며 - 본문을 '분노를 품는다'로 옮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Lange).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즉 불경건한 자들은 목전의 현실에서 징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계속 불의를 행하게 되지만, 이는 진노의 날에 필경 임하게 될 진노를 자기 머리에 쌓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Hartley, Rswlinson,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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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창(男娼)과 함께(, 바케데쉼) - 여기서 '케데쉼''구별됨', '거룩함', '성스러움'을 뜻하는 명사 '코데쉬'에서 유래한 단어로'남자 창기'를 가리킨다. 개역 성경은 신 23:17;왕하 23:7에서 이를 '미동'(美童)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거룩한 자'를 뜻하는 '코데쉬'가 남창을 가리키게 된 것은 이교 사원의 종교적 풍습에서 기인했다. 저들의 제사 의식 가운데는 성적인 행위가 포함되어 있어서 사제들이 신전에서 사람들과 음행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특히 수리아인과 가나안인의 신전에서 흔히 행해졌는데, 여기서 그 수종을 드는 남녀 사제들은 창기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런 남창들과 함께 거하게 되면 저희의 기력이 쇠해질 수밖에 없었다(Lange). 한편 하틀리(Hartley)는 이 부분을 '남창'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좇아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 속에'라고 번역하여, 젊어서 죽게 되는 수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난외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남창'으로 번역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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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 오히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하나의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심을 뜻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Hartley, Lange, Rawlinson). 이런 점에서 RSV는 이 부분을 '하나님은 고난받는 자를 그의 고난으로 구원하신다'(Hedelivers the afflicted by their affliction)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받는 자의 구원 여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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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 '곤고함'(, 피 차르)은 직역하면 '고난의 턱()'을 뜻한다(NIV, NASB, jaws (mouth) of distress). 그리고 '이끌어 내다''하시테크''꾀다', '부추기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수트'에서 파생된 말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절에서는 '인도하다', '이끌다', '적을 물리쳐 돌아서게 하다'(대하 18:31) 등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는 자를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이 계획은 바로 욥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의 다음 말은(17)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욥이거절하여 스스로 더 불행한 길을 자초했음을 보여준다.

 

 네 상에...되었으리라 - 기름진 음식으로 잘 차려진 상은 인생의 가치와 승리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의미한다(23:5). 풍족한 식탁은 상반절의 '넓은 공간'과 병행구를 이룬다. 한편 텔리취(Delitzsch)는 이를 '재산이 풍성해지는 상태'로 이해한다(22:26;107: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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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 앞에서 말한 축복스러운 상황과 정반대의 현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리고 심판과 공의는 중언적(重言的)인 표현으로 '정의로운 심판'을 뜻하는 말이다(Hartley). 따라서 본절은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욥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Lange). , 욥은 그의 완고한 고집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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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격함을 인하여...말라 - 이 구절은 엘리후가 욥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말이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움을 공박하고 의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분격함''사페크''살짝 때리다', '손뼉을 치다'는 뜻 외에 '풍부한', '선물' 등의 뜻을 지니는 '사파크'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아마도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속전(贖錢)의 값이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Hartley). 그 말이 다음 구절의 '대속함을...말지니라'에도 나타나 있다. , 한번 죄악에 빠져 파멸되면 보상을 받을 길이 없듯이,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욥 자신을 구원할자가 하나님 외에는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엘리후는 욥이 거부(巨富)임을 염두에 두고 이말을 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최후의 판결은 그 어떤 재물로도 굽게 할 수 없다. 특히 욥의 경우에는 그의 재산이 속전의 대가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악임을 뜻하는 것이다(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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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함을 받는 - 직역하면 '파산하다'이다. 102:24에서 이 말은 '살아가는 도중에 사람이 절명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Pope). 여기서 엘리후는 이전에 욥이 간절히 원했던 '인생의 종말'(3)인 밤도 자신의 고난이 끝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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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택하였느니라 - 이것은 욥이 택한 ''을 수식하는 말이다(RSV, for thisyou have chosen rather than affliction). 엘리후는 욥이 시험을 당해 인내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던 죄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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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엘리후는 하나님의 존귀하신 주권과(148:13;2:11,17) 탁월하신 훈계 능력을(25:8 - 14;94:12) 상기시키고자 한다.

 

 큰 일을 행하시나니 - 히브리어 '야스깁''매우 높은'을 뜻하는 '사가브'의 파생형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매우 높은 곳에 앉으시다', '높이 들림을 받으시다'이다. 이는 하나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인해 가장 높이 송축 받으실 분임을 뜻한다.

