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3장,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호리홀리 2016. 3. 21. 10:11

엘리바스의 비난과 충고에 대하여 욥은 직접적인 변호 대신에 자신의 고통받는 현실을 불평하며(2),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변론이 정당하게 인정받게 되기를 소망한다(3-7). 그러나 동시에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8,9) 자신의 무죄함을 강조하고 (10-12)절 자기도 모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행하시기 때문에(13,14) 그를 두려워한다고 토로한다(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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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 (감 하이욥). 일반적으로 '지금도' 또는 '항상'을 뜻하는 표현이다. 혹자는 이 표현이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그보다는 '심지어 지금까지도'(even now)의 뜻으로 보는 것이 더자연스럽다(Delitzsch).

 

 혹독히 원망하니 - '혹독히'(메리)는 원래 '고집하는', '반역하든', '맛이 쓴', '독한'등의 뜻이다. 혹자는 히브리어 '메리''반역하는'(rebellious)의 뜻으로 보고 , 여기서 욥이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망을 토로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Delitzsch).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을 보건대, 이 히브리어를 단지 '독한', '''(bitter)이란 뜻으로 보고 욥이 친구들에게 반박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Anderson).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 '받는 재앙'의 히브리어 '야디''나의 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70인역(LXX), 수리아역, NIV, RSV 등에서는 '그의 손'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야디의 접미어를 '요드'(my)로 읽지 않고 '와우'( his)로 읽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위에'가 아닌 비교급 전치사(...보다도)로 보거나 혹은 양보의 접속사로 보아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할때 본문의 의미는 '나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RSV), 혹은 '나의 형벌은 나의 결함보다 훨씬 무겁다'(LB) 등의 두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잇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 중에서도, 본장에서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뜻이 더 타당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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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 욥은 자신의 극심한 고난에 대해 잠시 언급한 후, 본절에서부터는 곧장 자신의 주된 관심사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 주된 관심사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받아 보려는것이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확신하였고 더욱이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을(89:14) 믿었기에 기필코 하나님께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J.E. Hartley).

 

 그 보좌 앞에 - '보좌'( 테쿠나토)'이미 준비되거나, 배열된 거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특히 하나님의 법정이나 심판대를 가리킨다(E.B. Sm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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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5

욥은 하나님 앞에서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을 마음껏 털어놓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든지간에 거기에 순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변하지 않으며 욥 자신의 결백함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훗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실 때, 욥은 두려움 가운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40:2-5). 따라서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40장 사건을 염두에 둔 극적 암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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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물에 다투실까 - 다분히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이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권세와 능력을 남용하여 멋대로 판결을 내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와 진리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혹자는 '큰 권능''대리인'으로 해석하여, 본문을 '하나님은 (너희와 같은) 대리인을 통해 논쟁케 하시지 않고 이제 직접 말씀하실 것이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Tur-Sin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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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거기서는 - (). 이를 공간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또는 '보좌 앞'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35:12;14:5;66:6;1:14) '그때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dewilde, Gordis). '하나님과 변론하는 그 때에'라는 뜻이다.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 즉 - 욥은 하나님께서 '정직자'(야솨르)의 변론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한다. 물론 여기서 '정직자'란 곧 욥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란 거룩한 존재 앞에 직면했을 때 욥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40:5). 욥은 극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 고난의 원인을 밝혀보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변론의 상대자가 아니라 오직 순종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 '벗어나리라'( 팔라트)'해방될 것이다', '피하게 될 것이다'하는 뜻으로 심판자의 형벌(또는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리라는 의미이다. ,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함과 순전함이 입증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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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9

