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느혜미야서(구속사)

느혜미야서8장,영적대부흥운동

호리홀리 2016. 1. 26. 10:58

에스라는 에스라 10장의 사건 이후에 모습을 감춘 후 무려 14년 후에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문제로 온 나라가 법석이었으며 또한 고리대금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했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느헤미야가 B.C.435년에 팔레스틴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페르시아 왕실의 소환으로 거기에 약 1년간(B.C.433) 다녀온 것처럼(13:6), 에스라도 에스라서 10장 사건이 마무리 지어진(B.C. 458) 후의 어느 시점에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B.C.444년경에 다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칠 월'은 종교력으로서의 '칠 월'이며, 민간력으로는 일월이고. 태양력으로는 구 월 혹은 시 월이다.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양서(兩棲)를 막론하고 거의 민간력만을 사용하다가 여기서 특별히 종교력을 쓴 까닭은, 본장이 초막절 절기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9, 11, 14, 16, 18).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나팔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23:23-25;10:120;29:1-6). 이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이 날을 기렸다. 이 날을 기리는 목적은 먼저 종교력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의 달인 일곱 번째 달을 맞아 봉헌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민간력의 관점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 첫날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수문 앞 광장 - 이것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가리키며 스 10:9'하나님의 전 앞 광장'과 동일한 곳으로 짐작된다(Edwin Yamauchi, Raqlinson). 그리고 이 '수문'은 기혼 샘(the Gihon Spring)과 연결되었다. 종교적 행사가 주목적인 백성들이 성전과 가까운 곳에 모였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학사(學士) 에스라에게...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 이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영적 기갈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삼상 7:2).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는 바로 이같이 백성들의 영적상태가 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마자 백성들은 그로부터 율법의 가르침을 듣기 원했던 것이다.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이를 제외한 이스라엘 사람 모두, 즉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들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강조적 표현이다(31:11).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의식(意識)들에 내포된 의의 등을 통해 지혜와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12:26, 27;4:6;6:6이하;31:12, 13). 영적 이해가 결여된 미신이나 맹신은 이교의 특징이었고(44:18, 19), 이스라엘의 멸망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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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오정까지...귀를 기울였는데 -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때 거기에 모인 백성들은 무려 6시간 이상 말씀을 듣고 있었던 셈이다(19:9;20:7). 이같이 오랜 시간 동안 말씀을 받는 일에 열중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날이 밝자마자 모였다는 것도 그들의 열심을 잘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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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가...나무 강단에 서매 - 여기의 '강단'(, 믹달)은 구약 성경에서 항상 '망대' 혹은 '성곽'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11:4;8:9;왕하 9:17;대하26:9). 따라서 본 문구는 그 때 에스라가 특별히 마련된 매우 높은 단() 위에서 율법을 가르쳤음을 말해준다. 에스라가 이같이 높은 곳에서 율법을 가르쳐야 했던 이유는그 때 그의 가르침을 들으러 온 사람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2). 즉 그렇게 높은 곳에서 가르쳐야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Fensham).

 

 우편에 선 자...좌편에 선 자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장들로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안식일 날 회당에서 몇몇 사람이 율법을 번갈아가며 봉독하였듯이, 본문의 13인도 에스라 곁에서 차례로 율법 내용들을 읽었으리라 생각된다(Kid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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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이와 같은 백성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외적인 표현이며(Fensham, 3:20;29:8;2:1). 아울러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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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의 내용은 율법을 가르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에스라가...여호와를 송축하매 - 유다인들의 회당 예배시에도 성경 말씀을 봉독하기 전에 여호와를 송축하는 절차가 있었다(Edwin Yamauchi). 이러한 절차가 에스라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된 것이라 보여진다.

