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 23:26-30,역대하 35:20-25 요시야의 죽음

호리홀리 2015. 7. 22. 12:27

열왕기하 23:26-30; 역대하 35:20-25

 

         기원 전 609년경, 팔레스틴 서북부, 갈멜산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스르엘 평원에 이르는 길의 중간 지점 쯤에 “므깃도”, 이 곳에서 앗수르 제국을 도와 신흥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 가의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애굽 왕 바로 느고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에서 요시야 왕이 전사(戰死)한 사건이 일어났다.

     요시야 왕은 최대의 “신명기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서 남 왕국 다윗 왕조의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었던  왕이었다.  다윗 이래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고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즉 나이 만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만 30년 간의 통치생활을 끝내고 므깃도에서 전사(戰死)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분명, “요시야” 왕은, 모세 이래로,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대의 종교적 위인으로서 성서 역사가들이 한결 같이 입이 마르게 찬양한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장차 올 새 메시아 대망 신앙의 중심부에도 이 “요시야” 왕이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의 그런 성군(聖君)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시야 왕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하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몰락이 눈 앞에 다가와 있다는 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한 희망의 사건이었는데,  이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 지도자인 요시야가 어이없게도 앗수르를 지원하러 가는 애굽 원정군의 길을 막다가 그토록 어이없이 비명에 죽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든 이스라엘인들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기였다.

   원수 앗수르 제국이 신흥 바벨론 제국의 힘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몰린  다시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 반드시 망하여야 할 저 원수의 나라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의 행위란 누가 보아도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반역행위였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분명 역사의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의 역사섭리란 앗수르를 멸망케 하고 바벨론을 일으키는 그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 “느고”의 원정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이미 세계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기시고 계신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게도 “요시야”가 바로 이 바로 느고의 반 역사적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죽었다는 점이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뜨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악명 높은 저 꺼져 가는 앗수르 제국을 도우려는 애굽 왕 느고의 북방 원정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거스르는 잘못임을 알려 주려한 그 요시야가 도리혀 그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다:  “성군 요시야가 이 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야훼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이 곳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해석학적 노력은 유다 역사가들의 연구실 곳곳에서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에 나타난 이 돌연변이적인 요시야 왕의 급서(急逝)는 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고는 결코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  해석인 열왕기의 해석과 그리고  역대기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열왕기하 23장을 통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스라엘로 이끌어 들인 그 종교적 배신에 대한 진노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이 저질러 온 죄, 그 중에서도 약 50년 이라는 반세기 이상의 통치기간 동안에 범한 므낫세 왕의 범죄는 이미 야훼 하나님께서 신흥 바벨론 제국을 등장시켜 유다 왕조를 징계하여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을 통하여 저질러 온 이스라엘의 그 극악한 죄 때문에 앗수르를 통하여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리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통하여서는 남왕국 유다를 치도록 벌써부터 확고하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이미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시야 왕의 선(善)과 의(義)로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요시야의 “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역대기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등장시켰고 그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야훼 하나님의 신탁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어 요시야 왕의 이 므깃도 전사사건을 기록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애굽 왕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 전쟁에 참여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는 것은 비록 “바로 느고”가 이방 나라의 왕이고 또 앗수르를 도우는 것이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를 도우는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바로 느고”가 비록 이방 나라 애굽 왕일지라도 그의 입에서 선포된 그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길을 막는 일,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로서는 마땅한 일임이 확실한데, 그리고 악명 높은 민족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 잘못된 길을 막는 요시야 왕을 왜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일까 하는 것이다.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 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다가 매국노(賣國奴)라는 오해를 받고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가진 의미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전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비판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즉 유다의 죄를 치시려고 신흥 바벨론을  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에 대해서 순종이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역대기는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시야와 같은 전무후무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인간의 이념이, 인간의 도덕적 잣대가 그것을 장악하려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려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남쪽에 있는 대국 이집트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 중동지역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넘겨 주셔서 그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치게 하시려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하리라는 것, 즉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을 왜 요시야가 깨닫지 못하고 이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 재편의 섭리에 간섭하려 들려고 하느냐는 것이 역대기의 역사해석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요시야  조차도 앗수르제국은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 애굽이 나서서 앗수르를 도운다 할지라도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를 건질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겠다.

 

    이 신앙을 증언하기 위하여 역대기는 이방인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증언을 끌어 들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악”(惡)을 임시방편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요셉 이야기는 그것을 말해 주는 가장 드라마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이곳 애굽으로 팔아 넘긴 것은 실제로는 형님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을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미리 계획하셔서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신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그 어떤 인간 이념에 의해서도 간섭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실 뿐이지  성군 요시야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다는 잘못된 확신과 그리고 악명 높은 제국 앗수르를 돕는 일이 역사를 거스러는 일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지니치게 확고하고 뚜렷하여 성군 요시야 왕은 그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에 대하여 순종하기를 싫어 하게 되고 자기의 이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 때, 비록 성군 요시야라고 할찌라도 불행스러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짓고 그 애가를 노래하는 남녀 성가대들이 슬픈 곡조로 노래하며 그 곡조와 가사를 애가에 수록하여 오래 오래 역사 속에 전승시켜 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운영은 요시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의 계시인가?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와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