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 "수넴"은 잇사갈 지파의 도시였으며(수 19:18) 이스르엘 계곡 지역의 모라산 기슭에 있는 술렘 부근에 있었던 오래된 도시였다. 또한 수넴은 다윗의 후궁 아비삭(왕상 1:3)의 고향이다.
"귀한 여인"은 신분이 높은 여인을 말하며 직역하면 "큰(위대한) 여인"이라 번역할 수 있다.
9절.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엘리사가 이스르엘 계곡과 갈멜산(25절) 부근을 자주 다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거룩하다는 표현은 주로 제사장이나 성전에 관련된 사람 혹은 나실인에게 주어지는 수식어이나 예언자 가운데 엘리사에게는 유일하게 이러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엘리사에게 최고의 칭호를 선물한 사람은 여인이었다.
10절. "작은 방을 담위에 짓고." 히브리어 성서를 직역하면 "담(벽)이 있는 작은 방을 건축하고"로 번역할 수 있다. 벽이 있는 방이란 임시로 거처하도록 만든 방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튼튼히 지은 방을 말하며 방해 받지 않는 독립된 방을 말한다.
"책상"은 바닥 위에 메트를 깔고 그 위에 가죽을 펴는 소위 테이블(삼하 9:11; 시 23:5)을 말하며, "의자"는 영예로운 좌석을 말하는데 왕의 보좌라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귀중한 손님을 정성껏 모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촛대"라는 단어는 주로 성전이나 성막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왕하 25:14, 15; 출 25:31; 레 24:4) 테이블과 보좌라는 단어와 더불어 성전 내부를 방불케 하는 단어들이 사용되어 있다. "거룩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예우로 여겨진다.
12-13절.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수종드는 사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인데 비참한 말로를 당하는 비극적인 인물이다(왕하 5:27).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불러서 그 여인이 엘리사 앞에 서 있지만 직접 그 여인과 대화하지 않고 게하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마치 왕이 백성을 대하는 태도같아 보인다. 왕이 공신에게 무엇을 하사하듯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하면서 위풍당당하게 말하는 엘리사의 제의를 수넴 여인은 정중하게 거절해 버린다.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이 문장에 사용된 주밀이라는 단어는 원래 "떨리다"라는 뜻으로 여인이 엘리사에게 한 행동들이 경외감에 가득차 성심을 다해서 대접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엘리사가 질문을 했다기보다 무엇을 여인에게 답례할 것인가 말해주는 내용의 머리말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며 더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는 뜻인데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이 여인의 백성은 누구를 말한 것일까? 단순히 친족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지방 호족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주민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14-16절. 엘리사는 답례를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는 가운데 게하시가 그 여인에게 아들 없음을 엘리사에게 알린다. 다시 불려 온 여인에게 엘리사가 아들이 태어날것이라 예언하였다. 나그네를 대접하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을 선물로 준 이야기와도 비슷하다(창 18:1-15).
"돐이 되면"(16, 17절)의 의미는 "생명의 시간에" 즉 "봄이 돌아 오면"이라는 뜻이며 간단히 말해서 "내년에"라는 뜻이다.
"아니로소이다... 속이지 마옵소서" 여인의 말은 엘리사가 주려는 선물을 거부하는 말이거나 혹은 남편이 늙었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을 표명한 말이다. 나중에 아이가 죽었을 때 여인은 이 말을 반복하면서 왜 나를 속였는가(28절) 하면서 엘리사에게 항의하는 것을 보아 이 말은 설사 아이가 태어난다 하여도 온전하게 성장하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명한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정적인 뜻을 전하면서도 여인은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더욱 존경의 예를 갖추었다.
18-20절. 새로운 장면이 또 "하루는"이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다.
