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6장,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는 욥

호리홀리 2016. 3. 24. 09:20

  욥은 엘리후의 발언이 있기 전까지 매우 긴 변론을 행한다(26-31). 욥은 빌닷이 제기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오히려 승화시켜서 설명한다(5-14). 그러나 그에 앞서 빌닷의 발언이 적절치 못하다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비꼬고 있다(2-4). 왜냐하면 빌닷의 발언이 욥의 변론의 요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앞서 엘리바스가 언급한 것으로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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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 ''에 해당하는 '코아흐''생기', '능력'이란 뜻으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는 힘을 의미한다. '힘없는 자', 곧 욥은 빌닷의 유창한 연설이 무력한 상황에 있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잇다. 특히 히브리어 '''어떻게 그렇게 잘'이란 뜻을 지닌 조롱 섞인 말투로 사용되고 있다.

 

 기력 없는 팔 - '기력'(, 오즈)은 강한 힘이나 위엄을 가리킨다. 즉 더이상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기운이 욥에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에게는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빌닷의 충고는 오히려 더 맥빠지게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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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 없는 자 - '지혜''호크마'는 단순히 기교적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바로 유지시켜 주는데 긴요한 이론적인 명철함, 실천적인 유능함, 도덕적인 성실함 그리고 영적인 온전함 등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욥은 자신의 지혜 없음을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6:13) 빌닷이 그의 지혜를 충족시켜 주기는 커녕 오히려 무지를 폭로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큰 지식을 참 잘 타나내었구나 - 여기서 '지식'(, 투쉬야)은 도움이나 능력을 더해 주는 참된 지혜를 가리킨다(11:6; 12:16). , 욥이 고민하고 있는 '악인의 흥함과 의인의 고통'이라는 인간사의 난제와 자기의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아무런 유익이나 해답도 빌닷의 지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참된 지혜는 진실과 유익, 그리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욥의 항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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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말을 내었느냐 - '누굴 위하여 너의 정교한 말을 만들어 냈느냐?'(Lange), 혹은 '도대체 너의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이냐?'라는 뜻이다. 아무런 감동도 유익도 주지 않는 빌닷의 연설은 텅빈 강정에 불과할 뿐 욥 자신과는 털끝 만큼의 관계도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뉘 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 ''에 해당하는 '네솨마''호흡'이나 '영감'이란 뜻으로 '너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누구이냐?', 혹은 '그것은 신령하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빌닷의 말이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겨진 사상도 이미 엘리바스가 말한 것을(4:17-19) 반복하였음에 불과함을 상기시킨다. 신적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이처럼 무익할 수도 없으며 허공에 뜨는 말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32:8). 따라서 빌닷의 충고는 욥에게 있어서 전혀 무가치함을 알 수 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자 하나님의 변호와 위로였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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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이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대해서 하늘과 관련된 사실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25:2, 3) 욥은 하늘과 땅(7-13), 그리고 땅밑과 음부에까지 확대시키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권을 찬양한다(5, 6).

 

 음령들이 - 히브리어 '레파임'에 대해서 주로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1) '헐거운', '풀려지다''라파'에서 유래된 것으로 '죽은 다음에 몸이 없는 유혼들'이라는 해석(Lange), (2) '높다', '원기 왕성하다'란 뜻의 '신장이 거대한 거인들'이란 해석 등이다.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레파임'이 홍수시대에 익사한 네피림 곧 장대한 자들(6:4)로 보거나(M. Henry), 아니면 동부 요르단 지역에 거주하였던(2:10, 11; 12:4, 5) 멸종된 거대한 원주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Pope).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레파임'이 죽어서 저승에 거주하는 자들이라는 점은 일치한다(88:10; 2:18; 9:18; 14:9; 26:14, 19).

 

 큰 물과 수족 밑에서 - '큰 물'(, 마임)은 땅 아래 있는 물들을 가리키며(20:4), '수족'(, 샤켄)'큰 물'에 거주하는 물고기나 바다 괴물, 또는 바다의 동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밑에서'(, 미타하트)'음부'를 가리킨다. 한편 성경에서 '음부'는 줄곧 물로 인한 두려움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삼하 22:5; 42:7), 물은 땅 아래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4:18; 5:8) 음부와 물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떠나니 - 이에 해당하는 '''진통하다', '두려워하다', '흔들리다','고통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음부 세계에 거주하는 영혼들이 바다의 파도처럼, 땅의 지진처럼, 해산하는 여인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몸부림치며(Delitzsch), 공포 속에서 떨면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Lange,Rawlinson). 이것은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과 그의 위엄스러운 통치가 음부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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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부도 드러나며 - 즉 인간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음부의 세계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발가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아롬)는 것이다( 139:8; 15:11; 9:2).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 '멸망의 웅덩이'(, 아바돈)'쉐올'과 동의어로서 '파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파멸과 공포의 상징인 '무저갱'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생명이 파멸되는 무저갱과 그곳에 거주하는 존재들까지 하나님의 지식과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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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 '북편 하늘'에 해당하는 '차폰'은 원래'복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높은 산들과 바위들이 솟아 있는 북쪽 곧 가장 험준한 북편의 땅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어 왔다(Ewald, Scholottmann). 그러나 '펴다''나타'가 땅에 대해서 보다는 하늘에 대해서 곧 휘장같이 하늘을 펴셨다는 내용에 언급되기 때문에(104:2; 40:22; 44:24; 51:16; 10:12) 오히려 북편 하늘로 이해되어야 한다(Delitzsch, Kline). , 이것은 북반구의 하늘, 또는 하늘의 북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 중요한 별자리가 있는 북쪽 하늘인 것이다. 따라서 '허공''토후''황폐하다'란 뜻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40:17). ,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텅빈 우주 공간에 하늘을 휘장같이 드리우셨다는 의미이다

