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구속사)

열왕기하6:24-7:20,구원의 소식

호리홀리 2015. 4. 14. 10:28

         포위된 성 (6:24-30)

        물가 폭등(6:24-25)
        엘리사 선지자가 사로잡은 아람 군대를 잘 대접하여 본국으로 보내 주는 관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아람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벤하닷이 온 군대를 모으고, 사마리아를 에워싸게 된다”(24절). 이스라엘은 평화를 추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한지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지만, 사마리아 성 안에는 먹을 거리가 떨어지게 되었고 물가는 폭등하여, “나귀 대가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이 은 다섯 세겔”에 거래되는 형편이 되었다. 

         한 여인의 부르짖음(6:26-29)
        모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자들은 결국 약자인 여인들과 어린이들이다. 네레이터는 이 당시의 상황을 한 여인과 왕의 대화를 통하여 전하고 있다.
        여인(A):         “나의 주 왕이여 도와 주십시오”(26하)
        왕(B):         “주께서 돕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너를 도울 수가 있겠느냐?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느냐? 포도주 틀에서 술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느냐?”
        왕(B’):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느냐?”
        여인(A’):         “며칠 전에 한 여자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저의 아들을 삶아서, 같이 먹었습니다. 다음날 제가 이 여자에게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더니, 이 여자가 자기 아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습니다.”
        위의 구조를 보면, 왕과 여인 사이에 두 번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첫 번째 대화에서 여인의 말은 짧으며, 왕의 대답은 길다. 그러나 두 번째 대화에서 말의 길이는 전도되고 있다.
        첫 대화에서 여인은 아주 짧고, 간곡하게 왕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왕은 마치 말 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긋하고 비현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주님이 도우시지 않는 데, 내가 어찌 도울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현재의 위기 상황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 넘기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무능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 곡식”과 “새 포도주”를 언급할 정도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안이하고, 낭만적이다. 왕은 약자를 죽음에서 건지지는 못하더라도, 용기라도 주어야 할 터인 데, 오히려 여인을 좌절시키고 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왕은 구체적인 사연을 묻는다. 여인은 어머니들이 서로의 아이를 잡아 먹는 현실을 고백한다. 이것은 바로 신명기의 저주가 현실화 된 것이다(신28:53-57). 즉, 신학적으로 볼 때, 선지자 모세의 말씀이 역사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에 유다 왕국도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같은 일이 벌어졌다(애 4:9-10; 렘
19:9; 겔 5:10).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라고 묻는다(사 49:15). "물론, 그녀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 인간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잊고 자기 필요를 자식 앞에 둘 수 있다. 그들은 자식의 생명까지 빼앗고 버리는 지점까지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약속하신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굵은 베옷을 입은 왕(6:30)

        여인으로부터 인간의 상상을 넘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전해 들은 왕은 자신의 옷을 찢는다. 그리고 그는 굵은 베옷을 입고 성 위로 다닌다. 백성들은 “그의 속 살에 굵은 베를 입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굵은 베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우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삼하 21:10; 사20:2).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참으로 가슴 깊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는 확신을 독자들은 갖기 어렵다.  

        엘리사의 구원신탁(6:31-7:2)

        왕의 복수(6:31-32)

        위기 상황 앞에서 베옷을 입고 성 위로 거닐 던 이스라엘 왕은 갑자기 “엘리사를 죽이겠다며 맹세한다”(31절). 그는 왜 엘리사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바로 앞에서 엘리사가 아람 군대에 베푼 관용정책 때문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얕잡아 보고 쳐들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라의 최종적인 책임자로서 왕이 선지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소인배”로서의 그의 모습 만 보여줄 뿐이다.
        이 때 엘리사는 “사마리아에 집”을 갖고 있었으며, 성의 장로들과 함께 있었다. 아마 그는 국난을 당하여 장로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왕”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왕은 늘 홀로 있으며, 냉소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전쟁 중에서도 백성을 돌보고 있다. 왕은 성벽 위를 괴로움 가운데 걷고 있지만, 엘리사는 장로들과 기도하며 나라의 회복을 바라본다.
        이 때, 왕은 분명히 “엘리사를 죽이기 위하여” 그의 전령과 특수부대를 보내었다. "여러분은 살인자의 아들이 나의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전령이 오거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를 보내 놓고 뒤따라 오는 그 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벌써 들려 오고 있지 않습니까?”(32절, 표준). 