"내 머리야 내 머리야"는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이다.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일사병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시 121:6]). "그를 데려가라"로 번역된 단어는 "들고 가라"는 의미이며 이 단어로 보건데 아이는 쓸어졌거나 걷기가 힘든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는 한나절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응급환자인 어린 아이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 무관심하였으며 반대로 어머니인 수넴 여인의 모습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어미의 무릎에서" 죽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21-24절. 아이의 울음 소리도 어미의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위대한) 여인의 신속한 행동만 그려져 있다. 엘리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여인은 황급히 엘리사에게 달려갔다. 아이의 시체에 연연하지 않고 남편의 질문에도 아주 간단히 대답하고 나귀를 타고 달려갔다.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이러한 남편의 질문에서 초하루와 안식일에는 여인이 엘리사를 방문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적어도 이러한 날들은 여인들이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날임을 짐작할 수 있다.
"평안이니이다"는 인사말일 수도 있지만 23절의 경우는 "잘 될것입니다"의 뜻으로 볼 수 있다.
25-27절. "갈멜산"은 이스르엘 계곡 끝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이어지는 산으로 엘리야와도 관련이 있고 엘리사가 있었던 산이며 아마도 예언자 무리들이 있었던 산으로 짐작된다.
엘리사가 먼저 여인을 발견하고 게하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였으나 여인은 게하시에게는 간단히 대답하고 곧 바로 엘리사에게 다가와 "발을 안았다." 여인이 재빨리 다가와 넘어지다시피(무릎을 꿇고) 발을 잡은 이 행동은 발을 붙잡고 간절히 청원하는 행동으로 게하시의 저지도 아랑곳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예언자는 선견자(先見者-미리 보는 사람)이나 엘리사는 자신이 예언자로서 문제가 있음을 고백한 말이다. 엘리사의 당황한 모습은 이미 26절의 말 속에도 나타나 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지시한 말은 여인을 영접하라는 말 이상으로 상세하였다. 여인과 남편 그리고 아이의 안부를 상세히 묻도록하는 그의 지시는 무엇인가? 여인의 다급한 행동의 이유를 미리 알아내고자 하는 엘리사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게하시도 엘리사도 그 정보를 얻지 못했으며 여인과 엘리사가 맞 대면하게 되었다. 엘리사는 여인의 행동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무례한 여인의 행동을 받아 주었으며, 엘리사는 자신의 문제 즉 "미리 보지 못한" 무능력에 집착하지 않았다.
28-30절. "인사하지 말며..." 이 구절에 사용된 "축복하다"라는 기본적인 뜻이 있으며 여기서는 "인사하다"는 뜻의 피엘형이 사용되었다. 사람을 만날 때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을 축복해 주는 이스라엘의 관습을 알 수 있는 단어이다. 과거 우리의 풍습에도 그러하였듯이 중동 지역의 풍습에는 인사가 길어서 때로는 인사하는데 10분이 넘게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목숨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엘리사가 승천할 스승 엘리야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받으려 애쓸 때 엘리사가 여러번 고백한 말이다(왕하 2:2, 4, 6). 여인은 아이를 잃은 어미로서의 슬픔 속에서 몸부림치기 보다 어떻게 하든지 아이를 살리려고 엘리사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여인의 행동에서 아이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감지하고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어 아이에게 급히 보내어 아이를 구하려 하였다. 엘리사가 이제까지 행해오던 품위있는 행동 양식대로 사환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아이의 어미"(30절)는 엘리사의 조치를 수락하지 않았다. 게하시가 아니라 엘리사 자신이 가야만 아이가 살 수 있다는 고집을 부리며 엘리사를 재촉하였고 엘리사도 여인의 요청에 응하였다. 30절 마지막 말은 "그녀를 뒤따라 갔다"로 표현되어 있다. 예언자가 주도권을 쥐는 모습이 아니라 여인이 주도권을 쥐고 예언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이며 예언자는 수동적인 태도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31절.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이러한 상징적 행동은 고대 중동에서 기적적(마술적)으로 병을 치료할 때 행한 방법이었으며 엘리사가 시키는데로 게하시가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게하시가 한 행동은 단순히 지팡이만 놓은 것이 아니라 말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2절. "보라 아이가 죽었는데..." 개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보라"라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다. 엘리사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고 상황이 긴박해져 있음을 해설자는 이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3-35절. "여호와께 기도하고." 수넴여인과의 이야기 가운데는 처음으로 엘리사가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있다. 여기에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엘리사가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며 모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의 위에 올라..." 엘리야의 행동과 비슷하게(왕상 17:21) 엘리사도 마른 막대기 대신에 자신의 몸으로 아이를 덮었다.
