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느혜미야서(구속사)

느혜미야서12장,오직 예배를 위해서

호리홀리 2016. 2. 1. 13:07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는 바벨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다(2:2). 따라서 본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제사장 가문은 모두 최초의 귀환 대열에 속했었다. 한편,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 제사장 목록이 기록되어있다.

 

첫 귀환자들의 명단부터 나오는 것은 귀환의 목적이 예배드리기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성전건축도,성벽공사도 안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고 이주정책도 효율적인 예배를 드리기위해서 모든 것이 예배를 드리기위해서였다.

 

 '요야립' 앞에만 '그리고'의 의미를 갖는 접속사 '와우'가 있다.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스마야'까지와 여기의 '요야립'부터를 확연히 구분하려고 시도한다(19). 추측컨대 이는 '요야립' 가문부터,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언약에 인을 치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다(Rawlinson). 이와 같은 주장은, '요야립'이하의 가문명들이 10장의 인친 가문의 명단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한편, '요야립''여호와께서 아심'의 뜻이다.

 

 여다야 - 6절의 '여다야'처럼 대제사장 가문 출신일 것이다. 한편, 다윗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24반차로 구분되어 번갈아가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된 바 있으나(대상 24:1-19), 1-7절에 열거된 제사장들의 수효는 22명이다. 그렇다고 느헤미야 시대에 와서 22반차로 의도적으로 재구성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1-7절에서는 24반차 중 2개의 명단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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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의 명단들은 가계명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귀환 당시에는 '예수아''갓미엘' 자손밖에 없었지만(2:40) (1)약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 사람들의 인구가 증가하였고, (2)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바벨론에서 데려왔기(8:15-20) 때문에 이처럼 가문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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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과 다음 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의 계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 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대제사장 족보의 연장이다. 물론 포로 기간, B.C. 586년부터 B.C. 538년까지는 대제사장이 없었다.

 

 예수아 -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인물이다(2:2). 그는 B.C. 520년 경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참여했음이 분명하다(5:2). 그러나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살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8:15-18).

 요야김 -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했다(12, 26).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것이다'의 뜻이다.

 엘리아십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해인 B.C.458년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 되어 있었다(10:6).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내통하는 등의 이적(利敵) 행위를 하기도 했다(13:4, 5, 28).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이다'이다.

 

 요야다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후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됐었다(13;2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이다. 한편,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월절 기략'(thePaschal Chronicle)이라는 유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재직 기간은 삼십 육 년으로 되어있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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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단 - 22, 23절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하난'이 페르시아 총독 바고아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동생 예수아를 살해하였던 인물이라고 말한다(Rawlinson, Fensham). 또한 '요하난'은 애굽에서 발견된 B.C. 410년 경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그 이름이 언급된다(Fensham).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총애하심'이다.

 

 얏두아 -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얏두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당시의 대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입성이 B.C.332년이었으므로, 본서가 B.C.5세기 후반 (421-400년 경)에 기록됐었다는 입장은 손상을 입게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 11절의 족보가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해 가필(加筆)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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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절까지에서는 제사장 21반열의 이름 각각과 그 각각의 우두머리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 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성전 제사가 엄정히 드려졌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Rawlinson). 사실 요야김이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기는, 성전이 재건된(B.C. 516) 직후였으므로 당연히 성전 제사가 철저히 드려졌을 것이다.

 

 요야김 때 - 에스라나 느혜미야가 귀환하기 얼마 전의 시기를 가리킬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아의 대제사장 재직이 B.C. 490년까지였다면(B.T. Dahlbaerg). 요야김은 에스라의 도착(B. C. 458)직전까지 대제사장에 있었을 것이다.

 

 바사 왕 다리오 -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페르시아 역사상 세 명 등장한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다리오는 유다의 대제사장 '얏두아'와 동시대 사람인 다리오 3(B.C. 335-331)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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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지략 - 여러 가지 명단과 기록을담은 공식적인 성전 연대기로 추측된다(EdwinYamauchi). 요하난은 약B.C.400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도 바로 이시대에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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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과 다음 절의 레위 사람들의 명단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하사뱌 - 포로 귀환 후 생긴 레위 사람의 가문일 것이다(8, 21).

 세레뱌 - '하사뱌'와 마찬가지이다.

 

 그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 레위 성가대가 교송(交頌) 형식으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한다(9;3:11). , 두 파트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며 찬양하였던 셈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찬양하며 감사하고 -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이 신정 왕국 이라엘의 예배 체계를 신실하게 확립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용어다(대하 8:14). 다윗이 노래하는 자들의 반차를 정한 것은 대상 25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윗같이 예배드리는 것이 목표였다. 하여 다윗의 이름이 본장에 여러번 등장한다 24반열,다윗의 악기등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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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안의 곳간 - '문지기'들이 지켰던 '곳간'은 성전에 부속되어 있던 '곳간'들을 가리킨다(Schults, 10:3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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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 - '요사닥'은 바벨론에 붙들려간 '여호사닥'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며(대상 6:15), '예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대제사장(2:2)이다.

 

 요야김과...느헤미야와...에스라때 - 이것은 여기의 세 사람이 모두 동시대(同時代)의 사람들임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의 '요야김'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B.C.458년 이전에 죽었을 것이다. ,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야김'의 아들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의 직책에 올라 있었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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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 성곽 공사가 준공된 직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udolph), (2)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Fensham, Keil, Myers), (3)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직후인 B.C.432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awlinson) 등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落成)되니. - 6:15에서 언급되고 있다.

 

 각처에서 레위 사람을 찾아 -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11:36의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다(대하 23:2).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봉헌식을 행하려 -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이다(대하 5:12, 13). '제금'(, 메칠타임)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하다.