        왕의 불신과 엘리사의 구원신탁(6:33-7:1)
        왕은 엘리사에게 최종적인 전갈을 전한다. 엘리사가 장로들과 함께 말하고 있는 동안에, 왕의 사자가 엘리사에게 와서 왕의 말씀을 전하였다. "우리가 받은 이 모든 재앙을 보아라. 이런 재앙이 주님께로부터 왔는데, 내가 어찌 주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리겠느냐?”(33절)
        바로 이 때 엘리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주의 말씀을 들으시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소. 내일 이맘때 쯤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사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셨소."(7:1)
        왕의 질문과 엘리사의 대답은 불신과 믿음의 완벽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왕은 사실 주님을 기다린 적도 없고 주님께 기도한 적도 없다. 그러나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과장한다. 

         한 장관의 불신과 엘리사의 심판 신탁(7:2)
        왕 만 불신앙 가운데 젖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신하도 왕을 닮았다. 그 왕에 그 신하이다. 그는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였으므로 왕과 매우 가까이 있는 자였다.  
        왕의 신하의 책망: “비록 주께서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엘리사의 대답: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볼 것이오.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오."
        왕의 신하는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가능을 선언한다. 그는 “하늘에 있는 창고 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벌써 “만나”의 기적을 잊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대책은 “하늘의 창”을 여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아람군의 창고”를 열어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구원의 소식(7:3-16)        

        사라진 아람 군대(7:3-7)
        이제 구원의 소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문둥이들”을 통하여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문둥이들은 왕과 왕의 장관과 큰 대조를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왕은 아들을 빼앗긴 한 여인에게, "주께서 돕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너를 도울 수가 있겠느냐?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느냐? 포도주 틀에서 술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느냐?(27절)라고 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둥이들은 달리 묻는다. “그 무렵에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성문 어귀에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느냐’?”(7:3) 문둥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살 길을 함께 찾아 보자고 말한다. 그들은 왕처럼, 성 안에 살지도 않고, 성문 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훨씬 더 건설적이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 묻고 있다.
        문둥이들은 “아람 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람 진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람 군대는 “병거소리, 말소리,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모두 도망치게 되었다. 우리는 아람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로 문둥이(mtsr`m)와 “이집트”(mtsr’im) 사이의 음성학적 유사성이 흥미롭다. 여기의 문둥이들 네 명(아르바아)은 앞에 있는 “(하늘의) 창문”(아루보트)과 음성학적으로 유사하다.
어쨌든 아람 군대의 포위를 푼 일은 오직 주님 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밤에 은밀히 일하신다. 

         문둥이들의  반성(7:8-10)
        
        문둥이들은 “먹고, 마시고, 은금을 감추다가”, 갑자기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날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고, 내일 아침 해 뜰 때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오히려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왕궁으로 가서, 이것을 알리도록 하자”(7:9). 이들의 말은 왕의 말과 매우 대조적이다. 앞에서 왕은 분노에 가득 차서, “오늘 엘리사의 목을 베겠다”고 맹세하였다(6:31). 그러나, 문둥이들은 기근에 처한 사마리아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며, “지금 전하자”고 맹세한다. 왕과 문둥이는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가장 높은 자와 가장 낮은 자로 대조되지만, 마음을 쓰는 것을 보면, 누가 왕이고, 누가 문둥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네레이터는 그들은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주님께서 이 네 명의 약자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구원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를 건진 영웅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왕의 의심과 물가 정상화(7:11-16)

        문둥이들은 문지기에게 가서, 상황을 보고하며, 문지기는 다시 왕의 신하들을 통하여 왕에게까지 소식을 전한다. 왕은 “밤에 일어났다”고 말한다(12절). 이것은 그가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잘 자고 있다. 그는 아람 군대가 철수하였으며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는 아람 군대의 전술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엘리사의 예언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고 있지 않다. 엘리사가 말한 “가격 정상화’는 하룻 밤 사이에 이루어진다(16절). 

        4. 포위 끝과 성문에서 밟혀 죽은 왕의 장관(7:17-20)

        이  이야기는 “성”과 “성문”으로 시작되고, 진행되며, 이제 마무리 된다. 아람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에워싼 후, “왕은 성벽 위로 걷고 있었다”(26절). 그는 여인의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성벽 위를 걷고 있었다”(30절). 엘리사 선지자는 “사마리아 성문에서 가격이 정상화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7:1). 왕의 장관은 “주님께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도전하였다. 문둥이들은 “성문 밖에 살았다”(7:3). 그들은 아람 군대가 도망간 것을 알고, “성 문지기”에게 소식을 전하였다(7:10). 백성들은 “성문” 밖으로 몰려 나가면서, 왕의 장관을 “밟아 죽인다”(17절). 이리하여, 불신앙 가운데 살던 장관은 “구원의 현장”인 “성문”에서 즉각적으로 죽음을 당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19절). 엘리사는 자신의 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