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25장,유다의 멸망과 희망

호리홀리 2015. 9. 15. 09:58

 시드기야 구 년 시월 십 일 - 본서기자는 열왕기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년, , 일까지 정확히 밝히고 있어 본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대 위기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렘 39:1과 겔 24:1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날짜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시월 십 일이 민간력을 의미하는지, 혹은 태양력을 가리킨 것인지, 그리고 종교력을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부분의 영역본은, KJV, NIV, RSV은 단순히 시월 십일(tenth dah, tenth mo-nth)로 순서를 나타내는 서수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영역본 중 유독 Living Bible에서 만이 이때를 '3(March) 25' 로 나타내고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충분치 못한듯하다. 그리고 혹자는 이 시점을 B.C. 588115일로 잡고 있으나(Wycliffe)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도 미약한 듯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때가 B.C. 588년인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B.C. 586510일까지 (52:12) 17개월 동안 계속된 후 멸망당했기 때문이다(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올라와서 - 몽고 메리(Montgo-mery)에 따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6절을 보면 분명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바벨론 왕은 리블라(립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절은 바벨론이 팔레스틴을 원정할때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진두에서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배후 조종자이며 총책임자임을 시사할 뿐 그가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obbs). 그리고 렘 38:17에는 당시 바벨론의 군대 통솔자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때에 바벨론 왕이 '립나'에 본부를 세운 이후 예루살렘을 공격했다고 한다(R.D. Patterson,Hermann J. Austel). 한편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경로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렘 34:7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과 함게 라기스와 아세가를 먼저 공약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세벧라 지역(왕하 18:13-17; 19:8)을 통과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벧라'(Shephelah)는 팔레스틴의 연안 평지와 유대 및 사마리아의 중앙 고산 사이에 놓여 있는 저지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지역을 통과하여 산헤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라기스와 아세가(18:14, 17 ;34:7)를 먼저 함락한 것은 남유다의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을 향해 구원병을 요청하는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7:5). 그러나 렘 37:5과 겔 17:17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고 있을 시기에 애굽왕이 시드기야를 도우러 왔다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퇴각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벨론이 유다를 친 것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시드기야가 배반한 때문이었다(Wycli-ffe, 24:20).

 

 토성을 쌓으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예크'RV에서는 '성벽' 또는 '요새'를 쌓다고 번역하고 있다(Thenius, Hitzig). 그리고 70인역(LXX)에서도 이와 동일한 뜻의 단어 '페리타이코스'를 쓰고 있다. 또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것과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가 로마인들이 포위하는 방법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여기에 나타난 히브리어 '다예크'의 문자적인 의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해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바벨론이 토성을 쌓은 것은 성벽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성안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공성용(攻城用) 망대들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 여기에 나타나 있는 '토성'은 일렬로 된 성벽이나 (17:17)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파수대, 다시말해서 '망대' 혹은 '공성용 망대'를 말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 p.511-512). 한편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적의 성을 포위할 때 사용하던 망대는 두꺼운 널판으로 만든 이동식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때로는 공성퇴(攻城退)를 싣고 다니면서 공격했기 때문에 그 파괴적인 힘은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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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던 기간은 약 2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이보다 더 정확하게 예루살렘이 18개월 가량 포위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렘52:5, 6을 보면 바벨론의 포위는 그 해 49일에 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예루살렘 성은 성() 주위에 있는 언덕이 성보다 더 높아서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어 살기에는 좋았으나 전쟁시에는 쉽게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R. Hum-ble). 그래서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예루살렘성은 견고한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이방인의 손에 함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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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3]

. 그런데 이말은 '시장하다', '갈망하다'란 의미의 '라에브'에서 왔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극도의 허기진 것'을 나타낸다. 한편 성이 포위되어 있는 가운데 '기근'과 같은 천재 지변이 내린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이다. 왜냐하면 본래 이성은 히스기야의 관개 사업(灌漑事業)에 의해서 물 공급이 잘 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근으로 인하여 물조차도 갈하게 되어 돈을 주고 물을 사먹어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5:4). 그리고 본래 예루살렘 성의 식량공급은 보통 때에도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위를 당함으로 인해 식량난은 더욱 심하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귀부인들이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해 거름더미를 뒤지거나(4: 5) 부모들이 자식을 잡아 먹는 경우까지 생겼다(2:20; 4: 3, 4, 10; 5 :10). 

