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위기와 해결" 혹은 "예언과 성취"라는 큰 구조 속에 있다. 포위된 사마리아 성은 굷주림 속에서 참담한 상태까지 이르렀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위기가 해소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예언되고 그 능력이 실현되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약하고 병든 사람들이 큰 활약을 하고 있는 특이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큰 능력을 행사해야 할 왕과 그 신하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방식을 보면 전체적인 상황을 더듬어 가는 형식이 아니라, "왕에게 호소하는 여인의 이야기"와 "병자 네 사람의 이야기" 등 특수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이야기의 맥락을 날카롭게 제시해주는 기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속에 부각되는 인물들은 예언자 엘리사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네 사람의 문둥병자이다. 누구보다도 가장 부각되는 주인공은 바로 숨어 계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성을 에워싸고 항복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비축해둔 양식으로 얼마간은 버티었지만 결국 양식은 바닥이 났고 가축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가축도 없어지니 전투력의 핵심인 말까지 잡아먹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성 중의 한 여인이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며 호소하였다. "하루는 내 아들을 삶아먹고 하루는 네 아들을 먹자"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연이다. 왕은 이 어처구니없는 참담한 말에 판결을 내리는 대신 자신의 옷을 찢으며 탄식하였다(6:26-30).
사마리아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권력을 누린 사람들과 부유한 생활을 즐긴 사람들 그리고 학식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위기타개책이 "사람 잡아먹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재판을 신청하는 사안도 "왜 사람 잡아먹는 일을 방해하는가"하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튼튼한 사마리아 성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이제 이 성벽은 자신들을 가두어두는 쇠창살이 되어 버렸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한 손에 쥐고 있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왕에게 기대를 걸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왕은 무능하여 탄식밖에 할 줄 몰랐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도 힘들었으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이들 가운데에도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언자 엘리사였으며 그를 찾아온 장로들이었다(6:32). 사마리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왕은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절망가운데 빠져있었지만(6:33), 예언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신뢰하고 희망의 메시지로 설교하고 있었다(7:1)
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있었다. 병에 걸려 부정하다 하여 사마리아 성에서 쫓겨나가 성문 밖에 살고 있었던 나병환자들이었다. 이들은 성내 사람들의 적선으로 겨우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기대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나도 성안으로 피신할 수도 없었던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총체적인 위기를 타개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자신의 굶주림도 해결하였고 수많은 사마리아 성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내는 큰 일을 해낸 용기있고 믿음있는 사람들로 부각되어 있다.
왕과 예언자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6:26). 한 여인의 처참한 호소가 있었다. 그러나 왕은 정식 재판을 요청하는 여인에게 한탄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있는 곳이요 포도주 틀에는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양식이 있는 곳을 말한다(민 18:27,30; 신 15:14; 16:13). 왕은 여인이 먹을 것을 요청하는줄 미리 짐작하고 자신이 도무지 양식을 구할 수 없음을 한탄조로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권력자 왕,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은 당연히 능력의 표본으로 나타나야겠지만, 이 이야기에는 왕이 "무능력의 표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속 살에 굵은 베를 입는"(6:30) 것과 "자기 옷을 찢는"(6:30) 정도 뿐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제의적인 탄식으로 종교적 귀감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능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은 무능력할 뿐 만 아니라 "불신(不信)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6장 33절을 자세히 보자.
그들과 이야기할 때에, 보라 그 사자가 그에게 내려왔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보라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으니 어찌 더 이상 여호와를 기다리겠는가."
왕의 태도는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7:2, 17)인 심복 장관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장관은 엘리사의 예언을 정면으로 반박하였으며(7:2) 그 결과 엘리사의 예언대로 사마리아 성문에서 백성들에게 밟혀 죽었다(7:20).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장관이 왕의 명령을 받고 성문을 지켰다는 것이다. 굶주린 백성들이 살기 위해 성문으로 돌진하는 그 물결을 이 장관이 왕의 명령을 받고 막으려 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돌진하는 배고픈 사람들의 물결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장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왕의 권위도 땅에 떨어져 밟혀 버렸다.
또한 왕은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사를 죽이려 하였다. 6장 32절에 보면 왕을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 부르는 구절이 나온다. 왕의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말이 아니라 "왕"이 살인자라는 표현이다. 엘리사가 왕을 혹독하게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으나 왕은 엘리사의 집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7장 17-18절을 참고해 볼 때 왕도 사자와 함께 엘리사를 죽이려 엘리사의 집으로 온 것을 알 수 있다. 왕이 사자와 함께 오는데 엘리사는 단순히 "문을 닫음"으로 왕을 막아내고 있다. 엘리사의 능력이 부각된 반면 왕의 무능력이 또 한번 드러나는 대목이다.