"그 몸에 엎드리니"(34, 35절)를 히브리어 성서에서 직역하면 "그 위에 구부리니"이다. 엘리야가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구부리는 동작을 묘사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왕상 18:42). 아이와 어른의 키 차이를 생각하면 쉽게 짐작되는 동작이다.
죽은 아이를 살리는 엘리사의 행동이 세밀히 단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문을 닫아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시체 앞에서 여호와께 기도를 먼저 드렸다. 그리고 아이 위에 그의 몸을 엎드려 있으니 아이의 몸이 따뜻해 졌으며 중간에 방에 한번 이리 저리 다닌 후에 다시 그러한 행동을 반복할 때 아이가 눈을 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의 열성을 통해 아이를 살린 것이다.
36-37절.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엘리사를 책망하던 여인이 이제는 신에게 경배하듯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회복한 엘리사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였다.
죽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 경제 문제도 중요하고 인권 문제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죽음의 문제 만큼 큰 문제는 없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렸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 이야기를 펼쳐 보이면서 엘리사 만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위대한) 여인," 수넴 여인을 크게 부각 시켰다.
수넴 여인은 자원하여 나그네를 대접하는 여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대접하는 여인이었다. 엘리사가 자원해서 답례를 하고 싶을 만큼 엘리사를 대접하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사가 분에 넘치는 선물을 하고져 했을 때 단호히 사양하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남편이 늙었는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선물은 합리적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감히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의심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예언은 성취되어 아들이 태어났으며 엘리사는 더욱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예언자 엘리사는 여인과 그 가정에 가장 필요한 부분을, 그들 부부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부분을 충족시켜 주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는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하였다. 여인이 무엇때문에 달려오는지도 몰랐고 게하시를 보내어 아이를 살리고져 했을 때도 실패한 예언자였다. 엘리사는 "선견자(先見者)"였는데 왜 미리 보지 못하였을까? 왜 예언자가 처음에 아이를 살리는데 실패하였을까? 왜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까?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엘리사를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훈련방식인지 아니면 엘리사의 잘못 때문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만약 엘리사의 잘못을 굳이 든다면 엘리사는 상당히 권위적이었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언제나 게하시를 통해서 말을 전달하였고 왕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하였으며, 죽은 아이를 살리는 힘든 문제에 봉착하였음에도 지팡이를 게하시에게 주어 문제를 해결하고져 하는 안일하며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여호와의 알려 주심"이 없는 자격 미달의 예언자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실패한 예언자를 예언자답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아이 잃은 어미"였다. 죽음에 강력히 저항하는 한 여인의 간절함이 아이의 생명을 살렸고 예언자에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침착하면서도 강력하게 예언자를 재촉하였고 예언자는 여인을 "따라갔으며" 결국 아이를 살렸다. 엘리사는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엘리사의 장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의 알려 주심"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황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여인의 절박한 요구를 충분히 살폈으며 아이를 살릴 때도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침착하게 단계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동안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오늘날 답답한 가슴을 안고서도 열심히 일하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한 줄기의 빛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나 결코 떠나시지 않으시며 기도로 준비하는 주의 주의 일꾼들을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도록 도약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협력함으로 무능력한 목회자는 능력을 회복하고 아이 잃은 평신도는 자식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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