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느혜미야서(구속사)

느혜미야서5장,미시적전투

호리홀리 2016. 1. 21. 12:20

 

4장이 거시적관점에서의 영전전쟁을 보여준다면 본장은 미시적 관점에서의 영적전투를 보여준다.

외부적으로 산발랏 일당의 방해 공작이 점점 거세어지는 와중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본장은 이렇듯 심각한 사회, 경제적 내우(內憂)를 느헤미야의 과단성 있는 결단과 주도하에 극복해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 '차아카트 게돌라', '큰 부르짖음'은 성경에서 대개 극한적인 고통의 결과로서 나타난다(18:21;27:34;11:6;12:30). 따라서 본 문구는 일부 백성들이 심각한 환난 가운데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본절에서 여자가 부르짖음의 주체(主體)로 나오고 있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백성의 환난이 한 가정의 생계문제와 직결된 절박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왕하 4:1;6:26;8:3).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 '원망하는데'(, )'...에 대해서' 혹은 '...을 대항하여'의 뜻으로서 앞의 '백성''그 아내''형제 유다 사람'을 향하여 부르짖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본절의 '형제 유다 사람'은 구체적으로, 가난한 백성을 상대해서 고리 대금(高利貸金)을 한 사람들을 가리킨다(7). 여기서 느헤미야가 그들을 굳이 '형제 유다 사람'이라고 한 까닭은, 그 고리 대금업자들이 피해자와 동족들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서 그들의 몰인정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때문이었다. 사실 동족들에 대해서 고리대금을 하는 일은 율법도 금하는 일이었으며(25:35-37;23:19), 또한 상식적 판단으로도 지탄을 받아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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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에 나오는 불평은 모두 심각한 빚 문제와 연관된 것이며, 이러한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유나 배경은 세 가지 유형으로 달리 나타난다. 문맥상으로 볼 때 여기서 열거되는 불평들은 몇몇 개인의 사례들이라기 보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루 퍼져 있었던 일반적인 문제를 대표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Williamson). 본절은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들의 첫 번째 유형이다. 그들은 '가족수(家族數)'가 많음으로 인하여 빚을 지게 되었다.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 빈민들이 반드시 돈만을 빌린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들은 돈 뿐만 아니라 '곡식''새 포도주', '기름'도 빌렸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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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들의 두번째 유형이다. 본절에 빚의 원인으로서 언급된 '흉년'은 사실 첫 번째 유형(2)과 세 번째 유형(4)의 빈민들이 빚을 지게 된 근본적 혹은 간접적 원인이 됐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흉년의 시기에 도탄에 빠지는 자들은 대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반면에 부요한 자들은 창고에 저장된 곡식이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흉년에도 버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그것을 고액에 팔아 넘겨 폭리를 취하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게되었다.

 

 밭과 포도원과 집 - 이 세 가지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 만큼이나 귀중히 여겨지던 전재산(全財産)이었을 것이다.

 

