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하(구속사)

역대하11장,형제와 싸우지 말라

호리홀리 2015. 11. 24. 12:41

 르호보암은 남유다로부터 분리해 나간 열 지파(10:16-19)를 무력으로 회복하기 위해 용사 18만을 징집했다. 이들 중에는 의외로 베냐민 지파가 함께 하였는데 예루살렘 상실을 원치 아니한 저들의 목적이 유다 지파와의 연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왕상 12:21 주석 참조. 한편 징집된 용사는 모두 18만이라고 했는데, 아비야 왕 때는 40(13:3). 아사 왕 때는 58(14:8). 여호사밧 왕때는 116(17:13-19)이었던 것에 비교해 볼 때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선지자 스마야의 경고를 듣고 돌이키는 장면은 7:14절에 대한 순종이다. 하여 하나님은 듣고 사하시고 고치신다. 언약적축복이다.

북이스라엘의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유다로 밀려온다. 그들을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고 신앙의 부흥이 일어난다. 우리가 그러했던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견고와 창대가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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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2]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란 '선지자'를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이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의 남북 전쟁을 중단시켰던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는 애굽 왕 시삭(Shishak)의 침입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었으며(12:5-7) 르호보암의 행적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12:15). 한편 '제사장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역대기서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있다(12:5;15:1;18:6,7;19:2;20:37;21:12;24:20-22). 그런데 역대기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지자들은 다른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과는 달리 신정 국가(神政國家) 수호자로서의 기능이 매우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유다 왕들 곁에서 왕을 인도, 충고, 교훈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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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3]

 유다와 베냐민의 이스라엘 무리에게 - 본서 기자는 남유다를 지칭할 때는 대개 '이스라엘' 앞에 다른 수식 어구를 붙이고, 북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는 '이스라엘'만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다른 성경 저자들과는 달리 유다를 가리켜 종종 '이스라엘'로 표기하는 것 또한 본서 저자의 특징이다(12:1;15:17;21:4;28:1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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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1:4]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 '형제'에 해당하는 '아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광범위한 후손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남왕국 유다도 북왕국 이스라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만은 피해야 했던 것이다. 왕상 12:24 주석 참조.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10:15에서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남북 왕국의 분열을 죄를 징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를 돌이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왕국의 분열은 긴 계시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행악자와 불신자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지치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마지막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하겠다(10:2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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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5]

 유다 땅에 방비(防備)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북이스라엘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1-4) 이제 이처럼 자체 정비 사업에 몰두하였다. 한편 르호보암이 건축한 도시들과 과거 솔로몬이 건축했던 도시들(왕상 9:15,17, 18)을 비교해 보면 서로 전혀 다른 도시들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과거에 이미 애굽의 침입으로 혼이 났던 이스라엘은(왕상 9:16) 이제 남북이 서로 분열된 상태에서 또다시 애굽의 침입을 받게 될 때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새로운 성읍을 더 건축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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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1:6]

 베들레헴 - 예루살렘 남방 8km 지점의 고지대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지형이 험악한 편이어서 천연적으로 요새로서의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룻 1:2 주석을 참조하라.

 

 에담 - 혹자에 따르면 오늘날의 '아인아다'에 해당되는 에담(Etam)에는 예루살렘에 물을 보낸 주는 급수지가 있었다고 한다(O. Zockler). 그런데 이곳은 삿 15:8;대상4:32에 나오는 '에담'과는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지역이다.

 

 드고아 - 베들레헴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지이며 이전부터 요새로 유명했다(삼하 23:26;대상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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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7]

 벧술 - 헤브론 북쪽 약 6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 가장 강한 요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조그만 마을로 남아 있을 뿐이다(15:58;3:16).

 

 소고 - 예루살렘 남서쪽 약 1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전에 솔로몬 왕국에 식물을 공급해 주었다(왕상 4:7). '소고'(Shoco)는 오늘날의 '에스 수웨크'(es-suweke)에 해당되며 대상 4:18의 소고와는 다른 곳으로 추정된다.

 

 아둘람 - 오늘날의 '텔 에쉬-세이크 마드쿨'(Tell esh-Sheikh Madhkur)로 추측되는 이 도시는 부근에 회석벽의 굴이 많아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이곳에 숨은 적이 있다(삼상 22:1,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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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8]

 가드 -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삼하 1:20)인 가드(Gath)는 다윗이 정복한 도시이나(대상 18:1) 그곳은 블레셋 사람들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솔로몬 때에는 자체 내에 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2:39). 그러나 솔로몬 시대 이후로 이곳은 분명히 유다의 정복지였는바(9:26) 르호보암이 이곳을 개수 보강(改修補强)하였다.

 

 마레사 - 헤브론과 블레셋 사이 쉐펠라(Shephelah)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의 '마라스'이다(15:44).