여기서 욥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해 잠잠하시는 소위 '숨어계신 하나님'(thehidden God)을 의식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 어디로 도망가도 좇아오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니님을 증거한 바 있다(139:7-10). 반면에 욥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헤어려 주사 믿음의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였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욥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다만 문제 해결의 과정이나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 원어 '케뎀'은 동쭁을, '아호르'는 서쪽을 가리킨다. 히브리인과 아랍인들은 동쪽을 바라보고 전후 좌우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Habel, Hartley). 따라서 동쪽은 '', 서쪽은 '', 남쪽은 '오른편', 그리고 북쪽은 '왼편'을 각각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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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나의 가는 길'을 직역하면 '나와 함께 있는 길'이다. 바로 앞에서 욥은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한 바 있다.(8,9). 그러나 욥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J.E.Hartley).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고, 고난 뒤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욥의 확신과 기대는 절정에 다다른다. 욥이 자신의 시련을 금 제련에 비유한 것은 그의 염원이 재물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인격과 영예의 회복이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과 은처럼 여기라고 충고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인격과 신앙안에서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종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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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과 12절에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정에서 승소할 수 있다고 믿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교훈과 법도를 무시하는 자라고 공박한 적이 있다(15:4;22:22). 그러나 욥은 일거수일투족을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음을 담대히 고백한다. 이는 시편 119편 기자의 고백을 상기시킨다(119:105, 131, 147).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9:20), 곧 그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였다는 뜻이다(J.E. Hartley).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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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 '일정한 음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후키'는 보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일정한 음식'(LB,NIV) 또는 '필요한 양식'(KJV, 47:22;30:8). (2)'나의 가슴속에'(70인역, 벌게이트역,RSV). 이 경우는 '메후키''베헤키'로 읽기 때문이다. (3)맛소라 사본(MT)에는 '나의 규칙, 법칙'으로 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단정적으로 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의미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1)의 견해는 말씀을 사모하는 열성이 특출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2)는 말 그대로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명심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3)의 견해는 특별히 욥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나의 규칙, 법칙'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있는 본성의 법, '지체의 법'(7:23)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욥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거부하고 주의말씀에 순종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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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 본문의 원어적 의미는 보통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된다. (1)'그는 한 분이시며, 홀로 계신다'(Gordon, J.E. Hartley) : , 하나님의 절대적 위엄과 유일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서 표현되고 있지만(6:4), 본 문맥에서는 연관성이 다소 희박하다. (2)'그는 통치자이시다' : 다후드(Dahood)는 우가릿 문서(UT, 51, , 49-50)에 나오는 '나만이 신들을 통치할 것이다'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본문의 '에하드''통치자만이'로 해석한다. (3)'그가 선택하신다'(Pope):이것은' 베에하드''베에하르'( '선택하다')로 취하여 시 132:13의 상반절(...택하시고)과 하반절(...삼고자 하여), 그리고 본절이 서로 대구를 이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 제()해석들로서는 본문의 의미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 변개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을 고백하고 있다고 본다(KJV, he is in one mind ;RSV, he is unchangeable). , 이유야 어쨌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과 그 목적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욥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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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 여기서 '이런 일'이란, 욥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유 없는 고통을 내리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욥 자신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욥 자신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그의 절대적인 섭리하에 행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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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의 변론을 전형적인 비탄조의 탄식으로 끝맺고 있다(15-17). 그러나 이러한 탄식이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소망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35-37). 또한 이러한 탄식이 10-14절에 나타난 고귀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다만 욥은 견디기 힘든 현실로 인해 저절로 고통스런 절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Anderson, H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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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 직역하면 '나의 마음을 연약하게 (또는 앓게) 만드셨다', 즉 용기를 빼앗아 가시고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 동사'헬라크''부드럽게 (또는 약하게) 만들다'라는 뜻이 있다(20:3). 욥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압박뿐만 아니라 미래에 당할지도 모르는 모든 위협을 생각하고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다. (15절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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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왜냐하면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의 히브리어 '로 니츠마티'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 때문이다. 맛소라 사본에는 한글개역 성경과 같이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했다'로 되어 있고,KJV'(어두움 앞에서) 멸절되지 아니했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NIV'니츠마트'의 어근을 따라 '(어두움 앞에서) 침묵하지 아니했다'로 해석하며, RSV는 부정어 ''를 생략하여 이해한다. 혹자는 감탄문으로 번역하여 '내가 멸망당하지 아니하였도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칠십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내가 어두움이 오기 전에 끊어짐을 당하지 않았고'라고 해석한다. , 멸망당하지 않음으로써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도 욥이 환난이 이르기 전에 죽지 못하고서 여러 가지 고통에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중 어떤 견해를 따르더라도, 욥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타나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