 광대하신 하나님 - 구약 성경 중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되기는 하지만(9:32;10:17;32:18), 동일한 것은 없다. 그러나 아람어나 페르시아어의 고대 문헌에서는 이와 동일한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표현이 바벨론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Bowman). 사실 본서를 기록했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성장했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며, 또한 그분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미침을 뜻한다.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경배하였느니라 - 이것은 에스라의 송축에 대한 백성들의 삼중적 응답이다. 그 중 '손을 들고''광대하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족함을 시인하는 외적 표현이다(Williamson, 9;5;28;2;134;2). 백성들은 잠시 후 에스라에 의하여 들려질 율법 말씀을 통하여 영적 기갈이라는 부족을 채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멘 아멘 응답하고'는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에스라의 말에 백성들이 온전히 동감했었음을 말해준다(Williamson, 5:13). '아멘'이라는 표현이 집회시 회중들의 응답으로 사용된 예는 다윗 시대 때부터 발견된다(대상16:36). 후에 이것은 회당에서도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전 14:16). '몸을 굽혀...경배하였느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의 외적인 표현이다(대하7:3).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끝난 후에는 다시 일어나서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한편 '몸을 굽혀'에 해당하는 단어는(, 카다드) 구약 성경에 15회 등장하며. 항상 '경배하다'는 말과 함께 언급된다(24:26, 48;43:28;4:3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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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8

강단 위에서 율법책의 한 부분을 낭독하고 나면, 회중들의 중간 중간에 끼어있던 레위 사람들이 그 주변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다시 낭독한 후 그 의미를 가르쳐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아...블라야와 레위 사람들 - 이것은 '예수아...블라야와 그 밖의 레위 사람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의 '예수아...블라야'도 레위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아''그가 구원하실 것이다'의 뜻이며 '블라야''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의미이다.

 바니 - '세워진'의 뜻으로 '르흠'의 부친이다(3:17).

 세레뱌 -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했던 사람이다(8:1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열()을 보내셨다'이다.

 

 호디야 - 느헤미야의 언약서에 인친 두 명의 레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10:10, 13). 그 의미는 '유대인 여자'이다.

 마아세야 - 4절의 '마아세야'와 동일인 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의미는 '여호와의 일'이다.

 그리다 -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가 다시 내보냈던 사람이다(10:23). 그 의미는 '불구가 됨'이다.

 요사밧 - 에스라가 귀환하면서 함께 가져온 물품들을 인수한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예수아'이다(8:33). 본서 11:16에서는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은 자로서 언급된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이다.

 하난 - '은총'의 의미이다.

 해석하여(, 메포라쉬) - 이것은 '분명히 하다'혹은 '쪼개다'의 뜻이 있는 동사 '파라쉬'의 강조형이다. 한편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오래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의 '그 뜻을 해석하여''해설'의 의미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고.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 오경을 아람어로 구술 번역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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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어떤 학자들은 신년절 행사 절차 중 하나에 우는 것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F.F. Hcidberg, J.C. de Moor, Mowinckel, N.H.Snaith).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가 없으며 또한 본문에서 저자는 신년절의 구체적인 행사 절차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술 의도나 주제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보다는 백성들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대하 34:19;3:20) 눈물을 흘린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Williamson).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학사 에스라 - 이같이 두 사람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 두사람이 동시대 인물이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게 각기 적용된 직함 곧 '총독''제사장 겸 학사'는 그들의 사역이 성격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 한 사람은 정치적 행정적 사역을, 또 한 사람은 종교적 사역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한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총독'(, 티르솨타)이 본서에서 느헤미야가 자신을 가리킬 때 적용한 '총독'(, 페하) 보다는 높은 직책이라고 보고서, '티르솨타'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부분(10:1)8-10장은 느헤미야가 기록하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강 서편 전체를 통할하는 총독을 가리키는 3:7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도 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페하'가 사용된 점 등으로 미루어, 히브리어 직함만으로 위의 주장을 고집하기는 무리일 것이라 본다.