 

 누가...베풀겠느냐 -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나타내시는 교훈의 깊은 지혜는 인간이 감히 따를 수도,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 사상은 엘리후의 전체 연설의 중심이 된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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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하기를(, 타스기아)은 원래 '증가하다', '성장하다', '확대하다'의 뜻을 가진 '의 파생형이나 '사가'가 상징적으로는 '찬양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임에 유의해야 하겠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드높여 찬양하고 광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래하였느니라(, 쇼레루) - '노래'를 뜻하는 명사 '쉬르'에서유래된 파생형이다.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13:6;101:1;106:12 ) 이 단어는 '찬송하다', '노래하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동사가 '보다', '깨닫다'는 뜻의 '슈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Ezra, Larcher, Tur-Sinai). 이 경우에 본절은 '너는...찬송하기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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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데서도 보느니라 - 상반절의 '그 일'24절의 '하나님의 하신 일'을 가리킨다.이것을 '욥이 당한 고난'으로 보고 이 구절을 사람들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욥의 고난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먼 데 있는 자들로부터'도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으나(Rawlinson) 그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본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의 역사를 경외와 찬탄으로 바라보며, 또한 경외심 때문에 감히 그 행사에 근접할 수없어 '그것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보지 못한다'(Lange)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울러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압도당할 만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위대한 것임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이해 가능하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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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에서부터 37:20까지는 자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엘리후가 즐겨 쓰는 것이고, 사실 이것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시사할 수 잇는 방법도 드물 듯하다.

 

 알 수 없고 - 서두에 감탄사 '보라'(,)가 있다(개역 성경은 번역을 생략함). '알다''야다''동침하다'는 뜻도 가지는 단어로, 대상에 대한 체험적인 깊은 인식과 통찰에서 오는 지식을 뜻한다(6:3 강해, '야다의 개념' 참조). 물론 인간은 하나님을 이렇게 알 수는 없다. 그의 지혜와 행사는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것이다. '크시니'로 압축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초월성'을 잘 나타낸다.

 

 연수를 계산할 수 - 단순히 인간과 같은 '연령'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하시기에 우리가 그 영원함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찬양 받으실 분이시지 한정된 인간의 지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나타낸다(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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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위에(, 알레 아담) - 원문상 '아담뒤에 오는 히브리어 ''은 기본적으로 '풍성한'이란 뜻이며 이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는가에따라 여러 견해로 갈린다. (1)'아담'을 수식하여 '많은 사람들'이란 뜻을 구성한다고보는 견해. (2)'아담'''을 뜻하는 '아다마'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보는 견해(Dahood). (3)'''소나기'를 뜻하는 '레비빔'의 변형이라고 보는 견해(G.H.B.Wright). (4)'''풍부하게'라는 뜻의 부사로서 '이레야푸'(, 개역 성경의 '쏟아지느니라'에 해당함)를 수식한다고 보는 견해. 그런데 '아담'은 그 단어 자체에 총칭적이고 집단적인 의미의 '인류'를 내포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견해들 중 (3)(4)의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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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의 폐임 - 직역하면 '구름이 넓게 펴져 있음'이다. 그리고 장막의 울리는 소리는 천둥 소리를 뜻한다. 여기서 '장막'(, 수카토)은 컴컴한 구름을 뜻한다(Pope). , 이 구절에서는 신속한 구름의 발생과 집결 또는 펼쳐짐 등 자연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천둥 소리를 '장막의 소리'로 묘사한 것은 그 소리를 하나님의 장막 속에 거하시면서 발하시는 '호통 소리'로 대비시키기 위함인 듯하다(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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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 번개 빛이 온 사방에 번쩍거리며 빛을 발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사면'은 온 천지 사방을 가리키는 것이지, 굳이 '하나님의 주위'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 다만 순식간에 번개 빛을 사용하셔서 온 하늘을 밝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Rawlinson). 한편 성경에서 번개는 대체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위엄(4:5;11:19), 무서운 심판(9:14;8:5), 예기치 못할 주의 재림(24:27)등을 상징한다.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 본문은 (1)하나님께서 파도로 바다의 심연까지도 가리우신다(18:15-50), (2)(하늘은 번쩍거림으로 밝아지는 반면) 바다의 심연은 더욱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리워진다, (3)바다의 뿌리, 바다의 심연까지도 그분은 빛으로 덮으신다 등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중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Delitzsch, Stuh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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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구름을 운용하시면서 두가지 대조적인 목적을 이루시고 계심을 보여준다.

 

 만민을 징벌하시며 - '만민'(, 야밈)''(, 백성, 국가)의 복수형으로 백성들에 대한 총칭이거나, 국가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징벌''야딘''다스리다', '심판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의 파생형이다. , 엘리후는 비와 구름으로 인해 작물이 유실되거나 홍수의 피해, 천둥 번개로 인한 재해 등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식물을...주시느니라 - 위에서 언급한 내용의 반대 현상으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려 땅을 기름지게 하여 수확을 풍성케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자유 자재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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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손을 싸시고 - '싸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사''덮다', '감추다', '숨기다'를 뜻한다. 이 말은 번개 빛으로 손 전체를 채우듯 손에 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혹자는 이를 '들어올리다', '휘두르다'라는 뜻을 가진 '니사'의 오독(誤讀)이라고 보기도 하며(Dhorme, Fohrer), '구름과 구름이 마주침으로써 일어나는 번개의 번쩍거림-번개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날뛰는 것을 뜻하는-을 묘사하는' 말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Pope). 어쨌든 본절에서 하나님은 심판자와 통치자로서 폭풍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전사로 묘사되고 있다(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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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울리는 소리가...표시하고 - 문자적으로는 '그의 경고하는 외침이 그 자신에 대한 선포가 되게 한다'이다(Lange). , 그 천둥 소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는 증거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의 공의로우심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Hab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