 흉년을 위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 흉년 동안에'이다. 따라서 본절의 '흉년'은 로린슨(Rawlinson)이 주장하듯이 과거의 흉년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에 진행되던 흉년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팔레스틴에 큰 흉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1:6, 9-11). 아무튼 페르시아 시대에 흉년이 잦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팔레스틴, 특히 기브온 지역은 이스라엘 초기 시대만 해도 엄청난 포도의 생산이 있었으나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서는 그 생산량이 급강하했었다고 한다(Fensham). 분명 이와같은 현상은 포도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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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의 세 번째 유형으로서 그 원인을 '세금'으로 언급하고 있다.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 문자적으로는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을 위하여 돈을 꾸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약간 잘못이 있다. 한편,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은 그 땅에서의 평균 산출량에 근거해서 거둬 들였던 토지세의 일종이었다(Fensham, Williamson).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르시아 정부에게 또다른 세금들을 바쳤다(4: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보다 세금 부담이 더 과중했기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는 볼 수 없다(Rawlinson).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납세 문제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적 형편이 극도로 피폐했던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제적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은 흉년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3). 물론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 동원되어 농사를 짓는 일 등의 경제 활동을 영위치 못한 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공사가 불과 '오십이 일'만에 끝났음을 감안한다면(6:15) 성벽 재건 사업은 이스라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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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의 내용은 위의 세 가지 유형의 빈민들(2-4)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될 것이다. , 본절은 이들이 빚을 갚지 못함으로써 다다르게 된 극단의 상황인 것이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 이것은 채무자나 체권자 모두 동족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결국 이같은 말을 통해서 가난한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무자비함을 확연히 드러내려고 한다(1).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 사실 채권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가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율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동족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올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을 경우 유대인들은 가족 구성원을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 경우에 돈을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채무자의 딸이나 아들, 그의 아내, 심지어 채무자 자신이 채권자의 종으로 봉사해야 했으며(25:39, 40), 7년째 되는 해에는 다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15:12-18). 따라서 만일 채권자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그들이 가난한 자들로부터 고리(高利)를 취했다는 것일게다(7).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 본절에서 '종 된 자가 있으나'는 문자적으로 '종으로 복속됐으나'의 뜻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크바쇼트)'성적(性的)으로 정복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에서(7:8) 이는(1) 채권자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한 대상이 되는 일(Williamson). (2) 채권자의 첩이 되는 일(Fensham)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빚 때문에 팔려간 여종은 남종과는 달리 성적(性的)인 문제에 있어서 채권자의 처분을 따라야 했다(21:7 이하). 한편,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채무자의 자녀들이 채권자의 노예가 된 것이, 빚을 갚지 못해서 소유물을 빼앗긴 다음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일차적으로는 토지 등의 재산을, 그 다음에는 자녀들까지 채권자에게 빼았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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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 - 이것은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 가혹 행위, 즉 고리 대금을 통한 재산 및 자녀들의 탈취 사실을 뜻한다.

 

 크게 노하여 - 이것은 산발랏 일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쌓는 일에 대해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감정이다(4:1, 7). 결국 이것은 온유한 인물 느헤미야가, 그 어느 때보다 일치 단합이 요구되는 때에 그것을 깨뜨리는 부자(富者)들의 횡포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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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에 계획하고 - '계획하고'(, 말라크)'심사 숙고하다'의 의미가 있는 아랍어에서 온 단어로서, 여기서는 느헤미야가 (1) 가난한 유대인들의 불쌍한 형편을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하는 일, (2) 고리 대금을 한 유력한 자들을 거기서 돌이키게 할 방법을 연구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Fensham). 본절은 경제적 횡포를 자행하는 부자들을 향해 분노의 감정이 솟구 치는 중에서도 차분하게 사태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 본절의 '꾸짖어'(, 리브)'다투다', '뒤흔들다', '꾸짖다' 혹은 '변론하다'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고소하다'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NIV, Fensham). 사실 (1) 이 단어가 칠십인역에서는 상당수 사법적 의미를 함축한 '크리노'로 번역된다는 점, (2) 본절이 '귀인과 민장'의 죄를 거론하는 문맥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리브'라는 단어를 '고소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귀인과 민장'은 앞에서는 '그 형제 유다 사람'으로 언급된 자들이다(1).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치부(致富)하였고, 또한 그 부()를 이용해서 자기의 재물을 늘려간 자들이다.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取利)를 하는도다 - '취리를 하는도다'(, 마솨 노쉬임)에 대해서는 (1) '짐을 지우다'(Fensham, Myers, JB), (2) '빚쟁이 노릇을 하다'(Williamson), (3) '이자를 거두다'(RSV, Rawlinson), (4) '이자를 강요하다'(NIV) 등의 여러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이같이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 까닭은 위의 두 히브리 단어들의 의미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첫째, 뒤의 '노쉬임'이라는 단어가 결과적으로 타인과 원한 관계를 형성케 하는 행동을 주로 나타낸다는 점과(Kidner, 삼상 22:2) 둘째, '마솨''이자'를 뜻한다는 점(BDB)등으로 볼 때 (4)의 견해가 가장 적절한 듯하다.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 이것은 느헤미야의 일차적 '꾸짖음''귀인과 민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음을 암시한다(Rawlinson). 이에 따라 느헤미야는 공개적인 모임에서 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18:15-17). 한편, '대회'''(, 케힐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공동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33:4) '카할'과 동일한 의미이다(2:64;10:8). 한편, '저희를 쳐서'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향하여' 혹은 '그들을 대항하여'의 뜻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귀인과 민장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책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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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유다 사람들을...속량하였거늘 - 이에 대한 언급은 에스라 및 느헤미야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었을 때 이루어졌던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동토 중 가난한 사람이 그 땅의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렸을 경우 율법의 명령에 따라(25:47-49) 그 속전을 지불하고 거기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속량하였거늘'(, 카나)'바로 세우다', '획득하다', '소유하다'.'사다'등과 같은 여러 의미를 지니며 특히 돈이나 기타의 대가를 주고 무엇을 되사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25:10;삼하 12:3;2:7;13:1).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 등이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동족을 노예 생활 중에서 속량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야만적 행위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동족의 종살이를 했던 히브리인들도 제7년 째 되는 해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으며(25:40, 41), 동족인 히브리인을 이방인에게 노예로 파는 일은 율법상으로 엄금되었다(21:8). 결국 본문과 같은 물음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7)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시도하고 있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 이것은 고리 대금을 한 귀인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논리에 설복되었음을 암시해 준다(Rawlinson). 사실 그들의 죄악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이 다만 침묵했을 것이다(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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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절에서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해서 귀인과 민장들의 악행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데 이어,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책망한다.