병자들은 적의 군사들이 퇴각한 기쁜 소식을 밤길을 더듬어 급히 알렸지만 왕은 그 소식을 적군의 함정이라 단정하고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7:12).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왕은 자신의 절망감과 패배감 속에서 의심만 할 뿐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험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부하의 충언을 듣고 적의 군대를 정탐하도록 허락하여 주는 정도였다.
한편 예언자 엘리사는 사뭇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왕을 찾아가지 않고 엘리사를 찾아왔으며, 엘리사의 명령을 받들고, 왕의 뜻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의 입술을 통해 중단하지 않고 울려 퍼졌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였으며(7:1) 그 예언은 어김없이 성취되었다(7:16).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장관에 대한 심판 예언도(7:2) 정확하게 성취되었다(7:20).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도 그리고 왕의 협박 속에서도 예언자는 당당하게 설교하였고 능력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두움을 꿰뚫는 예언자의 예지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가로 표현된 예언자의 설교
사마리아 사람들이 당한 위기상황은 시장 물가로 표현되어 있다. 6장 25절에 보면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라는 시장 물가로 포위된 사마리아 성이 얼마만큼 굶주려 있는지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귀 머리"는 보통 먹지 않고 버리는 것인데 이 것이 80세겔에 팔린다는 것이다. 80세겔이면 평상시 곡식 80스아(약 576리터)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참조; 7:1).
또한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는 물가도 나와있다. 합분태는 비둘기의 똥이며 "갑"이란 단위는 여기서만 나타나는 단위로 1/6스아(약 1.2리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 웅큼도 되지 않는(0.3리터) "비둘기 똥"이 평상시 곡식 5스아(약 36리터)를 살 수 있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둘기의 똥"이 음식이었느냐 땔감이었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다만 보통 때는 역겨워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야하는 참담한 실정을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합분태"를 NEB에는 "locust beans (구주 콩)" NJPS에서는 "carob pod (구주 콩깍지)"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아카디아어를 참고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의 설교내용도 물가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가 경제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은 특이한 일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면 시장 물가가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세겔"(7:1)이 될 것이라는 설교였다. 한 스아는 약 7.2리터 즉 두되 반 정도되는 곡식이며 이것을 한 세겔로 살 수 있다면 보통 때 보다는 다소 높은 가격이다. 바벨론에서는 은 한세겔로서 약 100리터를 살 수 있었다. 비록 보통 때 보다는 다소 비싸지만 전쟁 후 가격임을 고려할 때 이 가격은 정상적인 가격이요 평화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예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이 성취되었을 때도 시장 물가로 그 구원을 묘사하였다(7:16).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7장 3절 이하에 전개되는 병자 네 사람의 이야기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내게 만드는 특이하면서도 극적인 이야기이다. 병자들이 큰 일을 하였지만 그들이 최초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백성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적이며 근본적인 욕구에 의한 것이었다. 추방당한 병자이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무엇인가 살 길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순교와 희생이라는 거창한 단어만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 것이다.
이들이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7:4)는 말을 한다. 그들의 말투는 마치 민족을 위해 비장한 결단을 한 에스더의 말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와 같이 들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결단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지 한편 우스꽝스럽지만, 자신들에게는 삶과 죽음에 대해 비장하게 결단한 모습임을 주목해야 한다. 연약한 자나 병자의 목숨도 천하보다 귀중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남의 생명을 구하는 것만큼 귀중한 것이다.
이들이 "황혼(네쉐프)에 일어나" 시리아 군대 진영을 향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있을 때 시리아 진영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그들의 귀에는 군마(軍馬)소리와 전차소리 등 큰 군대의 이동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장기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다른 나라의 구원병이 올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결국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시 히타이트 군대와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왕에게 매수되어 구원병을 파견한 것이라 결론을 얻은 그들은 황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단어는 시리아 군대가 퇴각한 시각이 "황혼(네쉐프)"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병자 네 사람이 아픈 몸을 끌고 시리아 진영으로 가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7장 6절에서 분명히 밝히기를 하나님께서 시리아 군사들이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병자 네 사람의 발소리를 천군만마의 이동소리로 바꾸어 놓으셨는가? 우리는 그 상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를 조망해 보건데,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아픈 몸을 끌고 이동하는 가련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황혼"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배열한 모습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병자들은 아무도 없는 시리아 진영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값진 물건들을 챙기다가 문득 굶주려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이런 말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우리가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왕하 7:9)
병자들은 아름다운 소식 즉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을 비판할 줄 알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이 자신들에게 미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마치 바울이 "전하지 않으면 화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니다. 다만 배고픈 생명끼리 느낄 수 있는 아픔에 대해, 양심의 아픔에 대해 말한 것이요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다. 왕궁과 추방당한 병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그들을 추방하였고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픈 몸을 끌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다시 돌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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