 예루살렘에 대한 기근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범죄 결과로 주어질 예언된 것이었다. 즉 일찍이 모세(28:53-57), 예레미야(27:8, 13), 에스겔(4 :16, 17) 선지자 등이 예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은 아브라함(12:10), 이삭(26:1), 요셉(41 :53-56), 다윗(삼하 21:1), 아합 왕(왕상 17:1), 엘리사 시대(4:38)에 있던 것으로 이것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법과 범죄(14:13), 그리고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생긴'(41:1-57)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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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4]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 갈대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뒤 야음(夜陰)을 틈타서 성벽에 구멍을 내었다. , 그들은 경사가 없이 평평하여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북쪽 성벽을 뚫고 성 안으로 침투하였다(Josephus). 그런데 이 구멍난 성벽은 히스기야와 므낫세가 세운 제 2성벽에 해당된다(Keil & Delitzsch).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 시드기야가 수비하던 군사들과 함께 도망한 길은 다윗 성의 남쪽 끝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서로 맞닿는 두로베온의 입구 문이었다. 이 왕의 동산 곁문은 실로암(셀라) 못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3:15)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여리고로 가는 길과 연결이된다.

 

 아라바 길 - 이길은 삼하 4: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아로니(Aharoni)에 따르면 아라바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킨다. 또한 이 길은 일명 '요단 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이 계곡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요단 계곡과 사해를 포함하여 멀리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대계곡을 가리킨다. 한편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모압과 암몬 땅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 나라도 본래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에 대해 모반을 일으키려 했으므로(27:3) 시드기야가 그 길로 계속 가면 도피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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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5]

왕의 탈주는 바벨론 군대에 즉각적으로 발견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여리고 평지 - 이곳은 여리고의 동쪽 요단 계곡 입구 쪽에 있는 넓은 건조지로서 여리고 주위의 지방을 형성한 요단 평야의 한 부분이다(4:13). 그런데 많은 군사와 함께 이 넓은 지역을 갈대아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통과하여 도망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모압이나 암몬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을 통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이것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것(12:3-7)으로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 왕을 호위하던 모든 군사가 왕과 함께 여리고 평지를 지나려다가 갈대아 군사에게 발각되자 모두 왕을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12:14). 한편 본절에 표현된 '흩어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포추'로 이는 '산산이 부수다', '사방으로 던지다', '스스로 흩어지다'란 의미의 '푸츠'에서 온 말이다. 이는 사발이나 유리 그릇이 깨어질 때 그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다시 모을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는 유다 군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원인에 대해 일부의 학자들은 여리고 평지가 기름진 곳으로 곡식과 열매가 풍성한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성 안에서 굶주렸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양식을 구하려고 농가에 제각기 흩어졌다고 생각한다(G. Rawlinson).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럴듯하지만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조금은 지나친 상상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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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6]

 립나 바벨론 왕 - 시드기야 왕은 갈대아 군사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히브리어 원문에는 '리블라', )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끌려 갔다. 립나(리블라) 의 위치나 지형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23:33을 참조

 

 저에게 신문하고 - 여기서 '신문(訊問)하다'(, 미쉬파트)는 단어는 전문적인 법정 용어이다(52:9). , 이말은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중에서도 언도나 공식적인 선언을 나타낸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모반했기 때문에(17:16, 18) 느부갓네살의 법적인 심판을 피할수가 없었던 것이다(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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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7]