 

 내가 또 이르기를 - 귀인과 민장들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극적 인식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악행에서 손떼게하기에 심히 미흡하였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처럼 자신의 책망을 계속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의 부도덕 혹은 무자비함에 대해서 이방인들의 비방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2:23, 24).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나 - 이것은 곧 최소한 노예에 관한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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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형제와 종자들 - '형제'는 느헤미야의 친 형제들을 뜻할 것이다(1:2;4:23;7:2). 그리고 '종자들'은 느헤미야의 측근 혹은 그의 직계 부하들을 의미한다(4:16).

 

 우리가 그 이식받기를 그치자 - 이것은 순수한 동기, 즉 동족들을 도우려는 동기에서 돈 등을 꾸어줄 것을 강조하는 권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자신도 백성들을 향한 선한 일에 적극 참여할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22:25;25:36;23:19)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식하고, 또한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솔선하여 이행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권면은 더욱 큰 호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재물을 꾸어주고 그에 따른 정당한 이자를 받는 일 자체는 정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책망한다(119:36;56:9-12;57:17;6:13;8:10;22:13-19;22:12-14;33:31). 특히 본문과 같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는 아예 이자를 기대하지 말고 꾸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테네의 위대한 개혁자인 솔론(Solon)B.C. 594년경 이와 유사한 정책을 채택한 사례가 있다(Edwin Yama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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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의 권면을 구체화 시킨 실천 방법이다.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 - 이것들은 본래 가난한 채무자들의 것이었으나,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에게 넘어간 담보물이었다. 그런데 '감람원', 백성들이 채권자에게 빼앗겼다고 한 것들(3, 5)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감람', 즉 올리브가 그 당시 유대 지방에서 중요한 농산물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람원'도 채권자들에게 필요시 능히 제공될 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취한 바돈이나...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 '취한바 돈이나...기름'은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받아낸 이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백분지 일'은 그 당시 채권자가 자기들이 준 빚에 대해서 적용했던 월리(月利)였던 것 같다. 이 같은 금리는 사실상 당시 페르시아의 금리가 연 20% 이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별로 높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illiamson). 그러나 (1)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에게서 이자를 취하는 일을 율법으로 금했으며(22:25;25:36). 그 당시에는 흉년과 성벽 재건하는 일로 백성들의 경제 형편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 즉 연 12%라는 금리는 매우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백성들에게는 과중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돌려 보내라'''과 같은 담보물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곡식'등의 '이자'에 관련해서는, 이미 받은 것은 돌려보내며 또한 앞으로 받을 것은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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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느헤미야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돌려 보내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 '돌려 보내고'는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빼앗은 담보물과 이미 부당하게 취했던 이자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이며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는 앞으로 받을 이자의 포기를 뜻한다.