 

 이르기를(, 요메르) - 이것은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마르'3인칭 단수형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 이 동사의 주어인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 사람들' 중에서 '느헤미야''레위 사람들'을 탈락시키거나(Rudolph), (2) '느헤미야'만 놔두고 나머지 둘을 탈락시켜야 한다고(M.Noth) 주장한다. 그러나 첫째, 히브리 어법상 단수 동사에 복수 주어가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둘째, 사본학적인 충분한 입증없이 본문을 고치는 일은 위험하며 셋째, 여기와 병행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드라상 5:40과 칠십인역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무리라 하겠다(Fensham).

 

 오늘은...울지 말라 - 나팔절은 그 성격상 마땅히 기뻐하며 즐거워 해야 할 절기였다(23:24, 25;29:1-6;12: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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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 '살진 것'(, 마쉬마님)은 짐승의 가장 먹기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Fensham). 따라서 이것은 레위기에서 먹지 말도록 금지하고 있는 기름 부위와는 전혀 다르다(Kidner, Williamson). 한편 '단 것'은 포도즙에 물을 섞은 음료를 가리키는 듯하다. 사실 고대 증근동 사회에서는 이러한 음료가 잘 알려져 있었다(Fensham). 그러므로 본 문구는 잔치 분위기가 충분히 날 수 있도록 흥을 돋울만한 진미(珍味)들을 먹으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Kidner).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 여기의 '예비치 못한 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먹고 마실 수 없는 자들을 뜻한다. 아마 여기에는 주로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이 포함될 것이다(LXX, Fensham, 16:14). 유대인들에게는 즐거운 날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돌아보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함께 즐거움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삼하 6:19;9:22). 이와같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랑을 베푸는 일은 이 축제를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Kidner). , 백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풂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 마우제크)'산꼭대기' '방파제'의 의미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방파제 혹은 보호자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이 비록 통회해야 할(9) 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고뇌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회개 후에 오직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그들은 방파제가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Fensham, Williamson). 바로 그런 점에서 백성들은 울지 말고 성일을 지킴으로써 여호와를 기뻐해야만 했다. '사람의 제일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만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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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서 언급되는 레위 사람들의 행동은 마치 단순한 반복 내지는 불필요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한 것을 회중들 틈의 레위 사람들이 다시 읽어주고 해석해 주었듯이(7, 8) 의사 소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레위인들의 중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Willla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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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의 강조점은 백성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그대로 준수했다는 데 있다. 특히 우리는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에스라의 율법 해석의 권위와 그 효력이 강조되고 있음에 유의해 볼 수 있다. 처음 율법이 수여된 이래로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삶의 양상이나 민족적 상황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율법 자체가 상징적인 권위를 지니고는 있지만 실제적인 면에서는 마치 골동품처럼 여겨졌을 수가 있다. 따라서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통해 비로소 그 율법 조항들은 실천적인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Willia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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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은 에스라의 말씀 운동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튿날 - 1-12절의 사건이 있은 그 다음 날이다. 종교력으로는 72. 민간력으로는 12일이었다.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은 계속 에스라 곁에 남아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배우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6:6, 7) 여타 백성들을 지도하고 교육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율법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10, 12).

 백성의 족장들...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 '백성의 족장'은 한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것이다(7:8). 한편 '밝히 알고자 하여'(, 레하스킬)는 원래 '이해하다' 혹은 '가르치다'등의 뜻이 있는 동사 '사칼의 사역형으로서, 배움을 통하여 어떤 지식에 통달하고 그 결과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가리킬때 자주 사용된다(삼상 18:14;대하 30:22;32: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 이들은 성전 봉사 이외에도 백성들을 가르치는 책임도 있었다(10:11;대하 17:8, 9;8:7-9;4:6;2:7, 8).