시드기야에 대한 형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긴하지만 그래도 매우 잔인하게 보인다.시드기야는 결국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이 같은 곤혹(困惑)을 치룬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갈대아 군대에 항복하는 길만이 자신과 그 백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예레미야의 끈질긴 호소(21:8-10)를 거부한 탓에 받는 하나님의 형벌이다(38:18).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 희생물들을 '목전에서' 죽이는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에서 주로 사용되던 행위이다(6:25). 그런데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이렇게 죽음을 당한 것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 맞는 최후가 죽음인 것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아들까지 죽음을 당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즉 그의 아들들이 원수의 손에 잡히리라고 한 말(38:17-23)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의 아들들까지 죽인 것은 그가 다루기 힘든 유다 왕가의 종식(終熄)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Wycliffe).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 이것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32:4; 34:3)에 대한 성취임과 동시에 겔 12:13에서 "그가 거기서(갈대아땅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예언의 성취이다. 이와같이 죄수의 눈을 빼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관례이긴 하지만(16:21) 특별히 이러한 행위를 적의 왕에게 행하는 것은 바벨론(Babylonians)과 파사(Persians)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광경이다(Keil & Delitzsch,Vol. , p. 514). 한편 두눈을 빼는 행위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 지성과 의지의 관문인 눈을 제거하는 행위는 완벽하게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M. Douglas).

 

 사슬로 결박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네후쉐타임'은 성서에 단 한번 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로서 '한 쌍의 구리 차꼬로 결박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차꼬'는 중죄인을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이다. 그런데 앗수르와 바벨론의 차꼬는 두 개의 철사 고리가 하나의 긴 사슬로 되어 있는 것이다(Ba-tta). 그래서 행동하기에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한편 시드기야에게 이처럼 행한 것은 그가 왕이라는 중요 인물이었기도 하지만 32세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엄격한 단속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고 증언하고 있다(5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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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8]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B.C. 605년 여호야김 제 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8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치고 그를 대신하여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를 왕위에 앉혔다(24:10-17). 그후 그는 자기를 배반한 시드기야를 징계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 하여 포위 공격 2년 만인 시드기야 11(B.C. 586) 49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바로 이때가 느부갓네살 즉위 19년이었다. 그리고 49일에 예루살렘이 멸망했으니까 본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은 예루살렘 멸망 후 약 한달 만에 발생한 것이다.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 여기서 '시위대 장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타바힘'이라는 단어가 삼상 9:23에서는 '요리인'(料理人)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또 창 40:4에서는 보디발의 직책, '시위 대장'으로 나타나 있다. 이로 볼 때 느부사라단은 왕의 명을 받아 궁내부의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사형 집행하는 직책을 가졌음을 본절을 통해 알 수 있다(Keil & Delitzsch). 한편 본절에서는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이 57일로 나타나 있는데 렘 52:12에는 510일로 기록하고 있다.

 

 [왕하25:9]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 성전은 솔로몬 왕 제 118월에 완공되었고 (왕상 6:38) 그후 13년 후인 솔로몬 제 24에 왕궁이 완공되었다(왕상 7:1 ;대하 8 :1). 그리고 이때가 B.C. 946년 경이었다. 그런데 이성전과 왕궁이 불살라진 것은 시드기야 11년 곧 B.C. 586년이다. 따라서 성전은 건축된지 453년 만에, 그리고 왕궁은 440년 만에 파괴된 셈이다. 한편 이 사건은 하나님께 솔로몬에게 경고하신 예언의 성취이며(대하 7:20) 요시야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23: 27)고 경고하신 예언(20:17; 8:14; 2:5)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절에 언급된 성전과 왕궁의 파괴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언급 되던 신명기적 교훈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신명기적 형벌로 해석할 수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 낼 뿐만 아니라 엄격히 심판하시겠다는 경고를 그대로 이행하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루실 성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하다.

 

 예루살렘의 모든 집 - 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집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안에 있는 '큰 집 모두'를 가리킨다(Keil & Delizsch).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큰 집'이기 때문이다.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 여기서 '귀인'이란 '재물이 많은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며(4:8) 12절의 '빈천한 국민'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역대서에서 는 갈대아인들이 '모든 구실'을 불살랐다고 말해 귀인들의 큰 집까지도 이에 포함시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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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5:10]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전체를 헐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벽의 중요 부분들을 파괴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느헤미야 시대에 까지도 성벽의 상당 부분이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2:13, 15; Rawlinson). 한편 성벽은 하나님의 보호, 무한한 능력(18:29), 평강(122:7), 피난처(18:11), 구원(26:1; 60:18-21),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벽을 헐어내린 것은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멸망하였음을 상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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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1]

