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4장,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있는가?

호리홀리 2016. 3. 23. 10:58

 욥은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했다. 첫째는 악인들이 더욱 기세 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하던 자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편파적이고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현재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 혹은 보응의 원칙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이다(E. B.Sm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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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를 옮기며 - 이제 욥은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지계표''경계를 짓다', '한계를 정하다'의 히브리어 '가발'에서 온 명사로 땅의 경계를 구분하는 도구이다. 고대 동방에서는 이웃하는 땅의 경계를 담이나 울타리를 쌓지 않고, 돌이나 바위 등을 경계선 자리에 놓아 표시하였다. 이러한 지계표를 옮김으로써 이웃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아 소유하려는 죄악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저주받는 이로 금지된 사항이다(19:14;27:17). 또한 이것은 지혜서(22:28;23:10)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5:10)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로 죄악시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 행위는 개인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칠십인역(LXX)'어떤 사람'에 해당되는 주어를 본문의 주제에 맞도록 '사악한 자'라고 표기하였다.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 '빼앗다'의 히브리어 '가잘''벗기다', '잡아뜯다', '강탈하다'의 뜻이며, '기르며''방목하다', '풀을 먹이다'는 의미이다. , 그들은 양떼를 강제로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뻔뻔스럽게도 탈취한 양떼를 공개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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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 '몰아가다'의 히브리어 '나하그''몰다','끌어내다'란 뜻이다.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는 나귀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유일한 노동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귀를 약탈하는 행위는 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 원문에는 '' 앞에 '멍에 메인'(, 알람)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여기서 ''(,쇼르)는 농경에 필요한 황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볼모잡다''하발''담보물로 속박하다'는 뜻으로 과부의 생활 밑천인 황소를 저당물로 빼앗음을 의미한다. , 아주 적은 부채를 이유로 과부의 전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그 재산이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죄악의 무게를 더해 준다.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외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율법은 그들의 송사(訟事)를 억울하게 하지말고(27:19;1:23), 또한 그들의 재산을 전집(典執)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24:17). 한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 Code)에 따르면 이러한 약한 자들을 탈취하는 행위에는 벌금이 부과되었는데, 특히 과부와 고아의 물건을 빼앗는 경우엔 두 배의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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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몰아내나니 - 빈궁한 자들을 자기들이 다니던 길로부터 밀어내어 방황하도록 만들거나(Delitzsch), 약탈 행위로 인하여 그 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J. E. Hartley). 가난한 자들은 압제자들에 의해 길에서마저 쫓겨 다녀야했다. 혹자는 본문을, 가난한 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나(Anderson) 그 근거가 희박하다.

 

 다 스스로 숨는구나 - 그들은 압제를 피하여 ''(, 에레츠)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5:5;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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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 에 대해서 혹자는 2-4절의 '사악한 자들' '약탈자'로 생각하지만(Matthew Henry, G. Rawlinson), 이보다는 오히려 압제자들로부터 억압받는 가난한 자 (4)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Delitzsch, Driver, Gray,Lange, Tyndale, Pope, Hartley). 본절에서 욥은 피압제자들의 상황을, 험난하고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들나귀의 모습에다 비겨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39:5; 8:9).

 