 

 땅을 공간에 다시며 - '공간'에 해당하는 '벧리마''토후'와 동의어로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을 뜻한다. 이처럼 우주 공간에 땅 곧 지구를 매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 능력의 위대성을 암시해 준다. 한편, 지구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그 무게를 지탱하며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은 '땅에 기둥이 있다'11; 9:6의 표현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문은 '무에서 유'의 창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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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 '싸다''차라르''묶다', '메다'란 뜻으로 두꺼운 구름 속에 물을 저장하여 보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하나님께서 홍수가 나지 않도록 물을 구름 속에 붙잡아 두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땅 위의 기상학적 조건이나 법칙까지도 하니님께서 정하시고 관리하신다는 시실을 보여준다.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아무리 많은 양의 비를 가진 구름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없이는 쏟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찢어지다''바카''터지다'란 뜻으로 아라비아인들이 여행할 때 휴대한 가죽 물주머니를 연상시킨다(G. 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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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 '가리우다''아하즈''붙잡다', '닫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구름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이다. '보좌'에 해당하는 '키쎄''케쎄'로 읽어서 '만월'(full moon)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나(NIV, RSV, 81:3; 7:20),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왕상 10:19; 66:1).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 , 하나님은 자신의 보좌와 영광스러운 광채를 구름을 펼치심으로써 땅에 사는 인간들의 눈으로부터 감추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하시는 뜻을 가리우는 계시의 감추심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궁극적인 신비를 쉽게 알 수 없으며 접근하지 못한다(왕상 8:12; 18:11). 하나님의 이러한 감추심은 인간의 지식과 판단으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분의 계시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미약함을 상대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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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으니라 - 이것은 '낮과 밤의 끝이 오기까지'(KJV)라는 시간적 한계보다는 '빛과 어두움이 접촉되는' 공간적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M. Kline). 다시 말해서 이 수평선을 경계로 윗 부분은 빛이 비취는 세계요, 아랫 부분은 흑암의 세계라는 것이다(Delitzsch). 고대인들은 땅이 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반대편(빛이 끝나는)에는 어두움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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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하늘 기둥이 높이 솟아오른 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떨다'(, 루프)는 격동에 의하여 심하게 흔들린다는 뜻이며, '놀라다'(, 타마)는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깜짝 놀라거나 감각이 마비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진동하는 모습을 나타내는데(18:7; 5:25) 지진이나 우뢰같은 현상을 묘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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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흉용케 하시며 - '흉용케 하다''라가''격동시키다', '휘젓다'라는 뜻이 있으나(NIV), 그와는 정반대로 '잠잠케 하다'라는 뜻도 있다(70인역,RSV). 여기서는 바다를 요동시켜 놀라게 하는 것이란 의미가 더 타당하다(51:15 ;31:35). 아무튼 본절에서는 바다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강조되고 있다.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 '라합'(, 라하브)은 원래 '뽐내다', '거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모든 악의 세력들을 표상하고 있다(J. E. Hartley,51:9).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9:13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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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 그의 ''(, 루아흐)은 하나님의 '' 또는 '바람'이나 '호흡'을 가리킨다(40:7). 그리고 '단장하다''쉬프라''맑다', '빛나다', '아름답다'란 뜻으로 비구름과 폭풍우로 인해 흐렸던 하늘을 청명하게 빛나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Driver & Gray). 한편 혹자는 '그의 호흡으로 하늘을 깨끗하게 소제하다'란 의미로 해석하며(Dhorme), 또는 '쉬프라''솨프루르'로 읽고, '하늘을 펴다'(BDB)로 해석하기도 한다(Gordis). 그러나 '하늘의 기둥들이 그를 두려워했다'라는 70인역(LXX)의 해석은 무리하게 보인다.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 '날랜 뱀'(, 나하쉬 베리아흐)이란 도망가는 뱀을 뜻하며, '찌르다''홀랄라''파괴하다', '쳐부수다'의 뜻인 '할랄'에서 유래한 동사이다. , 주의 위엄 앞에서 도망치는 뱀을 그의 권능의 손으로 찔러 죽이신다는 의미이다(27:1; 51:9). 혹자는 욥이 당시 근동에 익히 알려졌던 우가릿(Ugaritic) 신화의 영향을 본절에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 욥은 자기 몸으로 태양을 감아 일식 현상을 타나내려는 뱀에게 하나님이 상처를 입혀서 태양의 광명을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신화론적인 사상의 옷을 입혀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Delitzsch). 아무튼 본절은 바다를 지배하는 용을 찌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인 뱀의 세력들을 단번에 제거시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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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 '행사'에 해당하는 '데레크'는 본래''을 뜻하나, 여기서는 '권능'이나 '주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행사'(NIV, hisworks)를 가리킨다. 그리고 '시작점''카차''가장자리의 끝' 또는 '모서리의 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능력을 서술한 앞의 내용들은 단지 하나님의 행사의 테두리 또는 처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누가 능히 측정하랴 - '측정하다'(, )'이해하다', '인식하다'란 뜻이다. , '만일 하나님의 권능이 천둥 소리처럼 크게 모두 울린다면 누가 그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능력의 본질을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세미한 속삭임으로 듣고 아주 적은 부분만을 이해할 뿐이다. 만약 욥의 친구들이 그들의 지식의 한계를 인식했다면 욥에 대한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욥은 이처럼 신이 아닌 보잘것 없는 인간으로서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의 완전함에 대조하면서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