성전과, 그리고 귀인들의 저택까지도 불사른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유다의 거민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의 통상적인 분류 방법인 사회의 신분에 의해 사람들을 분류했다. 그런데 본절에서 느부사라단이 잡아간 포로들은 모두 세분류로 나누어지고 있다. 1. 왕과 군사들이 모두 도망 하고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 2. 7: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벨론 왕에게항복한 자들', 그런데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이들 을 자신이 두려위한다고 예레미야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38:19). 3. '무리의 남은 자 들',여기서 '무리', 헤하몬)는 렘 52:15에 나오는 '무리의 남은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아몬'과 동의어로서 '기술공'을 의미한다(Hobbs,Hitzig). 혹자는 이것을 단순히 불필요한 중복 단어라고 생각하지만(Rawlinson, Gray,B hr) 이와는 달리 이것은 전쟁에 쓰이는 공장(工匠)이나 대장장이들(25:14 주석 참고)는 따로 한 부류로 잡아 갔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실상 그 성중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에 의해 1(B.C. 605, 1:1-5)2(B.C. 597, 24:8-16)로 침공당한 남유다는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잃어 비천한 자만 남았었다(24:14). 그런데 이제 제 3차 침략에 의해(B.C.586) 유다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왕하25:12]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 여기 '빈천한 국민'(, 달란트)에 대해서는 24:14을 참고 하라.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어 '달란트'는 아무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일 뿐만 아니라(39:10) 계층적으로 낮은 천민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 나와 있는 '비천한 국민''평민', 혹은 '가난한자들'을 가리킨다.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 여기서 '농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게빔''구멍을 파다'란 뜻의 동사 '가바브'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들이 샘이나 개천을 파는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3:16). 그리고 70인역(LXX) 중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도 동일한 뜻의 단어 '타바인'을 사용함 으로써 이를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난외주에서 '경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가브'에서 파생한 이 단어 '레요게빔'을 기록하여 이 단어가 본래는 '농부'를 뜻하는 단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에 이러한 농부들을 남겨 놓음으로 인해 계속해서 농사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벨론의 정책에 의한 농사는 포로 시대 이후 까지도 계속되었다(Hobbs). 특히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리야를 유다에 보내어 경작을 활성화하도록 했는데 (40:10, 12)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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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3]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 - 본절에 언급된 놋기둥과 물두멍의 받침들에 대해서는 왕상 7:15-39을 참조하라. 여기서 성전 입구에 서 있는 두 놋기둥은 솔로몬의 명에 의해 히람이 만든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가리킨다(왕상 7:15-22). 그런데 기둥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28:18; 35:1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13: 21, 22), 그리고 그분의 위엄과(104:3) 영광(왕상 8:10, 11)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기둥을 깨뜨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파괴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는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들을 그대로 운반하지 않고 깨뜨려 갖고 간 것은 기둥이 너무 거대해서 운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Rawlinson, Keil & Delitzsch, Vol. , p.517).

? 놋바다 - 이것은 반구형의 놋대야로서 성전의 제단과 입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이 놋바다는 솔로몬이 만든 것으로 제사장의 목욕 재계(ablution)을 위한 성구(聖具)였는데 직경 4.5m, 깊이 2.28m, 원주 13.68m300배럴(barrel)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마리씩 황소가 사방을 향하여 서 있는 상태 위에 얹혀져 있었다. , 12마리의 황소 등 위에 떠 받쳐져 있었던 것이다(대하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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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4]

 가마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로트'가 출 27:3에는 '재를 담는 통'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희생제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가마'(, 다에다)나 요리된 고기를 담는 그릇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성전의 기구들에 대해서는 왕상 7:40-50을 참조하라. 한편 성전 기구들 가운데 금으로 된 것과 귀한 기구들은 이미 두 번에 걸친 느부갓네살의 성전 약탈때, 모두 빼앗겼고(24 :13; 1:1,2) 그 이후로 쓰이던 제사 도구는 거의 놋으로 된 것들이었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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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5]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 좀더 구체적으로는 '불똥 그릇(37:23; 4 :9)과 주발들', 혹은 '대접들'(왕상 7:50)을 가리킨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이와 같은 성전의 기구들을 일백 개나 만들었다(대하 4:8).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 갔으며 - 24-13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느부갓네살이 가져간 금기명들 외에 금물이나 은물은 약간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기명들을 옮겨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앗수르의 조각들 가운데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바벨론도 앗수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종교 말살 정책을 수행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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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6]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重數)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 놋의 양 뿐만 아니라 기둥의 부피에 대해서는 왕상 7:15-20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는 이때 약탈된 놋이 너무 많아서 저울로 달아볼 수 없을 정도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놋은 금이나 은과는 달리 착복이나 횡령의 염려가 적어 특별히 그 무게를 달아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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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8]