 

 제사장들을 불러...맹세를 시키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채권자들의 결단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결단을 번복치 못하게끔 하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사실 공중 앞에서의 결단은 체면이나 분위기 등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었으므로 다시 번복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채권자들은 제사장 앞에서 신앙적 차원의 서원을 했던 관계로, 그 서원이 신실하게 이행될 때까지 제사장의 감독을 받아야만 했다(3:6-13 주제 강해, '맹세에 대한 바른 이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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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 여기의 '옷자락'은 물건을 나를 때 흔히 사용되는, 마치 앞치마와 같이 생긴 겉옷의 무릎 부분을 가리킨다(Keil). 한편, '떨치며'(, 나아르)'흔들어 비우다'의 뜻으로서 무엇을 운반하고자 옷자락의 아랫 부분을 손으로 쥐었다가 그것을 뿌리치듯이 세게 놔버리는 행동을 가리킨다(Keil). 이렇게 할 경우그 옷자락에 담긴 것은 땅에 쏟아져 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절의 다음부분이 시사하듯이 저주를 선포하는 상징적 행동임이 분명하다(10:14;18:6). 한편,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예언의 메시지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왕상 1130-32;13:1-11;27:2-11;4:1-17 ).

 

 하나님이...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 - 하나님께서 고리 대금을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소유물을 거둬가시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집과 산업'은 그 고리 대금을 한사람이 자랑으로 여기던 그의 전재산을 뜻한다.

 

 여호와를 찬송하고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불미스럽다(9)고 할 수밖에 없는 고리 대금 및 그에 따른 노예의 양산(量産) 사건이 말끔히 해결되기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Fen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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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본장의 마지막부분(19)까지는 느헤미야가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의 상류 계급층과 충돌을 빚을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부분(6-13)에서와 같이 사회,경제적 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었던 근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 근저는 곧 그의 청렴결백이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 느헤미야 자신이 페르시아 왕에 의해 임명된 총독임이 처음 밝혀지고 있다. 물론 그에게 상당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다(2:9). 그런데 본절의 '총독'(, 페함)'페하'의 오류임이 분명하다(Fensham, 1:1, 14). 이 같은 단정은 18절의 '총독''페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해질 것이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 이것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를 떠났던 때로서, B.C. 444년이었다.

 