 광야가...식물을 내는구나 - 여기서 '광야'(, 아라바)'건조한 땅', 또는 '사막'을 가리킨다. 혹자는 '아라바''에레브'로 보고 ''이라고 옮긴다(Dohrme), 이럴 경우 본문은 '그들이 밤늦도록 수고해도 아이들을 먹일 음식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하다. ,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서 칭얼대는 자식들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설 곳이라고는 광야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LB, They are sent into the desert tosearch for food for their children).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사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生存)에 필요한 음식조차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분명 욥의 눈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사악한 자들의 압제로 인한 결과로 보였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욥은 그러한 불의(不義)를 가만히 두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24:1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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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서 나의 곡식을 베며 - '남의 곡식'의 히브리어 '벧릴로'는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1) 고르디스(Gordis)같은 학자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유사하게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곡식'으로 옮긴다. 이 경우에는 가난한 자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도둑질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름을 암시한다. (2) 이 말을 '섞다', '혼합하다'란 뜻의 '발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혼합된 가축 사로'(mixed fodder)라는 의미로 이해한다(Lange). 이 해석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가축 사료로나마 배를 채워야 했다는 뜻이다. (3) 본절 하반절의 '악인'과 대구를 이루게 하기 위해, '벧릴로''악한' 이란 뜻의 '벧리알'로 읽는다(Pope). (4) 이 말을 '밤에'(in the night)란 뜻의 '발라엘라'로 읽는다(Dhorme). 이중 (1)(2) 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 직역하면 '그들이 사악한 자의 포도원에서 남겨진 것을 따다'이다. 이는가난한 자들이 심지어 악인의 밭에 남겨진 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뜻인 듯하다(LB, glean in the vineyards of the wicked).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을 얼마 남겨두는 규정은 율법에도 있다(19:10; 24:21). 그러나 악인이 가난한 자를 위해 열매를 남겨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렇게 곡식을 모아봤자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악인'이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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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이어 본절과 8절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의복이 없어...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 가난한 자들은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이 없어서 추위에 몸을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워낙 가난해서이기도 했지만, 악인들에게 볼모잡힌 것을 돌려받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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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 그들은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피하지만 거기에서도 소나기에 흠뻑 젖어 어찌할 바 모른다. 여기서 '소나기'(, 미제렘)'쏟다', '흐르다''자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맹렬하고 거센 폭풍우를 가리킨다.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 '안고'의 히브리어 '하바크''포옹하다', '손으로 꼭 껴안다'라는 뜻으로 편안히 쉴 곳이 없어서바위라도 의지하여 추위와 소나기를 피하려는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혹자는 '하바크''바위 틈 속으로 몸을 밀어 넣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찬 바람과 산중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줄 구석을 찾는 것이라고 본다(Wetzstein). 이처럼 바위밑에 몸을 숨기는 것은 아마 그들이 바위 밑에 천막을 치고 살거나 아니면 바위밑 동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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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 여기서 '어미 품'에 해당되는 '쇼드'는 원문에서 단지 '가슴' ''을 가리킨다(60:16 ; 66:11). , 어미의 젖가슴이다(70인역, KJV, NIV, RSV). 그리고 '빼앗다''가잘''벗기다', '잡아채다', '강탈하다'란 뜻이며 '고아'에 해당하는 '야톰''홀로 있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특히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아직도 어려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한 채권자들이 아비 없는 아이를 그 어미가 빚을 갚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담보물로 빼앗아 간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치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는데, 채권자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아니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5:5)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왕하 4:1). 이것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자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포악한 행위로서 그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켰다. 한편, 본절은 사악한 자들의 행동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으로 문맥상 3절과 4절 사이에 오면 더 자연스러울 듯 싶다(Hartley, Pope).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맛소라 원본상으로는 '', '...위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은본절 상반절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가난한 자의 옷'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아이'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 가난한 자가 돈이나 곡물로 부채를 갚기도 전에 채주들은 그들의 유아들을 담보물로서 압류한다는 의미가 적당하다(LB). 여기서 '볼모잡다''하발'은 담보물로 속박하기 위하여 '압류 또는 탈취하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파괴하다', '멸망시키다'란 뜻도 있으므로(34;31) 본문을 사악한 자들이 자기들 의 이익만을 위하여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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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 이미 7절에서 비천한 자의 헐벗는 모습을 묘사한 바 있는데, 7절이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의 결핍을 말한다면, 여기서는 노동자들이 안전 사고에 대비한 작업복마저 입지 못하는 형편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J. E. Hartley). 이것은 압제자의 비정한 착취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압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억압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시켰지만 그에 필요한 어떠한 대가나 보호해줄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곡식단을 날라야만 하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압제자들은 짐승들에게도 금지해서는 안 될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고 있다(25:4). 그것은 노동의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여 정죄하고 있다(24:14, 15; 딤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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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 안에서...술 틀을 밟느니라 - 여기서 ''(, 슈로탐)은 원어의 뜻이 불명확하여 해석상의 논란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또는 '축대'(18:29;5:10)의 의미에 동의한다(KJV, NIV). RSV는 이를 '나무의 줄(row) 사이'로 번역하며, 혹자는 ''과 관련된 '맷돌'(millstone), 또는 '노래''암소'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타당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본문은 압제자들의 담 안에서(KJV, within their walls) 올리브 기름을 짜며,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낫다. , 압제자들의 매우 철저하고 혹독한 감독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정원 안에서 비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포도주의 틀을 밟고 잇지만 가장 가깝게 있는 포도즙으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욥은 이러한 성읍 내에서의 불의와 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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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 이제 욥은 도시 가운데서 행해지는 강포와 불의에 대해 언급한다.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팀'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1) 뒤에 나오는 '상한 자'와 대등구로 보고서 압제자의 횡포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경우(70인역, NIV, LB, RSV, Lange, Dlitzsch ). (2) 조금 약한 의미에서 '심한 곤경에 처한 자'로 해석하는 경우(수리아 역, KJV, Jerome, Symmacus ). 