 대제사장 스라야 - 여기서 '대제사장'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헨히로쉬'의 문자적인 뜻을 '()제사장'이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에서는 처음이지만 12:7에 나오는 '대제사장'(, 코헨 하가돌)과 같은 직무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스가야는 '여호와께서 주장하심'이라는 의미의 인명(人名)으로 힐기야의 손자이며(대상 6:13, 14)에스라의 조상인 것으로 추측된다(7:1).

 

 부제사장 스바냐 - 21:1; 29:25에 따르면 스바냐는 시드기야 왕의 사자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보냄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직책은 혹자의 주장대로 '2계급의 제사장', 즉 대제사장 밑에서 단순한 역을 담당했던 '평 제사장'(Keil &Delitzsch, B hr)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부() 제사장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대제사장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27:3). 한편 예루살렘 함락 후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게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립나에서 죽임을 당했다(21).

 

 전 문지기 세 사람 -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레위인으로서 모두 24명이었다(대상 26:17, 18). 그런데 붙잡힌 세 사람은 아마도 성전을 돌보는 관리들로서 문지기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Keil). 그래서 혹자는 이들을 '성전 수비대장'이라고 일컫는다(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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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19]

성전의 주요 관리들을 다 잡은 바벨론 시위대가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간 후 불안정한 성내(城內)의 일을 돌보던 관리들을 잡아가는 장면이다.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하나 - 내시가 군사를 거느렸다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원래 내시는 왕실의 잡무를 맡아 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22:9; 2 :3, 14). 그러나 그들은 왕의 측근에서 왕을 경호할 뿐만 아니라(39:1; 6 :2) 왕후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4:4, 5) 그것을 기회로 큰 권력을 획득한 예가 많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권력자나 지역의 세도가로 분류되어 바벨론에서 볼때 제거의 대상이 된 듯하다.

 

 왕의 시종 다섯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왕의 얼굴을 본 다섯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5:1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에 1: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폈던 것 같다. 한편 렘 52:25에는 이 시종의 숫자를 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 표현이 왕실 시종들의 수효가 아니라 단지 '성읍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칭할 뿐이라고도 주장한다. , 이들은 도망칠 수 없어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Pa-tterson, H.J. Austel). 그러나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국민을 초모(招募)하는 장관의 서기관 하나 - 군사를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그 명부를 작성하는 일은 서기관의 직무 중하나였다. 그런데 본절은 이 서기관이 일시적으로 군대의 지휘관 일까지 맡아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이 서기관은 아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 군대를 조직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중에서 만난 바 국민 육십 명이라 - 이들 역시 바벨론에 대항하던 부류들 중의 일부 핵심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 그들은 지방의 유지들로서(Keil & Deiltzsch)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지도자들이었다(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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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0]

 저희를 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 지금까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 앞에 끌려간 포로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유다의 주요 관리들(6, 7), 2. 성전의 관리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아있던 자들로서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던 자들(18, 19), 그리고 나머지 포로들도 느부사라단에 의해 립나로 끌려갔으나 성중에서 만난 국민 60명과 같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의 앞에 까지는 인도되지 않았다(Rawlinson, Keil & 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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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 앗수르인들은 포로들을 처형시킬 때십자가에 매달든지, 목을 베든지, 아니면 껍질을 벗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용광로에 넣어 태워 죽이거나 맹수에게 먹이로 주든지, 아니면 잔인하게 사지(四肢)를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기록이 베히스툰 비문에서 발견된다. 한편 성경의 기록에 대한 역사성을 고증(考證)하거나 설명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돌이나 점토판에 새겨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비문들이다.