 삼십 이 년까지 - '삼십 이 년'B.C. 433년이다. 느헤미야는 이 '삼십 이 년'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페르시아 왕실의 주관(酒官) 역할을 하다가 B.C. 432년경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하였다(13:6).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것은 백성들의 경제적 형편이 너무도 비참했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백성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사도 바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기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봉사하였다(고전 9:살후 3:8). 한편, 페르시아 제국 내의 지방 총독들은 중앙 정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몫을 위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한다(Frye). 본절에서 '내 형제'(, 아하이)는 문자적로는 '내 형제들'로서 느헤미야와 함께 총독부의 일을 맡아 수행했던 관리들 전체를 가리킬것이다(Fensham, Rawlinson). 물론 여기에 느헤미야의 친동생 하나니가 포함된 것은 자명하다(1:2;7:2). 한편, '총독의 녹' ''(, 레헴)은 문자적으로는 ''의 의미로서 총독에게 마땅히 돌아갈 생활비 전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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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討索)하여 - 에스라서를 통해 느헤미야가 귀환하기 전에는 스룹바벨(세스바살)이 유일하게 유대 총독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1:8;3:8;4:2;1:1).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의 사이에는 유대에 다른 총독이 파견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Alt, Rudolph, Galling). 반면에 아비갓(N. Avigad)이라는 학자는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이 두 총독 사이에 엘나단(Elmathan), 예호에셀(Yehoezer), 아자이(Ahzai) 등의 총독이 있었고 느헤미야 이후에는 바고히(Bagohi), 에헤즈키야(Yehezgiah) 등의 총독이 부임했다고 주장한다. 이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할 만한 확정적인 증거는 다소 희박하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행정적 한계를 고려하건데 유대 땅에 일시적으로 총독 부재 현상이 있었다고 해서 큰 의문점을 남기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면, 본문의 '이전 총독들'이란 유대 지방에까지 행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마리아 총독들을 가리킨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사실 산발랏만 하더라도(2:10) 느헤미야가 유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곳 백성들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런 영향력의 행사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은, 그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지 못했었다(4:21). 한편, '토색하여'(, 히크비두)'무겁다' 혹은 '누르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카베드'의 사역형으로서, 세금 징수나 노역등의 많은 짐을 지우거나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왕상 12:10, 11;9:1).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 '양식'은 음료로 사용됐던 포도주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18절의 ''''과 기타 곡식을 뜻할 것이다. ''(, 아하르)'...워에도' 혹은 '...에 덧붙여서'(besides)의 의미이다. 결국 본 문구는 '은 사십 세겔'이 먼저 기본적으로 징수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양식과 포도주'가 각 개인의 밭이나 포도원 등의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서 별도로 징수되었음을 뜻한다(Fensham). 그런데 본절의 '은 사십 세겔', 한 세겔이 보통 노동자의 나흘치 품삯이었으므로 무려 석달여의 품삯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액수에 해당하는 '''양식과 포도주' 등은, 본절의 '토색하여''하나님을 경외하여'라는 문구들을 통해서 볼때, 징수되어 총독 자신의 개인적 용도로 사용됐음이 분명하다. 한편, 이것들은 한 가정에서 매년 징수됐던 것이라기 보다는, 전 백성들로부터 사사로이 징수됐던 것들의 하루 평균 분량일 것이다(Rawlinson).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 본절의 '압제하였으나'는 원래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상전 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가리킨다(109:16;8:9).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전임 총독들과는 달리 폭정(暴政)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으뜸되는 원동력이었다. ,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짐을 지울수 없었던 것이다. 그 두 번째 이유는 곤궁에 처한 백성들에 대한 형제애 때문이었다(18). 결국 느헤미야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가장 크고 귀한 두 계명(22:37-40)을 나름대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셈이다(Kidner).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사리 사욕을 취하는 등의 폭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하 관리들의 월권 행사를 금지시킨 것까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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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 이 같은 모습은 (1) 이전 총독들이 '성 역사'를 적극 방해한 것(4:17-20), (2)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 역사'에 참여치 아니한 것(3:5)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사실 느헤미야는 '이 성 역사'를 위하여 (1) 페르시아왕의 술관원이라는 편안하고 영화로운 자리(2:1)를 포기하고 그 먼 곳 예루살렘까지 왔으며,(2) 그 일을 시행하는 동안 옷도 못벗고 감독과 경비를 하는 등 수고를 하였으며(4:23), (3) 심지어는 그 일을 방해하는 무리로부터 죽음의 위협까지도 받았다(6:2).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고리 대금을하여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지 않았던 사실을 가리킨다(10).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으며, 그것을 상실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조차 파기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토지 몰수 사례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가 자명해진다.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 이것은 앞에 언급된 총독의 '종자들'이 백성들의 상전 노릇을 한 것과 너무도 대조된다(15). 사실 느헤미야의 종자들은'성 역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성 역사에 참여하고 있던 백성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다(4:1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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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상에는...일백 오십 인이 있고 - 통치자가 자신의 참모나 신하를 부양하는 것은 고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풍습이었다(왕하 25:29). 따라서 느헤미야가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하였다.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은 오히려 '유다 사람들 즉 민장들'(KJV, the jews and rulers; LB, Jewishofficials)로 이해된다(Rawlinson, Williamson). 사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반적 구성원으로서의 '유다 사람들'을 자신의 상에서 먹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 - 여기에 대해서는 (1) 계속 이방 땅에 살다가 새로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이라는 견해(Keil, Rawlinson,Batten, 박윤선), (2) 특별한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린 이방인 외교관이라는 견해(Fensham, Williamson)등의 두 가지 해석이있다. 그러나 첫째, 본절의 '우리 사면'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귀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로 바벨론 지역에서 살았음을 감안한다면 새로 귀환한 유대인으로 보기 곤란하며 둘째, 만일 해외에서 귀환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포로기 이전 조상의 연고지로 가서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위의 두 해석중 나중의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사실 페르시아정부에 의해 임명된 총독 느헤미야가 (1)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는 페르시아 외교 관리나, (2) 페르시아 중앙 정부를 목적지로 하는 애굽 등지(等地)의 외교 관리가 업무차왔거나 잠깐 경유하여 쉬었다가 가려고 할 때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Fen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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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에 언급되고 있는 음식의 양은 그 밖의 보조적 음식을 더할 경우 4, 5백명은 능히 먹일 만한 것이었다. 느헤미야는 이 많은 양의 음식을 대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로부터는 합법적인 돈일지라도 받지 아니하였다.