 

 학사 에스라의 곳에 - 문자적로는 '학사 에스라의 주변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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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은 에스라가 족장 및 종교 지도자들(13)과 함께 율법 말씀을 연구하던 중 초막절에 관한 가르침을 발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팔절과 초막절 사이에 있는 절기인 대속죄일(710)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일부 학자들은(1) 에스라 시대에는 대속죄일이 없었다거나. (2) 에스라가 당시의 대제사장을 신임하지 못하여 대속죄일을 지키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거나, 혹은 (3) 9장에 백성들이 회개에 관한 사실이 보도되고 있듯이, 굳이 대속죄일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등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본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차라리 우리는 율법의 낭독, 해설 및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즐거운분위기 등과 관련된 본문의 문맥에 근거하여 대속죄일 행사에 관한 기록을 생략하였을 뿐이라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Williamson).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 이것은 레 23:34;29:12;16:13에 대한 자유스런 인용이다. 따라서 여기의 '칠월 절기''초막절'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초막절의 준수 목적은 (1)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인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며, (2) 토지 소산의 추수를 마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기념하는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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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특히 초막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다. 본절에 언급된 나무들 중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 이외의 것들은 레 23:40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레 23:40에는 본절에 없는 '버들'이 나온다.

 

 감람나무 - 지중해 연안국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8:8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 이전의 시기부터 가나안 땅에도 있었다.

 

 들 감람나무 - 왕상 6:23, 31, 32에 따르면 이 나무가 목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나무에서는 감람유는 거의 산출되지 않았다.

 

 화석류 - 나무의 둥치가 없는 관목(灌木)의 하나로서 잎이 무성한 상록수이다(41:19;55:13;1:8, 10, 11).

 

 종려나무 - 팔레스틴의 '종려 나무'는 그 높이가 성인 신장의 약2-3배 정도이며 잎이 많이 달린 줄기 하나의 길이도 성인의 신장 만큼은 된다(15:27;23:40;33:9;92:12;7:8).

 

 기타 무성한 나무 -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잎이 넓어서 그늘을 만들기에 적절한 나무일 것이다(NIV, shade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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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은 초막을 지었던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다.

 지붕 위에 - 중근동 지역의 가옥들은 그 지붕이 평평하여 초막을 세우기에 적절하였다(2:6;삼상 9:25).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집 '지붕 위에' 초막을 지었을 것이다.

 뜰 안에 - 여기에 초막을 지은 사람들도 예루살렘 주민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전 뜰에 - 다음의 두 곳과 함께 타지역 백성들의 초막을 짓는 장소로 사용됐을 것이다.

 에브라임 문 광장 - '에브라임 문'은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했었다(12:39;왕하14:13). 따라서 '에브라임 문 광장'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던 성전과는 가까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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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 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 - 이같은 명칭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이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이 같은 명칭은 비록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들이지만 제2의 출애굽 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바벨론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들과 온갖 희생을 각오하고(2장 강해) 귀환한 사람들을 예리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3:8;4:1;6:19-21).

 눈의 아들 여호수아때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날까지...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 이는 초막절 절기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낱낱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초막절을 지켰을 것이며, 그 이후에 초막절을 지킨 사실에 대해서도 성경이 증거한다(21:19;왕상 8:2, 65;왕하23:22;대하 30:26;35:18). 특히 최초의 귀환 직후에도 지켜졌다(3:4). 따라서 본 문구는 여기의 초막절 행사가 모세 율법이 말하는 근본 정신에 매우 합당하게 지켜졌음을 뜻할 것이다(Fen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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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는...율법책을 낭독하고 - 이는 초막절 절기가 모세 율법의 가르침대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31:11).

 

 무리가 칠 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 본문은 백성들의 절기 지키는 일이 결코 유야무야(有耶無耶)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즉 백성들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절기를 지켰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 동안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23:35, 36)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하였을 것이다(23:39;16:13). 백성들이 그 초막 생활을 통해서 선조들의 광야 생활을 상기했을 것임은 물론이다(23:43).

 

 제 팔일에...성회를 열었느니라 - 여기서 '성회'(, 아체레트)'마치다'를 뜻하는 동사 '아차르에서 온 명사로서 어떤 행사의 엄숙한 종결(Keil) 혹은 그와 관련한 의식을 가리킨다(왕하 10:20;1:13;1:14;5:21). 아무튼 본 문구도 초막절 절기가 율법대로 시행됐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