 이 비문들 중에 성경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 이전의 비문들 가)애굽어:애굽에서 발견된 것은 족장 시대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의 고증을 위해 사용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저주문서(Execration texts)이다.

2) 수메르 및 아카드어:수메르와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했으므로 이스라엘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발견된 것은 함무라비 법전을 위시한 여러 법전과 족장 시대의 관습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포함하는 마리 토판, 그리고 창조와 홍수 설화가 실린 에누마 엘리쉬와 길가메쉬에픽, 또한 B.C. 15C 가나안 지방의 사회적, 정치적인 구조를 반영해 주는 텔 엘 아마르나 토판 등이 있다.

3)가나안 정착 이후의 비문들 가)애굽어:'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애굽 문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메르넵타 문서와 잠언 22:17-23:14까지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담은 지혜 문서, 그리고 르호보암의 통치와 관련하여(왕상 14:25,26;대하 12:2-9) 시삭이 카르낙 신전에 새긴 비문 등이다.

4) 아카드어:여기에는 살만에셀 3세와 디글랏 빌레셀 3, 그리고 사르곤 1세와 산헤립이 새긴 비문들이 있는데 이스라엘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다. 또한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의 연대기도 유다와 직접 관련이 있는 중요 자료들이다. ) 아람어; 왕상 15:18과 관련된 벤하닷의 비문이 아람어로 되어 있으며 이외에 아람어로 새겨진 비문들은(수진, 젠질리, 네랍, 앗술) 아람 왕국의 역사와 아람어와 역사 연구에 중요하다.

 

 이와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 이와 같은 표현은 사실상 본절이 본서의 마지막 절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17:23에 서도 똑같이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이 구절이 본서의 마지막 구절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이것은 이미 경고한 바와 같이 유다가 이스라엘과 같이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유다'가 사로잡혀 갔다는 것은

1. 유다를 다스릴 수있는 모든 사람들이 잡혀갔으며, 2. 실질적으로 유다라는 나라가 사라졌음을 가리킨다. 한편 이 사건(B.C. 586)은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B.C.1405 , 3:1-17)82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 일어난 불행스러운 일이다(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Bible, p. 232).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7년에 3,023, 18년에832, 23년에 745명 등 총 4600여명이 사로 잡혀간 것으로 알려진다(52:28-30). 그 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약18,000여명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계수하는 데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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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2]

 이후로부터는 느부사라단에 의해 유다 땅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앗수르와 달리 바벨론은 정복지에 자국민의 이민 정책을 펴지 않고 그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치제를 실시해 세금과 조공을 받아 갔던 것같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명문 출신인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우고 새로운 형태의 행정을 유다에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 그땅에 남아있던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품어 그달리야를 몰아내고 다른 유다인으로 총독을 삼기 위한 시도가 발생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때 암몬과 동맹을 맺는 새로운 변화를 보기도 하였다(Hobbs).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고 그후로 약 50년간 바벨론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들 - 이때 유다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어떤 특정한 기술도 없고 바벨론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판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외에도 이 땅에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유다 각지에 숨어 있던 사람들로서(40:11-12) 예레미야와 바룩, 그리고 몇몇 왕족 등이었다(43:6).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 - 여기서 서기관 '사반'에 대해서는 22:3절과 렘 26:24을 참고하라. 그리고 '아히감'22:12과 렘 26:24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그달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렘 40:10에 따르면 그달리야는 당시에 어떤 재정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바벨론을 섬기는 길만이 살 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러한 충고를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주었다(29). 결국 그가 바벨론의 신임을 받고 유다의 총독이 된것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 같은 생각을 철저히 믿고 따랐기 때문인 듯하다(Keil & Delitzsch, Vol. ,p.519; Wycli-ffe).