이 둘 중에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에 더 자연스럽다. , 압제와 심지어는 살륙으로 인하여 상하며 죽어가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음하며''나아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외치는 부르짖음을 뜻한다(Dlitzsch, 51:52 ; 30:24).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부상당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다'이다 여기서 '상한 자'(, 할라림)는 단순한 부상이 아닌 치명적인 상처로 거의 죽게된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억울하게 습격당하여 거의죽게 된 자들이 매우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는 원래 '어리석은 짓'(1:22)을 뜻하는데(KJV), 여기서는 사악한 범죄 행위, 또는 도덕 질서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행위를 뜻한다(Dlitzsch) 즉 사악한 자들이 도덕 질서, 또는 신적 법칙을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채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Lange). 한편, 두 개의 히브리어 사본과 수리아 역은 '티플라''테필라'로 읽어서 본문을 '그러나 하나님은그들의 기도를 들은 체도 않으신다'로 해석한다(RSV). 이런 해석도 본절의 주어가 억압당하여 상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는 하다. 결국 욥은 이 땅에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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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욥은 앞서 언급한 사악한 자들외에 또 다른 부류의 악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빛을 반역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십계명의 제 6, 7, 8,계명을 어기는 살인자들(14), 간음자들(15), 밤도둑들(16)이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은 본절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광명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덮여진 은밀한 죄악을 남몰래 행하는 것이다(Anderson). 그런데 밤과 어두움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감춰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하다(34:22).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 '광명''오르'''을 뜻하지만 그해석은 다양하다. (1)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자연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이라고 보는 견해(Habel). (2)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빛이 있는 ''으로 보는 견해(Pope). (3)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보는 견해(Ezra). 여기서는 이 세가지 해석 모두가 가능하다. 한편 '배반하다''마라드''반역','배도'를 뜻하며,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빛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빛의 원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ge, Delitzsch).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 '알다''히키르''인식하다', '익히알다', '관심을 갖다'란 뜻이다. , 악한 자들이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그 유익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 악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움 가운데서 계락과 음모를 꾸밀 뿐, 그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밝은 곳은 어디든지 가까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의 길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며(Dlitzsch), 삶과 진리의 근본이 빛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빛의 고상함과 의로움을 발견한다할지라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한다. 한편 '머물다''돌이키다'로 해석하는 경우(70인역, 수리아역, 벌게이트역)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거주하다', '살다'는 의미가 더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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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일어나서 - '새벽'(, 라오르)은 동이 트기 전의 캄캄한 어둠의 때를 가리킨다. 즉 악인은 인적이 드물고 주위가 캄캄한 때를 골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동하는 궁핍한 자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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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 직역하면 '어두움을 살피는 간음자의 눈'이다. 여기서 '바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주의 깊게 지켜보다', '관찰하다'란 뜻으로 은밀하게 행하기를 원하는 음탕한 마음을 타나낸다(7:9). 그리고 '저물다''네쉐프'는 해질 무렵, 곧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황혼 무렵을 가리킨다. 결국 본문은 음행의 수치와 그 죄를 감추기 좋은 어두움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간음자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얼굴을 변장하며 - 직역하면 '그가 베일을 얼굴에 얹다', 곧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베일''세테르''숨기다', '감추다''사타르'에서 유래된 명사로 가면이나 마스크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생략하고 위장한다는 의미로만 번역한다(KJV, NIV, RSV).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마스크 같은 것이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들어 '세테르'가 기혼 여성들이 얼굴에 착용했던 '베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Delitzsch). , 간음자가 여자의 옷으로 변장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Pope). 이러한 위장은 밤에 더욱 용이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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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는 문을 닫고 - 탈무드와 고대 랍비들은 도적들이 밤에 뚫고 들어가기 위하여 낮에 미리 대문에 표시해 두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닫다'(, 하탐)'()하다', '밀폐하다'란 뜻으로 자물쇠로 문을 잠가두는 것을 의미한다(9:7; 14:17). , 도적들이 낮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집의 문을 잠그고 몰래 숨어 있다는 뜻이다.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 '알다'(, 야다)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이해 이상으로 감정적 동화(同化)까지 포함한 전인격적인 교통과 사랑을 의미한다. , 그들은 빛과의 사귐 또는 교제가 전혀 없었음을 의미한다(13절과 비교하라). 그들은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일을 행하며 어두움과 밀접한 교제를 나눈다(1:5,11). 한편,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으며(8:12), 나아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도록 빛의 아들이 될 것을 교훈하셨다(12:3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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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 원문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흑암이 그들에게는 아침이 되기 때문이니'이다. ,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그들에게 발각될 위협을 가져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깊은 밤은 그들에게는 아침처럼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의미이다. 도적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숨겨주는 어둠이 올수록 기뻐하면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흑암''죽음의 그림자'(shadow of death)로 번역하여 간접적으로 도적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묘사하기도 한다(KJV).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 , 깊은 밤이 도적에게는 아침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밤의 위협적인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밤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도리어 그런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피하는 것에 능하다(Dlitzsch). 그들은 어두움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집을 뚫고 재산을 훔치는 데 교묘하고 능란하다. 이와같이 어두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빛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고후 6:14). 한편, 본절의 '흑암의 두려움'에 대해서 혹자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M. Henry). , 사망 또는 수치의 공포가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그들에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어두움과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L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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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 , 악인들의 존재는 물 위에 떠서 빨리 흘러가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쉽게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9:26 ; 10:7).

