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2장,전환

호리홀리 2016. 3. 21. 10:0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2).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충족성(自充足性)에 대하여 잘 표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혜택을 받으실 일이 전혀 없으시다. 그 이유는 그가 절대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 116:12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롬 11:35에 말하기를,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 40:12-17참조.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을 행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익을 베푼다" 하지 말고, "내가 이렇게 함으로 결국은 내게 유익이 있게 된다"라고 고백해야 된다. "네가 의도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3). 이 말씀은 인간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기쁨을 증가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시므로 인간에게 보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가 물론 인간의 참된 의()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있으시다. 그러나 참된 의는 사실상 그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그의 기쁨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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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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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 엘리바스는 아무 증거도 없이 욥을 큰 죄인으로 몰아 넣는다. 이것은 그의 추측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욥이 저런 극한 환난에 빠진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극한 범죄 때문이지 결코 그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인과론(因果論)의 결론에서 가정(假定)된 것이다. 포렐(G. Fohrer)도 이와 같이 풀이한다(Sie sind eden Postulat der Doktrin, welche verlangt, dass Hiob so und so gehandelt haben muss. Dem entspricht, dass in den Beschuldigungen ein typisches Bild des Sunders begegnet.-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1963, s.556). 엘리바스의 이같은 논법은 고난 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상선벌악 보응론의 일변도의 논법이다. 그가 고난 문제를 이렇게만 취급함은 너무 편협하다. 하나님의 고난 섭리는 이밖에 오묘막측한 방면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늘 쉽게 깨닫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받는 자를 만났을 때에 판단보다는 먼저 동정과 구조를 앞세워야 한다(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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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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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닭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 가난한 동포에게 돈을 빌려준 일도 없이 잔인하게 물건이나 의복을 전당잡는 악한 행위를 말함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법(22:26)을 범함이다. 하나님은 이런 무자비한 행동에 대하여 벌을 내리신다(22:22-24; 27:19).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행함을 큰 죄로 보신다.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하였고, 22:22-23에는 말하기를,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라"고 하였다. 엘리바스의 말은 진리이지만 그것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21:16-20).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이며(23:30), 그는 병자에게 약을 잘못 처방해주는 거짓 의사와 같다(23:30). 교역자가 하나님의 교회의 회중에서 설교할 때에 성경 말씀을 사용하기는 하면서 그 회중에 적합한 말씀을 바로 찾아서 전하지 못하면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혹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교역자는 (1)하나님의 양 떼의 요구를 깊이 또는 바로 알아야 되며, (2)성경을 깊이 또는 바로 알아야 참 목자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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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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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 이렇게 행하는 자는 (1)무자비한 자임. 사람이 기갈을 당한 자를 눈 앞에 놓고 어떻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으랴? 만일 못본 체 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 기갈에 처한 자를 죽이는 자와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 자신도 사망에 거하는 자이다(요일 3:14,17). (2)불의한 청지기임. 사람이 가진 풍부한 재물은 사실상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며(고전 4:7), 따라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 뜻대로 남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하나님의 청지기이다(12:42-44, 16: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의 맡은 물질로써 자기만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12:45-48). (3)극단적인 개인주의자임. 그는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으니 남에게 유익한 것은 사소한 것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옛날에 중국의 철학자 양주(楊朱)"머리털 한 개를 뽑아서 온 천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22:39)과 정반대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는 죄악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진리이지만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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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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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 이것도 욥을 오해하여 정죄하는 말이다.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 욥이 권세 있는 자를 도와주어 그로 하여금 토지를 탈취하게 하여 거기서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욥이 불공평하게 재판하여 강자의 편에 들어서 약자를 억울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시 욥에게 공연한 누명을 씌우는 거짓말이다. 욥은 사실상 그런 불의한 사람이 아니다. 31:21-23에 말하기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송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 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권세 있는 자" 또는 "존귀한 자"는 욥 자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엘리바스의 말 자체는 진리이다. 그것은 약한 빈민을 착취하는 집권자의 죄를 책망하는 말이다. 이런 책망은 흔히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횔쉘(G. holscher)도 이 해석과 유사한 말을 하였다(Die Kennzeichnung des Sunders ist typisch: es sind die Sunden, die das Gesetz von fruh auf verboten und die Propheten jederzeit gerugt haben, die Sunden, der herrschenden klasse, welche die Armen und Notleiden gewalttatig bedruckt.-Das Buch Hiob, 1952, s.57).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세를 주시는 목적은 약자들을 돕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것을 받아가지고 도리어 그들을 압제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와 정반대 되는 마귀의 사자이다. 왕상 21:1-16; 22:22-23참조. "과부...고아." 과부나 고아를 압제함은 큰 죄악이다(22:22; 27:19; 7:6;22:3; 7:10).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0:18, 14:29, 16:11, 14, 24:19, 26:11-12; 1:17). 1:27참조.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나(5:7), 남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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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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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 여기 진술된 벌은 모두 돌연한 것이고 무자비한 것이다. 이것이 욥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5-9절에 진술된 범죄자는 마땅히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무자비한 죄악은 무자비한 벌을 받음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벌의 성격은 종종 그것을 받는 자의 죄상에 비례되는 일이 있다(18:24-26). 이 징벌이 그 범죄자에게 임하는 방식이 돌연한 듯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벌을 예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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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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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모든 것들을 다 아신다는 의미와 같다. 높은 곳에 계시는 이가 땅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다스리신다는 의미는 성경 다른 데도 있다. 11:4; 5:2; 4:10 참조.