 

 관할하게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프게드 얄레헴'이다. 그런데 이는 '방문하다', '감사하다', '보살피다',란 뜻의 '파카드''오르다'란 의미의 '아라'의 함성어로 지방을 순회하며 감시하고 보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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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3]

총독이 된 그달리야가 유다가 멸망된 후 각지에 숨어 있던 그땅에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았음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달리야는 수도를 새로 미스바에 정했으며, 자신의 요청에 따라 바벨론을 떠났던 예레미야도 새로운 통치자 그달리야를 충고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 미스바에 거처를 정했다(40:1-6; 42:1-43:13). 그리고 이스마엘과 다른 사람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유다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그달리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달리야의 군사 고문인 요하난은 그달리야에게 그들의 맹세가 거짓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달리야는 요하난의 이러한 경고를 믿지 않았다(40:13, 14).

 

 모든 군대 장관 - 문자적으로는 '부대의 장들'을 가리킨다. , 이들은 예루살렘을 방어하던 수비대의 지휘관들이다(Rawlinson). 이들은 왕이 도망할 때 흩어졌던 군사들(5)과 바벨론으로 부터 탈출한 군사들, 그리고 들에 있던 군사(40:7)들과 함께 그달리야에게 갔다(Keil & De-lizsch, Vol. , p. 519).

 

 느도바 사람 단후벱의 아들 스라야 - '느도바 사람'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당시에 그 사람의 출신지를 인명(人名) 앞에 붙이는 것으로 '느도바 출신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느도바라는 지역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키르벱 베드 팔루(Khirbet Bedd Falu)이다(Grid). 한편 여기에 언급된 스라야는 단후멧의 아들로서 18절에 언급된 제사장 스라야와는 다르다.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 - 마아가는 북쪽 아람 지역의 땅으로서 오늘날에는 아벧벱 마아가(Abelbeth-Maacah)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야아사니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귀를 주신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한 이름인 듯하다. 그러나 겔 8:11에도 이이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비성경적인 문헌에 더 많이 나타난 이름으로(Gibson)아마도 그는 유다인 계통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로 부르고 있다(42:1). 한편 혹자는 여기 언급된 군대장관 넷이 유다 최후의 날에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R.D. Patter-son,Hermann J. Austel).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 당시 그달리야는 예루살렘에게 가까운 미스바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미스바''망대'(watch - tow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en Nasbeh)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미스바는 그이름의 의미와 잘 맞는 장소인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에 미스바는 파괴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삿 20:1과 삼상 7:16에서도 보는 바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시기에 항상 이곳으로 피난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스바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경계지의 표시로 돌을 쌓아 놓았던 곳(31 :49)으로 가나안 정착 시기에 유다 지파에 할당된 성읍들 중 하나로 미스베로도 표기되던 곳이다(15:1,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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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4]

그달리야의 충고는 예레미야의 충고와 매우 유사하다(27:8). 그런데 그의 충고는 당시 식민지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정책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달리야와 예레미야의 충고는 바벨론이 완전히 황폐한 유다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필요없이 바벨론에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바벨론에 충성하자'는 그달랴의 주장은 강대국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풍조에 따르자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인 것 같다. 그러나 그 통치 이념 속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보존키 위한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 이것은 전쟁이 끝난 당시에도 유다 각 지방에 떠돌아다니는 군대의 잔당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달랴의 계획 속에는 이 무리들을 한데 모으고 무기를 해제하여 보다 생산적인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달랴가 그 군대의 잔당들에게 농업에 종사해 안착할 것을 권했음을 밝히고 있다(40:10).

 

 맹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싸바''일곱 번 되풀이하면서 맹세하다'란 뜻의 '쉐바'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이말은 철저한 이행을 전제로 한 맹약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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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5]

 칠월에 -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임명 되고 새로운 행정이 시작된 지 불과 2개월만에 이스마엘을 중심적으로 한 격렬한 무리들이 반정(反政)을 일으킴으로 인해 그달리야의 행정은 붕괴되고 말았다.