 

 - 헤브론 동남방 1km 지점에 있는 산지의 성읍이다. 한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곳에 숨기도 했다(삼상 23: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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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9]

 

 아도라임 - 헤브론 서쪽 1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늘날의 두라(Dura)이다(Rabinson).

 

 라기스 - 예루살렘 남서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니 곧 가사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도상이다. 최근에 발굴된 이 도시의 이름은 '텔 엘 헤시'(Tell-el-Hesy)이다. 과거에도 이 성읍은 주요한 변방 도시로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10;왕하 18:14;1:13).

 

 아세가 - 베들레헴 남쪽 27km 지점이다. 다윗의 블레셋의 골리앗을 쳐죽인 곳으로도 유명하다(10:10, 14;삼상 17:1-49;11:3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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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0]

 소라 - 예루살렘 동쪽 65km 지점에 위치했던 곳이다. 원래는 단 지파의 땅이었으나(18:2-11) 단 지파가 북족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되었던 것 같다.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했던 성읍이다. 이 땅도 본래는 단지파의 소유였으나(19:42;21:24;대상 6:69) 후에 베냐민 지파에 속하게 된 것 같다(대상 8:13). 한편 여호수아의 승리의 노래를 보면 이곳 아얄론 골짜기에 달이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10:12, 13).

 

 헤브론 - 예루살렘 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원래는 기럇아르바(Kirjath-arba)로 불리웠다. 오늘날 이곳은 요르단의 주요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23:2 주석 참조. 한편 이상의 성읍들 중 소라와 아얄마론을 르호보암이 재건한 요새들 중에 가장 북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헤브론(대상 3:1;6:55, 57)과 다른 성읍들은 모두 유다의 중앙이나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들은 애굽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재건된 성읍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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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1,12]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 본문은 르호보암이 위의 성읍들(6-10)을 건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의 성읍들을 강성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각 성읍들의 복지(福祉)를 꾀하여 민심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읍들을 강화하여 외적의 침입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유다와 베냐민 백성들의 호감을 얻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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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1:13]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 본절은 당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만 거주한 것이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35:1-8)을보여 준다. 한편 왕상 12:26-28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유다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레위인들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자 그들은 북 왕국을 떠나 남왕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에 반대하여남 유다로 남하(南下)한 이 같은 사례는 아사 왕(15:9)과 히스기야 왕 통치 때(30:11,12)에도 있었다. 이들이 향리(鄕里)와 산업을 버리고 유다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고,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가 파괴된 곳에서 누리는 안락한 생활보다 자신들의 본분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해 준 땅으로 간'(12:1-4)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열 두 제자(19:27-29;5:11)들의 행동과 흡사하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길에서 만나는 궁핍은 죄악의 길에서 만나는 풍요보다 더 낫고, 타락된 양심을 가지고 부귀와 쾌락 속에 뒹구는 것보다는 연보에 의존하여 먹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Matthew Henry).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때에 여호와의 신실한 종들이 르호보암 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본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음이 분명하다(Cu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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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4]

 향리(鄕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그라쉬'는 목축지나 마을과 건물들로 둘러 쌓여 있는 땅을 가리킨다. 당시의 마을들은 이러한 땅을 중심으로 둥글게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한편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들의 땅은 절대로 팔 수가 없게끔 규정되어 있었다(25:34). 따라서 남유다로 이주한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업을 떠나 - 여기서 '산업'이란 레위인들이 가지고 있던 집이나 부동산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소유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25:29-34). 그러므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이전의 향리와 산업을 떠난다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낸 자들은 그들을 죽음가운데로 몰아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여로보암의 악정(惡政)에 의한 성직자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여로보암...저희를 폐()하여 - 평행 구절인 왕상 12:31에서는 여로보암이 레위인들 대신 레위인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소극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서에서는 이처럼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폐한 사실이 강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행위가 여호와께 대한 범죄임을 부각시키고 제사장들의 수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비록 여로보암이 여호와 숭배를 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본서 기자인 에스라의 편지에서 볼 때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몰아낸 것은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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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5]

본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여로보암식의 여호와 숭배를 전적으로 우상 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산당 - 이에 해당하는 '바마'는 본래 '높은 곳'(hights)을 가리킨다(32:13;58:14;4:13;1:3). 이곳에서는 대개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여호와 숭배도 행해졌었다(삼상 9:12-25;왕상 3:4;왕하15:35). 그런데 열왕기 저자는 이러한 산당을 일시적인 여호와의 예배처에서 점점 더나아가 전적인 우상 숭배의 근거지가 된 것으로 보았으나 역대기 저자는 처음부터 이를 우상 숭배지로 단정짓는 경향이 강했다(14:3;15:17;17:6;20:33;21:11;34:3).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6:1-9 강해, '산당 예배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수염소 우상 - 여로보암의 후계자들은 수염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기도 했는데 이 우상은 황량한 사막의 신으로 순수한 영(spirits)이 아닌 몸이 있고 털이 많은 신으로 알려져 있다. 애굽의 판(Pan) 신이 바로 이와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이 신을 빌어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창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Curtis). 이 수염소 신은 레 17:7에도 언급되어 있으니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송아지 우상 - 여로보암은 여호와를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둘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웠다(왕상 12:28, 32). 여로보암이 이와 같은 상징을 도입한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역사적 사실(32:1-4)에서도 힌트(hint)를 얻었겠지만 가나안인들이 황소로 바알 신의 상징을 삼았던 것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Cu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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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6]

