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이천 팔백 오십여 년 전쯤에 북왕국 이스라엘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윗 쪽에 있던 아람 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에워쌌습니다. 오래 포위되어 있다 보니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옛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집과 동네에서 쫓겨나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열왕기하 7장에는 특별한 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네 사람은 적군이 쳐들어와 성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 어귀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딱한 모습입니다.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도 이들은 동포들에게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앞에는 적군이요 뒤에는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네 사람은 그야말로 갈 데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서로 의논합니다. “여기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무슨 짓이라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안에는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 본들 누가 우리를 상대해 주겠는가? 성한 사람들도 굶주리는 판에 우리 같이 몹쓸 병에 걸린 사람에게 누가 먹을 것을 주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쩌면 적들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을까? 아니 우리를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지, 뭐. 우린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은가?”
이 네 사람은 적군에게 항복하기로 뜻을 모으고 해질 무렵에 적진으로 나아갔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적진이 텅텅 비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적군들의 귀에 엄청난 군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적군들은 이스라엘 왕이 요청한 지원 부대가 온 줄로 착각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적군의 진지가 텅 빈 줄 알아차린 이 네 사람은 온 진지를 휘젓고 다니면서 적들이 남겨놓은 음식을 찾아 우선 굶주린 배를 채웁니다. 다음으로 금과 은을 비롯하여 값진 옷을 보는 대로 모아 가져가려고 합니다. 한참 신나게 물건들을 챙기던 이들은 다시 의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적군이 물러간 이 날은 정말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이 아닌가? 이 소식을 우리만 알고 이 밤을 그냥 지낸다면, 우리에게 천벌이 내리겠지. 지금이라도 얼른 성에 들어가 이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마음먹은 이 네 사람은 사마리아 성벽으로 나아가 문지기에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성안의 왕과 신하들은 이 소식을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 정탐꾼을 내보내 확인한 뒤에야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불러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첫째,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이 네 사람에게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둘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가운데에나 우리 둘레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이나 청각이나 팔다리 등 몸 여기저기에 장애가 있어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무척 힘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그 어느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오다가 갑자기 몹쓸 병에 걸리거나 집안에 엄청난 불행이 닥치는 바람에 한 순간에 삶의 모든 희망을 빼앗기고 좌절한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다른 재능을 타고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꿈을 맘껏 펼쳐보지 못한 채 나날의 삶에 허덕이며 살아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본문의 네 사람처럼 사회에서 격리되고 버림받는 처참한 심정을 어루만지며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알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나선 뒤에도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의 편견과 차별과 냉대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너무나 힘에 겨워 주저앉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분들도 계십니다. 참으로 쓰라린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고 그리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런 분들이 그냥 주저앉아 있기만 하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본문의 네 사람이 3절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죽기를 무릅쓰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본문의 네 사람이 비록 항복하기 위해 적진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갔듯이,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려운 가운데 있는 우리도, 우리의 이웃도 어쨌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이 특별한 네 사람에게 이스라엘 구원의 현장 가장 먼저 보게 하셨듯이, 자기 한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현장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깨닫는 둘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사회나 교회가 따돌리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놀라운 사건을 가장 먼저 경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 약한 사람에게 먼저 구원의 은혜를 맛보는 영광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시지 않았습니까?
열왕기하 7장의 첫머리와 끝부분에는 이 시간 본문의 주인공과 아주 대조되는 인물이 하나 나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고위 관리가 그 사람입니다.
1-3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16-17절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이 관리는 능력 많은 예언자 엘리사로부터 구원의 말씀을 직접 듣고서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구원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예언자는 고사하고 일반 백성도 만날 수 없었던 나병환자 네 사람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현장을 맨 먼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성경 찬송 들고 부지런히 예배당에 드나들고 점잖은 목소리와 태도로 성경 구절을 말하고 멋지게 기도하며 교회 일을 잘 한다고 해서, 또는 상황을 잘 분석하여 그에 꼭 들어맞는 설교를 감동적으로 하고 교회와 사회의 당면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겪어보지 못하고서, 겉으로만 그런 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회 지도층에 속하던 사람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나 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9장 끝부분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노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시각장애인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바리새인이 “우리도 시각장애인이란 말입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시각장애인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도 지금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소외와 좌절이라는 괴로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남달리 먼저 경험하게 하셨고 지금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셋째, 그러한 은혜를 제대로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늘 당장 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표현인 ‘아름다운 소식’을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복음’이 됩니다. ‘복음’을 뜻하는 신약성경 헬라어 낱말의 배경에는, 오늘 본문에서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옮긴 구약성경 히브리어 낱말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영 죽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된다는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적군에 에워싸여 망하기 직전에 있던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위기에서 벗어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의 ‘복음’과 이 시간 본문의 ‘아름다운 소식’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며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겪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벗어난다는 아름다운 소식도 포함됩니다. 아니, 죽어서 누릴 영생을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바로 이런저런 구체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서 맛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실패와 좌절과 소외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구원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얻은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처음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합니다. 그 공동체가 때때로 나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따뜻이 맞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이요. 그 공동체의 각 부분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그 공동체에 우리가 먼저 겪은 구원의 소식을 오늘 당장 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속한 동네, 도시, 나라, 더 나아가서 온 누리에 참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 대해서 오늘 당장 알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 매일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고, 있는 힘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곁들여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주인공 네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이들을 그저 나병환자,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기쁜 소식을 전한 사람들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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