 

 왕족 - 40:14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암몬 왕 바알스의 자극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자의 지위를 요구하였을 것이다(41:1 ;Wycliffe). 한편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매우 간교한 자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당시에는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 피하여 있다가 이제와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십 인을 거느리고 - 여기서 '십 인'이라고 정확한 수치를 밝히고 있는 것은 이것이 군대의 한 단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 이것은 당시 가장 작은 군대 단위이다(18:21-25).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 이로 볼 때 당시 그달리야의 행정에는 갈대아 인(바벨론 사람)들이 많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스마엘의 살인사건과 그의 도망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40:13-41 :18). 특히 이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그달리야의 새로운 지배권과 이스마엘 사건, 또한그가 애굽으로 도주하게 된 것 등에 때해서 요하난의 입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40:7-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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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6]

 대소 백성과 군대 장관들 - 이것은 그달리야의 미스바 행정에 조금이라도 협력하거나 그것에 관련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그달리야 앞에 모인 무리는 이스마엘 측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 측의 두 부류로 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요하난 측은 그달리야의 의사(意思)를 따르는 무리들이었는데 렘 41 :15에 따르면 요하난은 그달리야를 죽인 이스마엘을 공격하여 암몬 족속에게로 쫓아 내고 그 다음에 느부갓네살로부터 미칠 화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도망갔다. 왜냐하면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자신들에게도 그화가 미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하난은 자신이 앞장을 서서 애굽으로의 피신 행렬을 주도했던 것이다(41:15-17; 43:1-7).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 것을 충고하였으나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말았다(43:7). 한편 당시 애굽의 바로 호브라(Hophra, B.C. 588-568)는 반바벨론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요하난은 애굽으로 피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때 유다의 많은 백성들과 함께 애굽으로 갔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의 견고한 성 다바메스에 도피했던 것이다(43:1-7; 44:1 ;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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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7-30]

본문은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에월므로닥(EvilMerodach) 왕이 유다 포로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융숭한 대우를 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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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8]

 선히 말하고 - 이것은 6절에 '저에게 심문하고'라는 말과 대조적인 문구로서 그를 불쌍히 여기며 친절한 말로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아름답다', '기쁘게 하다', '친절 하다'란 뜻의 '토브'를 사용했던 것이다.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 당시 바벨론 감옥에는 포로로 잡혀온 다른 나라의 왕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족이었기 때문에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 키쎄)는 중요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Hobbs). 그리고 에윌므로닥은 그 왕족들 중에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특별히 대우했던 것같다(Rawlinson, Hitzig, Thenius). 그리고 유다왕에 대한 이러한 호의적인 태도는 유다 민족에게 어떤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끔 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본서 기자가 열왕기 기록을 다 마친후 추신의 형태로 여호야긴의 포로 생활을 간략하게 묘사한 것은 바로 유다의 미래에 어떤 소망이 밝아옴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R.D. Patterson, Hermann J.AUSTERL, Wy-cliffe). 그리고 실제로 이 때부터 70년 후에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리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30:3)이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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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29]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 이것은 여호야긴이 죄수복을 벗고 '말쑥한 옷'(Rawlinson), 혹은 '다른 왕복'(Keil & Delitzsch, Vol. , p. 522)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호야긴이 받은 이러한 대우는 멀리 요셉(41:14)이 받았던 대우나, 가깝게 다니엘(5:29)이 받았던 대우에 비길만하다. 그리고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 뿐만 아니라 다른 유다 포로들까지도 더불어 잘 대우해 주었던 것 같다(Albeight)>

 

 그 일평생에 - 52:34'죽는 날 까지'라고 했다.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 왕의 앞에서 먹는다는 것은 그가 왕의 손님으로 왕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동 지방의 왕들은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큰 잔치를 베푸는 것(1:3-9) 외에도 특별한 손님을 자신의 식탁에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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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하25:30]

 저의 쓸 것은 - 이것은 혹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Keil& Delitzsch)이 아니라 여호야긴이 가신(家臣)들을 거느리며 한 나라의 왕으로 사는데 '필요한 경비'를 가리키는 말이다(Rawlinson). 비록 그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포로지에서도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여전히 왕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Hobbs).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 하였더라 - 이와같이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포로지에서나마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언젠가는 유다 백성들을 자기 고토(故土)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Keil & Delitzsch, Wycliffe).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비록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호의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의 신분으로 전국에 잡혀간 볼모의 신세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왕이 진정으로 여호야긴을 생각했더라면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돌려보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음속에 사무치는 회한(悔恨)을 품고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22:24-30) 그것은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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