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7장,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호소하는 욥

호리홀리 2016. 3. 25. 10:25

'비사'로 번역된 '마솰'은 본래 격언이나 직유를 의미한다. 혹 지혜의 간결한 단편을 가리키는 '잠언'으로(26:7) 이해하기도 하며, 또는'속담', '비유'등으로 일컫기도 한다(14:4). 또한 발람의 신탁(23:7, 18)이나 시인의 읊조림(21:17)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마솰'은 문학적인 쟝르에서 매우 다양하게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격언적인 대화나 시적인 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은 자기의 연설을 침묵하는 친구들에게 좀더 엄숙하게 고조된 분위기로 계속 이끌어가고 있다(11). 결국 본장은 먼저 자기의 순전함과 무죄성에 대한 확언으로 시작된다(2-6). 그리고 대적자들을 저주하면서(7-10) 자기의 경험과 사악한 자들을 대조시키고 그들의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 언급한다(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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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 원문에는 첫 문장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는 감탄문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사실인 것처럼 자기의 말이 진실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욥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항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변호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판단의 최고 가치로 부여하고 있다.

 

 나의 영혼을...맹세하노니 - 욥의 맹세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의 마지막 호소 수단으로 이해된다. 앞에서 욥은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판단받기 원했으며(13:22) 하나님의 계속되는 징벌을 탄식하며(16:9-17)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는 심경을피력한 바도 있다(23:3). , 욥의 주목표는 공평한 판결이 시행되는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의 생각에 하나님은 그러한 소송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고, 따라서 욥은 마지막 단계로서 맹세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절의 맹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재촉하려는 욥의 마지막 안간힘이라 할 수 있다(Habel).

 

욥은 언약의 동의어인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개입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재판 형식으로 기록된 욥기의 피고자인 욥이 마지막 증인으로 하나님을 요청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둘째는 자신의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세째는 5절의 순전함을 두고 맹세한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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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 원문은 오히려 '나의 호흡(, 네솨마), 즉 생명이 아직도 내 속에 있는 한'이란 의미이다. 맹세자의 서언적 상투어구(2)와 맹세 내용(4절 이하) 사이에 위치한 본 삽입구는 (1) 맹세 내용을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엄수하겠다는 결의이자, (2)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한, 자기의 맹세 내용 역시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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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 법정에서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Habel).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이어지는 구절에서(5, 6) 선언하고 또한 29-31장에서 더욱 소상히 언급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자기 주장이 결코 거짓에 의한 것이 아님을 힘주어 강변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욥은 자기 입술에 궤사가 없고 또한 자신은 선악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6:2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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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상으로 본절은 '내가 죽기 전에는 결코...하지 않는다'는 형태의 문장인데 이는 맹세의 또 다른 형식이다(RSV, Far be it from me to say that you are right ;till 1 die I will...from me).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만일 욥이 친구들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면 그것은 곧 신성 모독적인 범죄가 되며 따라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Habel, Hartley). 아울러 본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순전함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함께(2:3, 9) 자기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욥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G .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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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다크'는 법정적 혹은 도덕적 의미에서 '의롭다', '정결하다'는 뜻이다. 결국 여기서 욥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하등의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정 앞에서도 결백을 판결받을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23:11).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 '일평생'(, 미야마이)이란'나의 날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이다(Delitzsch,Lange). 그리고 '마음'(, 레바브)은 인격체의 중심으로, 여기서는 '양심'이라는 뜻이다(14:7; 삼하24:10). 그리고 '책망하다'(,하라프)'모독하다', '끌어내리다', '매도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나의 양심이 내가 사는 날들 가운데 하루라도 나를 비난하거나 모독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 여기서 욥은 그의 친구들이 비난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양심의 가책이나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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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 자신의 순전성을 단언한 욥은 이제 자기 대적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여기서 '대적'(, 오예브)은 사단이 아니라 욥을 무조건 비난했던 그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욥은 자기를 악한 자로 비난한 친구들을 도리어 '사악한 자'(, 라솨)라고 부르며 그들의 결말이 사악자의 그것처럼 되기를 원한다. 한편, 욥의 이러한 바램은 저주의 상투적인 형태(, 예히...오예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KJV, Let mine enemy be as the wic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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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 7절에 피력된 저주 섞인 소원은 본절로부터 10절에까지 묘사되는 악인의 처지에 관한 설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사곡한 자'(, 하네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차'는 특히 약탈이나 폭력에 의하여 얻어진 이익을 뜻한다. 그러나 '바차'가 피엘형으로 '끊어지다', '잘라 버리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혹 '불경건한 자가 끊어질 때'라고 번역하기도 한다(NIV, R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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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 환난이 사악한 자에게 임하는 때에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여도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며 그의 기도는 거절된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의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교제와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위로도 받지 못하며, 오히려 절망적인 상태에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오직 상한 심령을 가진 자,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께 구원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86:1-4). 욥은 여기서 비록 자신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사악자의 종말처럼 파멸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서 결국에는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다(13:16;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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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 이것은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발언을 상기시킨다(22:26). 엘리바스는 욥에게 전능자를 기뻐하라고 충고하였지만 욥은 자신이 전능자를 기뻐하지 않는 사악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욥은 전능자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도 않는 교만한 자와는 달리 자신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확신으로 굳게 서 있음을 말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이 악한 자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 이는 '환난과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그들이 안다고 할지라도, 전능자를 기뻐하지도 않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또 전능자에게 소망을 두겠는가?'라는 뜻이다. , 여기서 욥은 사악한 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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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친구들이 욥을 교훈하려 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도리어 욥이 그들에게 충고와 교훈을 베풀려는 의도를 타나낸다. 또한 본절과 12절에는 12:7-13에 나타난 모티브들이 엿보인다. 즉 자연 세계를 통한 '가르침'(12:7), '하나님의 손'에 관한 진술(12:9)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손에 대하여'(,베야드엘)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욥의 생애에 하나님의 고난으로써 개입하신 사실을 암시한다(10:7; 12:9; 13:21; 19:21).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 ,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나 숨겨진 뜻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13절 이하에서 언급되거니와, 욥은 친구들과는 달리 원칙론과 현실 사이의 모순점을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적하며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J. E.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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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 욥은 친구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과 행사를 매우 박식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 단편적이기 때문에 욥의 가르침으로 더욱 온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 직역하면 '왜 너희가 헛된 것으로 헛되게 만들었느냐?'이다. , 욥은 친구들의 지식을 인정하지만 그 지식의 적용이 자기에게 있어서 잘못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욥 자신의 불의나 사악함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어떠한 근거도 없이 단지 인과 응보식의 지식만을 가지고 헛되이 생각하고 헛되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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