 마음을 오로지하여...여호와를 구하는 자들 - 이미 13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아사 왕때나(15:9), 히스기야 왕 때에도(30:11) 북왕국의 경건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왕국으로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남왕국은 더욱더 강성해져 갔었다(17). 이처럼 역대기 저자는 남왕국이 강성케 됨을 경건한 자들의 이동탓으로 봄으로써 참 신앙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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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7]

 삼 년 동안 - 르호보암의 번영이 3년만에 끝난 이유는 바로 르호보암 제 5년에 애굽의 시삭(Shishak)이 침입한 때문이다(12:2;왕상 14:25). 그러나 시삭의 침입은 역대기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르호보암과 백성들의 종교적인 열심이 식어버렸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 그들이 순종하며 종교적인 열심이 뜨거웠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어 나라는 강해져 갔으나 르호보암 제 4년부터 그 종교적인 열기가 식어가면서 왕국은 약화되었고 급기야 시삭의 침입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윗과 솔로몬의 길 - 역대기 저자는 솔로몬의 우상 숭배(왕상 11:4-8)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를 다윗과 같은 선상에 두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왕상11:4-8에서 솔로몬의 우상 숭배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양 저자의 각기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하11:18]

한글 개역 성경상의 번역만으로는 본절에 나오는 자들의 인척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공동 번역의 번역문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그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르호보암은 다윗의 아들 여리옷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에게서 낳은 마할랏을 아내로 맞았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 - 엘리압(Eliab)은 다윗의 맏형이다(삼상 16:6;17:13). 그런데 그의 딸 아비하일(Abihail)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된 적이 없고 동명 이인(同名異人)이 나올 뿐이다(대상 2:29). 한편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는 아비하일이 르호보암의 두 번째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 18-20절을 볼 때 아비하일은 그의 첫 번째 아내임이 분명하다(Keil & Delitzsch, vol. III, p.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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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19]

본절에 기록된 르호보암의 세 아들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은 여기 이외에는 재차 언급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는 이름의 뜻 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이 중 먼저 '여우스'(Jeush)'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란 뜻이며 '스마랴'(Shemariah)'여호와께서 지켜 주심'이란 뜻이다. 그리고 '사함'(Zaham)'몹시 싫어함'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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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하11:20]

 압살롬의 딸 마아가 - 압살롬에게는 다말(Tamar)이라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삼하14:27). 그러므로 본절의 마아가(Maachah)는 그의 손녀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아가(일명, 미가야)는 다말의 딸인 셈인데 다말은 기브아의 우리엘과 결혼했었다(13:2).

 

 아비야 - 마아가의 장남인 아비야(Abijah)는 르호보암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22; 12:16). 그런데 열왕기에는 그의 이름이 아비얌(Abijam)으로 나오는데(왕상 14:31) 아비얌이 본래 이름이고 후에 아비야로 개명(改名)한 것으로 보인다(Keil). 한편 여우스, 스마랴, 사함(19)과 마찬가지로 르호보암의 다른 아들 앗대, 시사, 슬로밋도 여기 이외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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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1:21]

 아내 십 팔과 첩 육십 - 요세푸스(Josephus)는 르호보암의 첩이 30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근거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O. Zockler). 그런데 솔로몬도 이와 동일하게 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으나(왕상 11:1-3)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지 않던 역대기 기자가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이처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에스라가 솔로몬 만큼은 얼마나 특별하게 다루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하11:22]

 아비야를 세워 장자를 삼아 - 여기서 '장자''머리'(, 로쉬)라는 뜻인데이는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직함이었던 것 같다(Keil). 따라서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장자로 세워 공동 통치(섭정)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솔로몬 때와 같이(대상 23:1;29:22) 왕위 계승으로 인한 논란이나 싸움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Pa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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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1:23]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 르호보암은 일찌감치 아비야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후 다른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는 각 성읍으로 보내어 성들을 다스리는 두목이 되게 하였고 재산과 많은 아내를 주어 그들로 불만이 없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형제들이 서로 반란하여 왕위 쟁탈전을 벌일까 우려해서이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이러한 그의 정책을 지혜롭다고 평한 것은 그가 현명하게 '다윗 왕권'을 보전(保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 때문에 르호보암이 자식들에게 일부 다처주의를 권장한 잘못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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