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35장,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

호리홀리 2016. 3. 31. 20:57

35:10,11

개역 성경은 이 두 절을 구분하지 않고 있으나 원문에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KJV, NIV, RSV도 구분함).

 사람으로...노래하게 - '노래하게''제미로트'는 문자적으로 '노래들'을 뜻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단어의 원형 '자마르'(, 노래하다, 찬양하다)의 명사형 '자마르''폭력', '용기', '능력'을 뜻하는 아람어 '다마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Pope). 그리고 하틀리(Hartley)의 경우는 이 주장을 수용하면서 노래하는 것, 특히 밤에 노래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감성적인 힘'을 복돋아 주는 것이라고 본다. 노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용기라는 것이다. 밤증은 고난중에 찬양하게하시는 하나님,고난에 순종 할 때 찬양 할 수 있는 것이다. 욥은 지금까지 고난에 순종하지 않고 거칠게 반항하고 불평하며 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엘리후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고난에 순종 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교육하시기를...더하게 하시며 - 직역하면 '그는 우리를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가르치신다'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동물보다 더 존귀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존재로 대우하셨다는 의미이다(Lange). 반면에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동물을 통하여 사람을 가르치신다'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Delitzsch). 이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 짐승들이 자기들의 고통과 욕구를 부르짖는 것을 통해 인간들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디 계신가...없구나 -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도리어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자연 만물을 통해서 지혜를 깨달아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와 기대하시는 바를 깨닫지 못했다. 엘리후는 바로 이러한 실패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로린슨(Rawlinson) 같은 학자는, 인간의 부르짖음은 동물의 본능적인 그것보다 더 고상한, 즉 믿음과 경건과 겸손을 가진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실패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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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을 인하여 - '교만''게온''일어서다', '자라다', '승리를 몹시 기뻐하다'란 뜻인 '가아'의 파생형이다. 본절에서는 백성들을 폭압하는자들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만'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 - 장소적인 의미로는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자리', '그 현장'을 뜻하나(70인역, 제롬 역본), 오히려 시간적인 의미의 '그 때에', 즉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Delitzsch). 한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13절에서 밝히고 있다.

) -->   헛된 부르짖음(, 솨우) - 문자적으로는 '공허', '허무', '허위'라는 뜻이다. 십계명 중 제 3계명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20:7)'망령되이'가 바로 이 단어의 부사구로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는(12) 이유가 이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공의에 의혹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엘리후가 욥의 부르짖음 일체를 단순히 헛된 것으로 단정했다면 그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입술로써만 중언 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는 지적은 명확한 것이다(Delitzsch).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 직역하면 '관심을 두지 않다'이며(NIV, pays noattention to it),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난하다(Lange). 본절에서 엘리후의 논점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압박받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직 자기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하며 기다리는 욥의 태도가 위선이라고 공박하는 것이다(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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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시비는...기다릴 뿐이라 - '일의 시비'(, )'심판하다', '동의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의 명사형이다. 이 단어의 어원에대해 드라이버(Driver)'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왔다고 주장하여, ''이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라고(고대의 역본들에는 대개 동사로되어 있음) 보고, 이 구절을 '너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키고 그를 기다리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욥기에 빈번히 등장하는 법정적 용어로서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Habel, Pope).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자기의 송사 문제를 제출해 놓고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신의 무죄와 결백이 선언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엘리후는 바로 이러한 욥의 당당함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위선적인 호소'를 발견하였다. 엘리후의 눈에는 욥의 이런 태도가 '헛된 부르짖음'의 극치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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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노하심으로(, 아포) -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진노'로 번역하고 있지만, 문자적으로는 '그의 진노'이므로 누구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16절과 연결시켜 두 가지의 해석이 일단 가능하다. 첫째, 지금 그(하나님)의 분노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는 해석이다(Hartley, Lange). 둘째, 지금 그(하나님)가 그()의 분노에 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는 해석이다(Habel). 어쨌든 본절은 하나님께서 욥의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죄에 대해 징벌을 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신 것 때문에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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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되이(, 헤벧) - 문자적으로는 명사형으로 '공허'(emptiness), '덧없음'을뜻한다. 이 명사형 '헤벧'은 보통 이스라엘이 섬기던 헛된 ''들을 묘사할때 사용되어 종종 '우상'으로 번역되었다(32:21;왕상 16:13,26;2:5). 또한 '생명이 짧은'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39:5,6;94:11;144:4;49:4).

 

 지식 없는 -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그것이 엘리후에게는 헛되고 어리석은 말로 여겨졌음)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엘리후는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지한 자의 소행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으셨으며, 엘리후가 예상하기로는 하나님의 징벌 외에 남은 것이 없음에도 막상 그것이 욥에게 내려지지 않음으로 인해, 욥은 더욱더 하나님을 공격하는 어리석고 헛된 말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이 끝이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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