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욥을 오해하고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로 흠을 잡는다. , 욥이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시는 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극히 악한 죄인들의 사상이다(21:15). 29:15; 23:24; 8: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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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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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할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  엘리바스가 욥의 말(21:14-16)을 풍자하는 뜻으로 말한 것 뿐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 포함된 사상을 욥의 말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21:14-16의 해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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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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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을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 극도로 악한 자들이 끊어질 때에 의인들은 기뻐한다. 11:10에 말하기를,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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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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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부탁한다 사람은 다 평안을 원한다. 그러나 평안도 거짓된 것이 있고 참된 것이 있다. 이 세상 평안은 모두 다 거짓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참된 것이다. 사람이 진정한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다음과 같이 살아야 된다. 1.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둘것(22). "마음에 둔다" 함은, 피와 생명이 움직이는 심장, 곧 애정 속에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애정을 붙이지 않는가? 그 원인은 나의 좋아하는 대로 하려하고 하나님의 교훈대로 할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왜 사람들이 자가의 좋아하는 대로 행하는 습성으로 기울어지는가?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알아야 된다. 순종치 않는 자식의 경우를 들어 생각해 보자. 그는 부친의 말을 순종치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부친의 말을 듣는 것조차도 싫어한다. 그는 왜 순종치 않을까? 그것은 그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가사(家事)에 협력하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욕심의 충동을 따라서 나쁜 동무들과 노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은 언제나 그 부모의 생각과 엇갈린다. 그는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부모보다 나쁜 동무들을 더 좋아한다. 그와 같이 신자가 그 생활 목표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의 소원대로 할 마음이 간절한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 그는 이름으로만 신자이고 심령으로는 자기를 중심하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중심주의로 살 때에는 그의 행한다는 소위 선()도 참된 선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선악간에 모두 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2. 전능자에게로 돌아갈 것(23). 하나님께로 돌아감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 뿐이 아니고 진실되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에게로 돌아갈까? 그것은 우리가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하므로 실행된다. "장막에서 불의"는 가정의 죄악을 말함이다. 밖에 나가서는 점잖은 듯한 사람이 가정에 들어가서는 마귀 노릇을 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가정에서는 허물이 가리워지는 줄 알고 조심 없이 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속은 생각에서 연출한 행동이다. 사람은 그 가정에서 옳게 행해야 그 자신도 잘되고 발전한다. 가정은 사람의 생활의 근거점이다. 자녀된 자들도 그 가정에서 바로 행해야 그 앞길이 형통한다. 30:17에 말하기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들의 불행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녀는 결국 집을 망케 하니 집 없는 사람처럼 된다. 그런 사람은 어느 사회에서도 생활 근거를 얻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다가 패망하게 된다. 22:23"불의를 멀리 버리라"는 말씀은 귀하다. 사람이 죄를 가까이 하면 범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죄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 1:1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3.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을 버릴 것(24). 위의 본문에 말하기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고 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보배롭게 여기는 고질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되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사상을 버려야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도 진토나 돌 같이 버리고 그것들에게 애착을 두지 말아야 된다. 우리가 보배롭게 여기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도 그것을 아까와 하는 심리로 바치면 안된며, 그것을 바친후에 진토처럼 잊어버려야 된다. 물론 이렇게 실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게 된다. , 우리가 보배로운 것들을 진토와 같이 던질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보배로운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바칠 때에 그것들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25절에는 말하기를, "그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한다(25).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한 일이라면 우리가 무엇인들 희생하지 못할 것이 있으랴? 6:19-24; 3:17-18 참조. 그러면 이와 같이 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 (1) 그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됨(26). (2) 그의 기도가 열리고 또 기도 응답을 받음(27절 상반). (3)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실한 것을 실행하게 됨(27절 하반). (4) 그의 경영하는 일이 형통함(28). (5) 그가 남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를 높여주심(29 ). (6)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을 받음(30)등이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면 축복을 받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 돈의 경중(輕重)을 다루는 처지에 서게 되는 수가 있다. 어떤 때에 우리는 직장 문제와 주일 지키는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직장을 지키려면 주일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경중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직장보다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는 직장을 지키지 못할 지라도 주일을 지키기로 용단을 내려야 된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설혹 생활에 타격이 올지라도 하나님에게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는 타격을 받지 않아야 된다. 심일조의 의의를 바로 알 때에 그것을 참되이 바치게 될 줄로 안다. 1. 십일조는 처음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사건에서부터 인류에게 알려졌다. (1) 아브라함의 자손된 기독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니 만큼 역시 십일조를 멜기세덱 곧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된다(4:12). 신약 시대의 교역자들은 구약 시대의 레위 자손에게 해당되는 것인 만큼 그들도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18:26). (2) 멜기세덱은 율법에 의한 아론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으셨으니 만큼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모든 기독자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으실 처지에 계신다(7:9). 십일조 제도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모세의 율법 제도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제사장 멜기세덱의 법에 의한것이다. 예수님도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다(23:23). (3)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 중하나이다. 7:6-7에 말하기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3:10"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겠다고 한다. 거기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큰 부자가 된 죤 록펠러(John d. Rockefller)는 첫 봉급을 150불 받았는데 그가 그 돈을 자기 모친에게 가져왔을 때에 그 모친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후에 백만불 수입되었을 때에도 십일조를 바쳤다고 한다. 2. 우리는 우리 생명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돈을 바치지 않을 것인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헌금을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하였다(고후 8:5). 그는 또 말하기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하였다고 한다(고후 8:2-3). 우리는 장차 죽음의 환난이 올 것을 내다보며 헌금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