 

뜨거운 태양이 눈을 녹이고 물을 증발시키듯이 음부(陰府)가 악인을 재빨리 채간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절을, 평생 죄를 짓고 불의하게 살았던 자들의 죽음이 고통이나 괴로움없이 찾아와 그들을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처절한 고통이 임하기를 바라는 욥의 불평 섞인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악인의 허망한 파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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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가...먹을 것이라 - 본문의 두 문구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한다. 즉 악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조차 버림을 받으며 그를 가까이하고 달려들 자는 구더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의 히브리어 '레헴'''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를 잉태한 모친'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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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자의 생전에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밝히 증거되고 있다. 이것은 욥이 불의한 현실을 명백하게 고발하기 위한 구절이다. , 욥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악한 자의 불의한 죄악이야말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눈에 목격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은 흥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욥 자신의 처절한 체험이기도 했다. 이것이 욥의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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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 '강한 자'에 해당하는 '아비림''능한', '용감한'의 뜻을 가진 '아비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자기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교만하고 대담스러운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역하는 자들이기도 하다(Delitzsch, 46:12). 그리고 '보존시키다'(, 마솨크)'끌다', '연장하다'는 뜻으로 생명을 길게 연장시켜 계속 살아가게 함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는 이 동사를 자동사로 보고 그 주어가 '강한 자들'이라고 이해한다(Gordis). 그러나 악인의 번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는 내용이 본문의 문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동사의 주어는 오히려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이 오히려 스스로 거만하게 행동하는 강한 자들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뜻이다. 욥은 이처럼 모순된 현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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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평안케 하시나 - '호위하다''바타흐''신뢰하다', '담대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일에) 담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휴식하도록 만든다는 욥의 불평이다.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 한편 원문상으로 본절 상반절과 하반절을 이어주는 접속사 '와우'는 순접 관계(and) 혹은 역접 관계(but) 등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순접 관계로 볼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불법 행위와 계략들 위에 오히려 빛을 비추어서(10:3) 안전하게 성공하도록 악행을 도우신다는 의미가 된다.(LB, and helps them in mamy ways). 반면에 역접 관계로 보면 본문은, 24절 내용과 연결되어 악인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나타내는 셈이 된다(KJV, yet his eyes are upon their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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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 '높아지다''라맘''스스로 일어서다', '높이 세우다'란 뜻으로 악인의 교만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변론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 이 변론(23, 24)이 진행되는 동안 욥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끝내 불신할 수 없었던 욥으로서는 본절에서처럼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는 강한 기대감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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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을 누구든지 공박할테면 해보라는 투로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욥은 그 친구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또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주실 분은 하나님이며, 또 이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22). 따라서 욥의 현재의 소망은 극심한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리라는 생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