 

 비파(, 네벨) - 요세푸스는 이 악기의 현()이 열 둘임을 중언하고 있다(Ant.VLL, xii, 3).

 

 수금(, 키누르) - 현이 셋 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열 둘 되는 것까지 다양했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 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앞의 비파 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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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사방 들 - 여기의''(, 키카르)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 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Myers).

 느도바 사람의 동네 -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다(Fensham, sch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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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길갈 -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

 

노래하는 자들은...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 '노래하는 자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다(Rawlinson). 아무튼 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절과 본절의 전반부 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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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은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 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는 내용이다. '정결케 하다'의 뜻인 히브리어 '타헤르'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 하여사용된다. 특히 부정했던 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22: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하고 -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 속죄제를 드리는것 등을 가리킨다.

 

 백성...정결케 하니라 -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19:10, 14), 목욕 및 물을 뿌림(8:7;19:12) 등을 통해 정결케했을 것이다.

 

 성문과 성 - 이것들 또한 '정결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Myers, 23:14). 그것들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14: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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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서쪽 성곽의 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Rawlinson). 이같이 볼 수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 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이다(Schultz).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 레위 사람들 중 아삽 자손들을 가리킨다(27-29;11:17).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 이러한 독특한 의식적(儀式的)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되었음을 감사 및 고백하는 데(27)그 목적이 있었다(Kidner, 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糞門)을 향하여 가게 하니 -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고(36).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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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 - '호세야''유다 방백'의 선두에 섰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Schultz), 한편, 여기의 유다 방백'은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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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 이들을 방백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Schultz),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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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뤼지던 악기였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 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다(삼하 6:15;대하 7:6;29:26-28). 한편,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 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케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하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 '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 '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다(Rawlinson, Myers, Williamson).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지파의 아삽 자손이었다(11:17).

 

 아삽의 육 대 손 스가랴 -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다(대상 16:4-7;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육 대 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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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제 -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다윗의 악기 - 레위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킨다(27;대상 15:16, 19-21).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다윗의 악기'라고 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다(대상 15:16).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준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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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음을 전제로 한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 '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일단 내려왔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다. 바로 이 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Schultz).

 

 다윗의 궁 윗 길  '호마''성벽'의 뜻이 있을 뿐이다(14:22;3:5;1:18).

 

 동향(東向)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 이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 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수문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1) 느헤미야가 포로 이전 시대의 수문과는 별도의 수문을 만들었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3장에 나오지 않으며 또 3:26의 수문과 본문의 수문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2) 에스라 일행이 새로 재건된 성벽을 벗어나 그 바깥쪽으로 돌았으리라는 견해. 하지만 에스라 일행은 특별한 경우만 성벽 안쪽으로 돈 것을 제외하면 줄곧 성벽 위로 돌았음에 분명하다. (3) 본문의 '수문'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 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 여러 측면에서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Will-ia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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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들 마주 진행하는데 - 여기의 '마주'(, 레모올)'반대로'의 의미이다(NIV). 따라서 이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는(36)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측으로 돈 데 반해, 또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킨다.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 비록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사이에는 '경유하여'(, 메알)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한다. '성 넓은 곳'에 대해서는 3:8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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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브라임 문 -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함메아 망대 '사이의 ''이다.

 감옥문 - 이것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 지점에 위치했을 것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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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나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나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 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Fensham). 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민장 -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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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본절에 언급되는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Rawlinson).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있어야 했을 것이다(12-11;10:2-8).

 

 마아세야...에셀이 함께 있으며 -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하다(Fensham).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 이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6). 따라서 이 봉헌식에는 (1) 느헤미야가 인도하던 대열만이 참여하였고, (2) 그래서 악기를 사용하는 레위인들은 없고 다만 '노래하는 자들'만이 있었다는 롤린슨(Rawlinson)의 주장은 결코 타당치 못하다.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 '예스라히야''노래하는 자''악기를 잡은 자' 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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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제사'(, 제바힘)는 주로 감사의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24:5;29:28;3:3;7:20;6:17;왕상 8:63).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3:11). 그 나머지의 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7:29-34),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12:17,18).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가리킨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줄거워하였으므로 -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11:40;31:15;49:3;1:8),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 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Rawlinson).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다(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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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다.

 그 날에 -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10:3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 돌려졌었다(18:26).

 

 거제물(擧祭物)과 처음 익은 것 - 10:35-47을 참조하라.

 

 유다 사람이...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 이것은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연고일 것이다. 한편,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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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말할 나위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 '섬기는 일'(, 미쉬메레트)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諸般事)를 가리킨다(3:7;대상 23:32;대하 7:6;44:8).

 

 결례(潔禮)의 일 - '결례'(, 타하라)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킨다(Myers, 대하 30:19;44:26). 자신 뿐만 아니라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대상 23:28).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좇아 -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 뿐만 아니라 앞의 '제사장들''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이다. '제사장들''레위 사람들'의 봉사도 '다윗''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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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은 '노래하는 자들''다윗''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하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 뜻인 접속사 ''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이다.

 

 노래하는 자의 두목 - '두목'(, 라쉐이)은 복수이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아삽'을 포함한 세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된다(대상 6:33,39,44;15:17). 그 나머지 둘은 '헤만''에단'이었다.

 

 찬송...감사하는 노래 - '찬송''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 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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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 - 이것은 곧 포로 귀환 시대 전()기간을 가리킨다.

 

 날마다 쓸 것...그 구별한 것 -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 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자들''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다.

 

 레위 사람들은...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준 것을 가리킨다(10:38;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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