 

 살진 양 - 여기서 '살진'(, 베루로트)'깨끗이 하다', '선택하다'의의미를 갖는 동사 '바라르'에서 온 단어로 '선택한' 혹은 '손으로 뽑은'이란뜻이다.

 

 열흘에 한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 이것은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열흘에 한 번씩 주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포도주는 중근동 사회에서는 일종의 음료였음을 볼 때, 항상 식탁 위에 올려졌을 것이다. 다만 총독부가 그것을 열흘에 한 번씩 한꺼번에 준비하였음이 분명하다. '각종 포도주'(, 베콜 아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1) 여기의 '베콜'이 포도주의 용기(用器)를 가리키는 '네벨'의 오류로 보고 '포도주 여러 부대'라는 해석(Fensham,Rudolph, Myers), (2) 맛소라 본문에 근거하여 여기처럼 '각종 포도주'라고 해야 한다는 해석(Rawlinson, Williamso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분명한 증거도 없이 맛소라 본문을 고치는 것은 무모하며 둘째, 개역 성경의 번역에는 생략됐지만 '각종 포도주' 다음에는 별도의 수량을 표시하는 단어(, 레하르베, '많이'의 의미)가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두 번째의 것이 보다 타당한 듯하다. 여기의 포도주의 종류에 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를 참고하라.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합법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부터 거둔 세금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사재(私財)로 충당했음을 뜻한다(14).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 이것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치 않았던 중요한 이유였다. 느헤미야는 15절에서 이같이 한 이유를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한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부역'(, 아보다)은 구약 성경에서 '봉사' 혹은 '노동'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29:27;8:11;28:18). 따라서 여기의 '부역'은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동원되서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를 좀더 넓게 문맥적으로 보면 (1) 성벽 재건에 따른 백성들의 수고 뿐만 아니라, (2) 페르시아 왕실에 바쳐지던 각종 세금(4;4:13)등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Fen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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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이 기도를 통해서 (1)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과(Rawlinson), (2)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실을 옹호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Schultz).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보상을 간구하고 있지는 않다. 4:4, 513:22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이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영적 자각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William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